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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종 무용수들이 제주도 여행에서 찍은 사진.
 한예종 무용수들이 제주도 여행에서 찍은 사진.
ⓒ 한예종 무용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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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1일,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정상급 발레 무용수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세계적인 발레단에서 활동 중인 무용수들이다.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이기란 쉽지 않다. 코로나19로 공연이 중단되면서 금쪽같은 기회가 주어졌다.

한국 발레는 세계 중심에 있다. 러시아 마린스키 황실발레단부터 영국 로열발레단, 미국 ABT, 보스턴, 시카코, 그리고 파리, 헝가리, 스페인, 네델란드, 핀란드 국립발레단까지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들이 활동하고 있다. 오랜만에 고국을 찾은 발레 무용수와 한국예술종합학교(아래 한예종) 김선희 교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발레는 프랑스가 기원이다. 그런데도 한국 무용수들은 짧은 기간에 세계 최정상에 올랐다. 세계적인 안무가들은 찬사와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발레가 쌓아올린 성과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한국 발레는 K팝과 함께 대표적인 문화 콘텐츠로 우뚝 섰다.

비결이 뭘까. 한예종 출신 현역 무용수들에게 답이 있다. 세계 4대 발레단으로 러시아 마린스키, 파리 국립오페라발레단, 런던 로열발레단, 뉴욕 ABT(American Ballet Theater)를 꼽는다. 마린스키 수석 무용수는 김기민(27)이다. 그는 마린스키를 대표하는 브랜드다. 뉴욕 ABT에는 한예종 출신만 3명이다. 한성우, 박선미, 안주원씨다.

"어느 순간 발레가 운명처럼 다가왔다"  

한성우씨(28)는 발레를 하는 동생을 데려다주다 무용을 시작했다. 19살 때 로열발레단에서 1년 동안 연수 생활을 했다. "ABT에 입단했을 때가 가장 기뻤다." 로열발레단을 포기한 게 서운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는 "로열발레단 생활은 무척 힘들었다.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날도 많았다. 오죽했으면 런던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그날, 한예종 동료들과 식사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고 회상했다. 피나는 노력으로 그는 7년째 ABT 무대를 지키고 있다. "발레가 삶에서 전부는 아니다. 사람이 중요하다. 그들이 해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내가 먼저 다가갔다." 책벌레이기도 한 한성우씨가 뉴욕 생활 7년 만에 배운 삶의 지혜다.

보스턴 발레단에는 한예종 출신만 5명이다. 이수빈, 이선우, 이상민, 최지영, 한서혜. 이수빈씨(21)는 집 부근 문화센터에서 취미로 발레를 시작했다. 선화예고를 다니다 한예종 영재원에 입학했다. "발레는 책이나 영상이 아닌 사람을 통해 배운다. 그래서 사람과 유대가 중요하고 자존감이 높다. 발레를 할 때 행복하다."

영상 오디션만으로 보스턴발레단에 합격했다는 이씨는 "목표를 이뤘다. 하지만 부모님과 떨어져 생활한 게 처음이고, 언어와 문화가 달라 힘들다"면서도 "일찍 목표를 정하고 그 길을 향해 갈 수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이선우씨(23)는 아역 배우를 하다 발레로 돌아선 경우다. "삶의 기억 대부분이 발레다. 발레를 하면서 언제 포기할까 생각하곤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발레가 운명처럼 다가왔다. 이제는 직업 무용수로서 만족한다." 이씨도 초기에는 마음고생이 심했다.

입단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열쇠를 잃어버려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결국 그날은 지하철역에서 잤다. 당시만 해도 영어가 서투른 탓이었다. "이러면서까지 발레를 해야 하나 회의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게 편해졌다. 영어도 들리고, 사람들과 관계도 좋아졌다. 모든 일에는 시간이 필요함을 깨달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코로나 19때문에 일시 귀국한 한예종 출신 프로 발레 무용수
▲ 발레 코로나 19때문에 일시 귀국한 한예종 출신 프로 발레 무용수
ⓒ 임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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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민씨(22)는 뮤지컬을 배우다 발레와 인연을 맺었다. "무대에서 박수받고 관객들이 격려해줄 때 행복하다"는 그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배우느냐에 따라 배움의 크기가 달라진다. 발레단마다 고유한 성격이 있다. 춤출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고 했다.

이씨는 지난해 7월 보스턴발레단에 첫발을 디뎠다. "외국 생활도, 사회생활도, 자취도 모든 게 처음이다. 모든 게 어설프지만 무언가 이뤄간다는 게 기쁘다"며 "발레를 통해 한국을 알리고 많은 이들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정가연씨(27)는 시카고 조프리발레단에서 5년째 활동 중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호두까기 인형'을 보고 어린 클라라 역을 꿈꿨다. 유니버설 발레단 부설 아카데미와 선화예고를 거쳐 한예종에 진학했다. "대학을 졸업한 동생이 하루는 그러더군요. 누나는 일찌감치 목표를 정하고 흔들림 없이 가고 있어 부럽다."

정씨는 연습 벌레다. "파트너와 연습을 반복하고 무대에서 실현하면서 내가 성장하고 있음을 느낀다." 정씨는 "외국인 동료 가운데 실력은 뛰어나지만 무례한 무용수가 있었는데 끝내는 떠나고 말았다"면서 인간미를 강조했다.

파리 국립 오페라발레단에서 활동하는 강호현씨(24)는 공부에 더 관심이 많았다. "예중, 예고에 다닐 때도 발레를 내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예종에 입학해서야 내가 발레를 재미있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부터는 힘든 연습도 즐거웠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발레는 AI가 대체할 수 없다.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게 뿌듯하다."

강씨는 여행을 겸한 파리 방문에서 덜컥 오디션에 합격했다. "입단 초기, 현지인에게 우선 배역을 맡기는 것을 보고 속이 상했다. 그러나 외국인이라는 걸 인정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오히려 동양인이라는 점을 내세워 파고들었다. 결국은 노력하는 사람을 인정하고 기회를 줬다."
 
왼쪽부터 이선우, 강호현, 이수빈, 김선희, 필자, 정가연, 한성우, 이상민
 왼쪽부터 이선우, 강호현, 이수빈, 김선희, 필자, 정가연, 한성우, 이상민
ⓒ 임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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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 영국 로열발레단 전준혁, 헝가리 국립발레단 김민정, 핀란드 국립발레단 하은지, 네덜란드 국립발레단 최영규, 스페인 국립발레단 박예지까지 한예종 출신은 눈부시다. 한국 발레가 토대를 쌓기까지는 김선희 교수가 뒷받침이 됐다.

"대한민국이 자랑할 게 많지만 발레는 문화 선진국도 부러워하는 보물이다. 세계 유수의 발레단마다 한예종 출신이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 이런 문화 콘텐츠가 어디 있느냐."

김 교수는 "한국 발레는 종주국조차 인정할 만큼 성장했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면서 안타까워했다.

"국제대회 심사위원석에서 내 자리를 보고 우리 발레가 성장했음을 알았다. 언제부터인지 한 가운데 배정됐다. 발레 전문가들도 한국 발레를 인정한 것이다. 마린스키는 세계 최고다. 단원 90% 이상이 바가노바 출신이다. 그런데 한예종 학생들이 잇따라 입상하자 자존심을 구겼다며 속상해 했다."

김 교수는 2018년 한예종 K아트가 뉴욕시티 극장에 '인어공주'를 올렸을 때 일화를 들려줬다. "2500석이 넘는 객석을 꽉 채웠다. 당시 EU대사 부부 300여 명에게 초대권을 배부했는데 90% 이상 관람했다. 성공적인 문화 외교라는 찬사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김 교수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 콘텐츠로서 한국 발레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발레는 더 이상 특정계층 전유물이 아니다. 일반인들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문화 콘텐츠다"면서 발레 대중화를 강조했다. 보스턴발레단 미꼬 단장은 한예종 팬이다. 언젠가 한예종을 방문한 자리에서 미꼬 단장은 김 교수에게 "당신은 한 명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 인재를 데리고 있느냐"며 부러워했다고 한다.

그러면 한국 발레가 가야 할 길은 어디일까. 한상우씨가 겪은 일화에서 가늠해 볼 수 있다. 뉴욕 현지인 가정의 초청을 받았다. 즉흥적으로 발레를 선보였는데 누군가 다가와 "위안이 됐다"며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한씨는 "무대에서는 객석과 거리가 있어 감동을 느끼기 어렵다. 그런데 눈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누군가에게 위안이 될 수 있음에 감동했다." 한국 발레가 테크닉을 뛰어넘어 세계인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그 날을 기대해 본다.

태그:#한국 발레, #마린스키 김기민, #한예종 김선희, #문화외교 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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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문, 여행, 한일 근대사, 중남미, 중동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중남미를 여러차례 다녀왔고 관련 서적도 꾸준히 읽고 있습니다. 미국과 이스라엘 중심의 편향된 중동 문제에는 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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