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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멧돼지씨.

어젯밤에도 다녀갔군요. 출근 도장이라도 만들어 놓을 걸 그랬나요. 당신의 흔적 간 곳 없이 발자국만 어지럽고, 초토화된 고구마 줄기 땡볕에 널브러져 있네요.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고구마 밑 든 곳만 척척 훑어가십니까.

적당히 하십시다. 여름내 땀 흘린 농부 생각해서 그저 삼 분의 일 정도는 남겨야 하는 것 아닌가요? 우리도 식구가 있거든요. 댁네도 무슨 긴박한 사정이 있을지 몰라도, 여기서 이러시면 어디 농사 짓겠어요? 참는 것도 능사가 아니라, 오늘은 말해야겠어요.

처음 한 고구마 농사, 불청객이 나타났다

지난 오월 대야 장에서 꿀 고구마와 호박 고구마순 열 단을 샀어요. 고구마 농사 처음이거든요. 매년 친정아버지한테 편하게 앉아 얻어먹기만 했는데 아버지가 안 계시니 어째요. 밭을 놀리면 안 되겠고 좀 쉬운 작물 없을까 고민하니, 농사 경험 있는 친구가 고구마를 권해서 덜컥 정했습니다. 고구마순 제대로 뻗으면 다른 작물에 비해 풀 맬 일이 적다는 말에 솔깃했죠.

이웃 밭 시숙한테 경운기 빌려 밭을 갈고 골을 만들어 고구마를 심었습니다. 우리는 다 계산이 있었죠. 동생들 한 상자씩 주고, 시누이들도 좀 드리고, 모임 갈 때 한 솥 쪄 가려는 기대 없이 어찌 농사짓나요?
  
그런데 이게 뭡니까. 사람 짓 아니고는 이럴 수 없다 싶게 군데군데 콕콕 집어 파헤쳐진 고구마밭을 보고 말았습니다. 위 밭에서 농사짓는 아저씨 왈, 멧돼지 당신이랍니다. 덫 몇 개 설치해놨으니 조심하라고요.  
 
처음 파헤쳐진 고구마밭
 처음 파헤쳐진 고구마밭
ⓒ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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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대책을 모색했습니다. 제일 나은 방법을 찾아보았죠. 총을 사용할 수 없는 일이어서, 냄새로 당신을 쫓아내기로 했습니다. 밭 둘레로 비닐 끈을 둘러 나프탈렌이 든 고리를 걸었고, 크레졸 액을 빈 페트병에 나눠 담아 윗부분에 구멍을 뚫어 놓았습니다.

산 밭을 오르면 향긋한 풀 냄새와 열기는 뜨겁지만 풍겨오는 바람 끝에서 여름을 훅, 느껴야 되는데, 이제 저를 반기는 것은 나프탈렌과 크레졸이 섞인 지독한 냄새였습니다. 저절로 숨을 참게 되면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회의가 들었습니다. 꼭 이래야만 하나, 차라리 고구마고 뭐고 다 사 먹을까? 하는.

한동안 잠잠했습니다. 당신이 덫에 걸렸다는 소식도, 냄새를 맡고 멀리멀리 가버렸다는 소식도 없이 고구마밭은 잎사귀가 무성했습니다. 아, 비가 내리는 밤에는 멧돼지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정보 한 개 들었네요. 50여 일의 길고 지루했던 장마가 끝났습니다.

장마 끝에 다시 온 당신, 너무 합니다
 
멧돼지는 식사 중
 멧돼지는 식사 중
ⓒ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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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다시 왔더군요. 잊지 않고, 어김없이. 당신은 떠난 것이 아니라 잠시 다른 곳에 한눈팔았던 것이죠. 젠장, 이번에는 아주 본격적으로 뒤졌더군요. 차곡차곡, 작정하고 당신의 주둥이 끝을 들이댔더라니까요.

"정말, 농사 못 해먹겠구나."
    
한번 만나 보고 싶네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내려와 꿀꿀, 쩝쩝, 맛나게 잡수는지 진심, 존재가 궁금합니다. 당신과 내가 대면하면 방송에 나올 일이지만 참으로 답답하네요. 이토록 커다란 흔적과 한숨, 일 년 농사 망쳐놓고 천연덕스레 사라졌으니까요. 하긴 당신도 먹을 것이 궁했겠어요. 그리 장마가 길었으니.

이맘때가 되면 고라니, 멧돼지 때문에 농작물 피해 신고가 잇따른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동물과 인간과의 싸움이지요. 그런데 언제까지 이런 일을 반복해야 할까요? 줄기라도 건져볼까 땡볕과 씨름하니 땀이 줄줄 흐릅니다. 고구마밭을 뒤로하고 터덜터덜 내려오는 발걸음이 허망합니다. 한바탕 축제 마냥 밭에서 보낸 설렘과 기대, 맘속으로 미리 수확해 본 기쁨까지 고스란히 빼앗긴 기분입니다.

"아무렴, 나 먹을 것은 남겠지 뭐."

우리가 조화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허탈한 마음을 위로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당신도 참, 할 말 많고 억울한 면이 있을 겁니다. 오로지 인간에게 피해만 주는 존재가 되어 버렸으니까요.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언제까지 당신 탓만 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당신들을 잡아들이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환경부 통계에 의하면 '작년부터 올해 4월까지 14만 마리가 넘는 멧돼지가 포획'되었답니다. 당신들 개체 수가 어마어마하게 늘어나고 있다는데 어떤 현명한 대책이 필요할까요.

옛 신문을 들춰보니, '독일의 멧돼지 퇴치법은 인가와 숲 사이에 완충지대를 설치해서 사람과 멧돼지 세상이 직접 충돌하지 않도록 그들 사이 일정 폭의 땅에 멧돼지가 먹고 쉴 수 있는 여러 야생식물이 자랄 공간을 조성했다'(출처 : '멧돼지를 퇴치하는 법' 한승동)고 합니다. 물론 그 후로 인가에 출몰하는 멧돼지는 급격하게 줄었고요. 당신의 생각은 어때요? 괜찮은 방법이란 생각이 드나요?

각자의 영역에서 잘 살아가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할 것 같아요. 엽사들을 동원해 잡아들이는 일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끌어낼 수 없으니까요. 당신들도 인가에 내려오거나 차도를 가로지르다 목숨을 잃기도 하고, 상가나 주택에 들어왔다 무참한 피해를 보는 걸 원치 않을 겁니다.

어쩌면 인간의 잘못이 더 큰 지도 모르겠습니다. 마구잡이로 당신들의 터전을 갈고 뭉개고 무너뜨리는 일을 지금도 하고 있으니까요. 이쯤되고 보니 당신들도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죽하면 인간들의 삶을 기웃거릴까 싶어서요. 언젠가 서로 세상을 맘껏 누리며 살 날이 빨리 왔으면 하고 바라봅니다.

친애하는 멧돼지씨!

우리도 살고 당신들도 들로 산으로 맘껏 누비며, 먹을 것에 대한 불안과 배고픔이 없는 세상을 함께 고민해요. 혹시 내일도 오실 건가요? 미리 알기라도 하면 좋겠어요. 마을 사람들도 다 불러 서로의 고충을 허심탄회하게 풀어보게요. 막걸리도 한 오십 병 준비할까요? 

태그:#멧돼지, #고구마, #텃밭, #농사,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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