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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이라는 이름으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책더미 속에서 사심을 담아 알리고 싶은 책, 그냥 지나치긴 아까운 책을 오마이뉴스 라이프플러스 에디터가 골라 소개합니다.[편집자말]
고등학교 1학년, 학교를 쉬고 8개월간 동남아시아 배낭여행을 떠났다. 인도, 네팔, 태국... 총 8개국을 돌아다니며 현지인과 세계 여행자들을 만났다. 여행이 끝나고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학교를 완전히 그만뒀다. 대신 8개월의 경험을 밑천 삼아 <로드스쿨러>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책을 썼다.

'제대로 영화를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그 이후다. 검정고시를 거쳐 예술인을 꿈꾸는 이들에겐 선망의 공간인 한국예술종합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2017년 가을, 다시 한국을 떴다. 프로젝트차 방문했던 유럽의 여러 도시 중에서, 유독 암스테르담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 다음해 곧바로 네덜란드 필름아카데미 유학길에 올랐다. 다큐멘터리 <반짝이는 박수소리>, <기억의 전쟁> 등을 만든 이길보라 감독의 이야기다.

삶에서 두려움이란 걸 느껴본 적도, 남의 눈치 본 적도 없는 것만 같은 이력, 천성이 대범했던 걸까. 그건 아니었다. 이길보라 감독도 면접장 앞에서 벌벌 떨고, 낯선 이들과의 파티에선 구석 자리를 찾는 평범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또, 배낭여행과 유학 모두 셀프 '펀딩'을 열어 비용을 충당할 정도였으니, 실패를 가볍게 딛고 넘어갈 금전적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에겐 딱 하나 다른 믿음이 있었다. '해보면 알게 될 것'이라는 믿음. 농인인 부모는 그가 어떤 일을 벌이든, 늘 똑같은 말을 해줬다. "괜찮아 경험."
 
... 오늘은 이런 일이 있었는데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시무룩해하면 아빠는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경험." 휴학을 하고 매일같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때도 아빠는 말했다. "괜찮아, 보라 경험." 어느 날, 임플란트를 하고 턱이 잔뜩 부은 사진을 찍어 보냈을 때도 아빠는 똑같이 말했다. "괜찮아, 경험." 내가 무엇을 하든,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돈을 버리든 시간을 버리든 아빠는 이렇게 말했다. "보라야, 괜찮아. 경험."  

이길보라 감독에게 "괜찮아 경험"이란 한마디는, 소리 없는 세상에서 매 순간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며 삶을 헤쳐나가야 하는 농인인 그의 부모가 알려준 특별한 '주문'이었다. 그는 이 주문에 기대어 늘 용감하게 낯설고 새로운 길을 택했다. 네덜란드 필름아카데미로 유학을 간 것도 그 무수한 선택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경험을 담아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를 펴냈다.

'다름'이 이상하지 않은 나라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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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보라 감독이 스스로 서문에서 밝혔듯,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는 단순히 유럽의 교육과 문화에 대한 예찬을 늘어놓는 책이 아니다. 그보다는 코다(CODA, Child of deaf adult, 청각 장애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비장애인 자녀)로 아주 어릴 적부터 농인과 청인의 세상을 연결했던 그가 암스테르담과 한국을 오가며 느낀 '경계인'의 시선을 담은 기록에 가깝다.

이길보라 감독은 말한다. 세상에 유토피아는 없고, 네덜란드에도 인종차별을 비롯한 무수한 '구별짓기'가 존재하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는 다양한 '시도'들을 목격했다고. 실제 그가 경험한 네덜란드는 총리든 학장이든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며, 성소수자들의 축제인 프라이드 페스티벌에 암스테르담 인구의 절반에 육박하는 인파가 몰려드는 나라였다. 

물론 한국과 네덜란드, 너무 다른 두 세계를 오가는 과정에서 해프닝이 없었던 건 아니다. 가령, 그는 필름 아카데미에서 진행한 첫 프레젠테이션에서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그간 만들어온 작품을 소개하며 자신이 농인의 자녀이자, 탈학교 청소년이었다고 설명했을 때 강의실에 있던 동기나 교수, 그 누구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한국에선 보통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청중들이 놀라거나 감동 받아 발표의 분위기가 고조됐는데, 아무런 감정적 동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강의실에 앉아 있는 이들의 나이와 출신, 가족 구성만 해도 몇 마디로 정리할 수 없을 만큼 복잡했다. 학교를 중퇴한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니까, 그곳에서 이길보라 감독이 걸어온 삶은 놀랍거나 특이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이길보라 감독은 "나를 둘러싼 환경과 맥락이 달라졌고 그에 따라 나의 작업 역시 달라져야만 했"음을 깨닫는다.

경계를 없애는 시도와 모험들

'다름'이 이상하지 않은 나라에서, 이길보라 감독은 작품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에 대해서도 변화를 꾀한다. 식비를 아끼기 위해 슈퍼마켓 음식이나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화장이나 옷차림에 들이는 시간을 줄인 것. 사소하지만,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한 확고한 시도들이었다. 이길보라 감독은 "남들과 비교하기보다는 각자의 삶에서 소중한 것을 찾"는 암스테르담이라는 도시에 편안하게 몸을 내맡겼다. 
 
... 한국에서 매일같이 안부처럼 들었던 말을 여기서는 듣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내니 몸에 켜켜이 쌓여 있던 억압의 겹들이 보였다. 하나둘씩 그 긴장을 걷어내는 연습을 했다. 숨을 크게 내쉬고 공원에 누워 하늘을 보면 이렇게 살아도 정말 괜찮구나,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네덜란드라는 제3의 터전에서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는 애인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계기를 갖기도 한다. 한국과 일본엔 없지만 네덜란드에는 있는 '파트너십' 제도를 활용해, 이곳에서 정착할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 것이다. 그에 앞서 얼떨결에 '속전속결 상견례'를 진행하기도 하는데, 그 과정이 퍽 특별하다.

일본의 한 식당에서 마주앉은 두 가족은 일본어를 영어로, 영어를 다시 한국어로, 한국어를 수어로 옮기며 느릿느릿 서로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데,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다 같이 눈물을 터트리고 만다. 언어와 선입견이라는 장벽을 넘어서, 서로를 존중하고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는 장면이다.
 
... (애인의) 어머니는 요새 한국 수어를 배우고 있는데 일본 수어와 많이 비슷하다며 주먹을 쥐고 검지와 엄지를 두 번 붙였다. '같다'라는 뜻의 한국 수어이자 일본 수어였다. 어머니가 손을 움직여 수어를 한 순간, 가슴이 벅찼다. 새로운 방식의 관계 맺음이 어쩌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이게 '기본'이고 당연한 '디폴트값'이다.

이처럼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에는 각기 다른 나라, 그리고 나와 타인 사이에 놓인 벽을 허물기 위해 부단히 고민하고, 깨지고, 끝내 길을 만들어낸 이길보라 감독의 경험담이 촘촘히 담겨 있다. 이 책은 '경계를 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누군가를 향해, 혹은 삶의 여러 길목에 그어놓은 선들이 사실 불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길보라 감독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라는 생경한 도시를 배경으로 글을 풀어내고 있지만, 새로운 세상과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시도와 모험'을 한국에서라고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경계를 없애는 상상이 부족한 곳이기에, 오히려 더더욱 이같은 시도가 필요하다. 그 모험 앞에 이 책은 좋은 지침서가 되어 줄 거다. 때로 막막할 땐 이 여성 청년이 '자신의 속도대로' 먼저 걸어온 이 길을 보기를, 그리하여 '다름'을 알아갈 용기를 얻기를 바란다.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 삶의 지도를 확장하는 배움의 기록

이길보라 (지은이), 문학동네(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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