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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은근히 핑프네."

메신저를 보다가 내가 말했다. 옆에서 남편이 '핑프'가 뭐냐고 물었다. 그러게, 그게 뭘까? '핑프'는 핑거 프린스 또는 핑거 프린세스를 줄인 말이다. 조금만 찾아보면 알 수 있는 것을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고 다 물어본다는 뜻이다.

정확한 뜻은 몰랐지만 검색 한 번만 하면 다 알 수 있는 것까지 물어보는 사람이라고 들은 풍월이 있었다. 메신저에 몇 번이나 비슷한 답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다. 

코로나로 외출을 거의 안 하다보니 선크림이 떨어진 줄도 몰랐다. 당장 쓸 게 없어 장 보러 가는 길에 자주 가던 화장품 로드숍에 들렀다. 지금 50% 할인 중이라고 해서 다른 것은 볼 것도 없이 바로 계산해 달라고 했다. 계산대 앞으로 갔던 직원은 확인해 보더니 할인 행사가 끝났다고 했다.

어차피 내가 가는 곳은 저렴한 브랜드이고 기본 선크림이니 가격이야 얼마 안 하는데. 할인은 안 되지만 그냥 살까 몇 초간 망설였다. 그 몇 초 사이에 직원이 내게 카드를 돌려주며 지금 사면 너무 비싸니 할인할 때 다시 오라고 했다. 

그게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지 무시하는 말인지 헷갈려서 어버버하는 사이 직원은 다른 손님에게 가버렸다. 이 찜찜한 기분은 뭐지? 나는 할인 없이 제값을 주고 사려던 마음이 깨끗하게 사라져서 그냥 나왔다.

내가 로드숍을 고집했던 이유는 쓰던 대로 구입하기 편해서다. 새로운 걸 사고 싶어도 너무 종류가 많아서 고르기 힘들 때, 뭐가 나에게 맞는지 물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코로나 시국으로 온라인만 매출이 올라간다는데 굳이 매장을 찾은 것도 그랬다. 하지만 일부러 찾아갔다가 마음만 상했으니 어쩌랴. 그냥 온라인으로 구매해야지.

선크림 사려고 봤더니, 낯선 글씨
 
 '무기자차', '유기자차', '유무기자차'로 종류가 나뉜 선크림. 이게 뭔가 봤더니...
  "무기자차", "유기자차", "유무기자차"로 종류가 나뉜 선크림. 이게 뭔가 봤더니...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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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롭게 스마트폰을 들었다. 예전에 이용하던 온라인 쇼핑몰 앱을 새로 깔고 들어갔다. 너무 오랜만이라 아이디도 비밀번호도 잊어버려서 다시 찾기를 했다. 한참 걸려 로그인했다.

그곳은 하나의 브랜드가 아니라 다양한 브랜드를 갖추고 있다. 잘 아는 사람들에게는 쇼핑 천국일지 몰라도 나처럼 별 관심도 없고 그냥 직원이 권하는 대로 고분고분 구입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복잡하고 어려운 세상이었다.

우선 '선크림'을 검색했다. 판매 베스트 상품부터 줄줄이 다양한 상품들이 늘어섰다. 가격과 모양이 마음에 드는 제품을 클릭했다. 다시 제품 상세 설명 화면. '무기자차', '유기자차', '유무기자차'로 종류가 나뉘어 있었다.

선크림에 차 성분이 들어간 건가? 나는 '무기자차'를 '구기자차'와 같은 차의 한 종류라고 생각했다. 근데 '무기자 유기자'라는 차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내가 모르는 사이 새로운 차가 나온 걸까? 옆에는 '수부지'라는 해시태그도 붙어 있었다. 수부지는 또 뭐야? 아무리 화면을 위 아래로 왔다갔다 하며 봐도 '무기자차', '유기자차', '수부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혹시 내가 빠뜨리고 보지 못한 설명이 있는지 화면을 확대하여 꼼꼼이 한 자 한 자 읽어내려갔다. 그래도 역시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상품 설명에서 찾기를 포기 하고 포털로 들어가서 그 단어들을 검색했다.

'무기자차'는 구기자차의 친구가 아니고 '무기적 자외선 차단제'의 줄임말이었다. 유기자차는 반대로 '유기적 자외선 차단제'일 것이다. '수부지'는 '수분이 부족한 지성 피부'를 말한단다. 예전엔 지성 피부 아니면 건성 또는 복합성 피부라고 했는데.

이제는 더 세분화해서 지성은 지성인데 수분이 부족한 것까지 구분해 부르고 있다. 내 피부가 뭔지 어느 분류에 들어가는지 알아야 쇼핑을 할 수 있다니. 게다가 무기적 성분과 유기적 성분의 특성까지 알아야 한다니. 그걸 또 줄임말로.

바로 얼마전까지 '꼰대'가 되지 않으려는 기성세대의 노력이 우스갯소리로 회자되었다. 몇 초의 망설임을 기다려 주지 않는 로드숍 직원에게 마음이 상한 나도 '꼰대'일지 모른다.

또 '라떼는 말이야'로 비틀어 꼬집는 이야기를 들으며 웃지만, 사실은 나도 그럴까봐 마음을 졸이곤 한다. 하지만 '라떼' 타령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내 생각이나 상식은 이미 '라떼'다. 옛날에는 지성, 건성만 알아도 화장품 사는데 문제가 없었는데, 요즘은 뭐가 이리 복잡해, 하는 마음이 절로 드는 것이다.

게다가 상품 설명에 '수부지'가 뭔지 한 줄이라도 설명을 넣어주면 안되나 볼멘 소리를 하고보니, 그들이 생각하기에 나도 '핑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는 단어를 검색만 하면 바로 나오는 세상이다. 검색 포털에는 '쇼핑 용어 사전'이라는 엄연한 카테고리가 있었다. 검색하면 알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소리없이 디지털 문맹이 되어가긴 싫은데

최근 부동산 대책에 대한 기사가 쏟아져 나올 때 '영끌해서 집 장만하는 30대'라는 헤드라인을 봤다. 뉴스에서도 '영끌' 같은 말을 사용하다니, 생각했다. '영끌'은 '영혼까지 끌어모았다'는 뜻이다. 예전엔 주로 여성 외모를 비하하는 은어였는데 이제는 작은 것까지 있는 대로 끌어모은다는 뜻으로 쓰인단다. 역시나 검색해 보면 신조어 사전에 그 뜻이 올라 있다.

아무리 언어도 살아 있는 생물처럼 변화하고 진화한다지만 그 속도가 너무 빠르다. 아직은 노력하지 않아도 들리는 말로, 넘겨짚는 센스로, 대충은 알아 들을 수 있다. 아예 생각지도 못한 몇몇 단어를 제외하면. 하지만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엄마가 내 나이일 때 아이들이나 쓰는 말을 엄마가 쓸 때면 '엄마가 왜 그럴까' 싶은 적도 있는데, 그런 안쓰러운 모습을 지금 내가 하고 있다.

나도 신세대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신세대'라는 단어조차 오래된 말이 되어버렸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빠른 노래 가사가 들리지 않고 아이돌 이름이 외워지지 않는 때가 나에게도 왔다. 적어도 나는 뒤처지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팬아저'를 '팬아저씨'라고 생각했다는 출연자를 구박할 때 나도 그렇게 생각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참고로 '팬아저'는 '팬이 아니어도 저장'을 줄여 부르는 말이었다.

나름 디지털 유목민으로서 잘 살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그저 얼마간 떠나 있던 온라인 쇼핑 세상에는 이제 내가 넘어서기 벅찬 장벽이 생긴 기분이다. 그냥 온라인 쇼핑을 포기하고 매장에 가서 사면 된다. 하지만 그걸로 끝일까?

내가 따라가지 못하는 세상의 변화가 무섭게 느껴진다.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고, 배워야 할 것이 넘친다. 이러다가는 소리없이 디지털 문맹이 되어 도태될 것 같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 변화하는 세상을 바라만 봐선 안된다. 꼰대도, 라떼도, 핑프도 되지 않으려면 부단히 노력하는 안쓰러움이라도 보여야 할 때다.
 

덧붙이는 글 | 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 올라갈 예정입니다.


태그:#핑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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