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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색 초승달 모양의 취향교가 건청궁 앞에서 향원정을 향해 복원되어 있다. 2020년 8월 현재. 사진 우측 붉은 가건물 안에선 향원정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 복원된 취향교 하얀색 초승달 모양의 취향교가 건청궁 앞에서 향원정을 향해 복원되어 있다. 2020년 8월 현재. 사진 우측 붉은 가건물 안에선 향원정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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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향원지 취향교가 2020년에 복원되었다. 고종이 건청궁을 지으면서 만들었던 첫 모습을 올곧이 되찾았단 평가다. 둥글고 미끈한 나무기둥을 양쪽에서 안으로 오므려 빗각으로 세워 만든 새하얀 교각은, 구조적인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쌍을 이룬 교각을, 단출한 멍에목으로 결구시켰다. 3열 배열의 각 교각은 높이가 달라, 귀틀목이 자연스레 타원형이 되었다. 멍에목 위에 2단으로 된 타원형 귀틀목을 결구시키고, 홑겹의 통 널빤지를 깔아 상판을 완성하였다. 널빤지는 연한 갈색 나무 본연의 색깔이며, 상판 형태는 '아미(蛾眉)'를 형상화한 유려한 타원형이다.

상판 가장자리를 따라, 네모나무틀 안에 X자로 엇지른 흰색 나무난간을 연달아 이어 붙여, 전체적인 안정감을 더 하였다. 몸통 전체는 흰옷 입은 백성을 연상시키는, 초승달 모양의 하얀색 널다리다.

이 나라 비극을 쏙 빼닮은 경복궁과 건청궁
 
건청궁이 온전한 것으로 보아, 1909년 이전 모습으로 추정함. 건청궁 방향 취향교 끝단에 작은 출입문이 보이고, 취향교 교각의 수가 늘어난 모습을 볼 수 있다. 최초 취향교가 약간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향원정이 있는 섬 호안은 여전히 나무로 되어 있는 모습이 뚜렷이 보인다.
▲ 1909년 이전 취향교와 향원정 건청궁이 온전한 것으로 보아, 1909년 이전 모습으로 추정함. 건청궁 방향 취향교 끝단에 작은 출입문이 보이고, 취향교 교각의 수가 늘어난 모습을 볼 수 있다. 최초 취향교가 약간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향원정이 있는 섬 호안은 여전히 나무로 되어 있는 모습이 뚜렷이 보인다.
ⓒ 서울역사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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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은 조선왕조 정(법)궁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으로 천도(遷都)하면서 만들어진 궁궐이다. 1395년 완공 당시엔 그리 큰 규모가 아니었다. 외전 192칸, 내전 173칸, 기타 390칸으로 총 755칸의 아담한 규모였다. 약 200여 년 동안 전쟁 없는 평화로운 시대였다.

왜적(倭敵)이 침범한 1592년, 왕 선조는 궁궐과 도성, 백성을 버리고 북으로 도망치듯 피난을 떠난다. 참으로 비겁한 왕이다. 이에 실망하고 크게 화가 난 백성들이 경복궁에 불을 질러버렸다. 혹자는 왜군이 방화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경복궁 터는 이후 270여 년 동안 폐허로 방치되어 있었다.

어린 아들을 왕으로 내세운 흥선대원군은, 여러 개혁정치를 단행한다. 그중 가장 크게 신경 쓴 정책이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勢道政治)를 끝장내는 것이었다. 세도정치 세력을 대거 권좌와 정계에서 몰아낸다. 여기에 더하여 왕권강화와 권위를 확보하는 방편으로 경복궁 중건을 밀어붙인다.

돈이 부족했다. 직접 그린 난(蘭) 그림을 팔아 돈을 마련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가짜 난 그림이 시중에 나돌기까지 한다. 엉뚱한 화폐를 무리하게 발행하자 화폐 기제가 무너져 내린다. 경제는 수렁으로 빠져 들어간다. 백성들의 삶은 엉망이 되었다. 민심이 사나워졌다.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복궁은 1867년 총 7,225칸의 대규모 궁궐로 중건되었다.

흥선대원군 집권 10년이 훌쩍 지나간다. 고종이 성인이 된 것이다. 고종은 권력을 되찾아오고 싶었다. 아니 고종이 아니라, 민비가 그러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반 대원군파들을 규합하여 대표 주자로 면암 최익현을 내세운다.

최익현의 대원군 탄핵은 매서운 것이었다. 집권 명분이 미약했다. 성인이 된 국왕을 섭정(攝政)하려는 한계가 보였다. 무리하여 경복궁 중건을 밀어붙인 부담도 가중된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1873년에 실각하고 만다.

권력을 되찾아온 고종과 민비는 어리석고 아둔했으며 무능했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물러난 자리에 여흥 민씨들을 들여앉힌다. 새로운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나라는 다시 썩어 들어가기 시작한다. 결국 대원군이 그토록 막고 싶었던 외척집단의 발호였다. 서양열강과 일본은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고 있었다. 나라는 점점 힘을 잃어갔다.

고종은 권력을 되찾아온 기념으로 경복궁 안쪽 깊숙한 곳에 '건청궁'을 새로 짓는다. 아버지로부터 독립을 기념하는 상징이다. 내탕금을 사용한다. 여러 말들이 나돌고 문제가 생겨났다. 그래도 공사는 강행된다. 결국 이 전각에서, 그토록 권력을 탐했던 여인 민비가, 1895년 일본 낭인들 손에 죽임을 당한다. 1909년 일본인들 손에 건청궁마저 헐려 나간다.

일본이 조선을 강점(1910년 8월)하기 서너 달 전, 그들은 경복궁 전각 4,000여 칸을 헐어 민간에 팔아먹는다. 주로 요릿집과 기생집으로 변했고, 일본으로 건너간 전각도 부지기수라 알려져 있다.

1914년 7월엔, 일제통치 5주년을 기념하는 일명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할 공간을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광화문 뒤와 흥례문, 자선당(동궁) 일단의 전각을 모두 헐어내 버린다.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선다. 1917년 창덕궁에 불이 나자, 경복궁 수많은 전각들을 헐어내 이건(移建)시킨다. 건청궁과 이 궁궐의 모습이 이 나라 비극을 쏙 빼 닮았다.

고종이 건청궁을 지으면서 그 아래 남쪽에 연못을 팠다. 향원지(香遠池)다. 시기는 불명확하나 1867년에서 1873년 사이로 추정한다. 이 자리는 조카를 쫒아내고 죽이기까지 한 세조가 1456년 연못을 파 섬 안에 '비취빛 이슬'을 뜻하는 취로정(翠露亭)이란 정자를 지었던 곳이다.
  
초승달 모양의 새하얀 취향교가 향원지 위에 걸려 있다. 둥근 섬 호안은 나무를 사용한 흔적이 역력하다. 2개 한쌍 교각이 비스듬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난간은 네모틀 안에 나무를  X자로 엇지른 모습이 뚜렸하다. 19세기 말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종이 최초 가설한 취향교라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 취향교와 향원정(19세기 말) 초승달 모양의 새하얀 취향교가 향원지 위에 걸려 있다. 둥근 섬 호안은 나무를 사용한 흔적이 역력하다. 2개 한쌍 교각이 비스듬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난간은 네모틀 안에 나무를 X자로 엇지른 모습이 뚜렸하다. 19세기 말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종이 최초 가설한 취향교라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 문화재청(2017년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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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기억 속에만 간직하고 있어야 할지도 모르는 풍경이다. 경복궁을 알리는 수 많은 홍보물에 자료로 사용되었던 이 풍경은 이제 볼 수 없다.
▲ 남측 취향교와 향원정 이제는 기억 속에만 간직하고 있어야 할지도 모르는 풍경이다. 경복궁을 알리는 수 많은 홍보물에 자료로 사용되었던 이 풍경은 이제 볼 수 없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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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연못을 방형으로 파고 한 가운데 둥근 섬을 만든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는 우주를 바라보는 원리를 형상화했다. 둥근 섬 안에는 2층 멋들어진 목조 정자를 짓는다. 향원정(香遠亭)이다. 어떤 향기가 그리 멀리까지 나아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름만은 정말 멋들어진다.

건청궁 정문에서 계단을 내려와 향원정으로 향하는 자리에 널다리를 놓는다. 향원지 북측에 놓인 널다리는 길이 32m, 너비 1.65m라고 기록한다. 다리를 취향교(醉香橋)라 이름 하였다. 역시 어떤 향기에 취했는지는 의문이다. 권력이라는 달콤한 향기였을까? 아니면 나라와 백성을 살피지 못한 우매한 향기였을까?

조성 당시 향원지 방형 연못 호안(護岸)은 석축이었다. 섬 호안은 나무를 촘촘하게 박아, 뒤에서 밀려오는 토압(土壓)을 견디도록 축조했다. 몇 번의 개축을 통해 섬 호안도 지금은 석축이 되어 있다.

건청궁 쪽 취향교 교대는 연못 석축 위에 단을 높여 만들었다. 다리로 향하는 작은 출입문을 곁들였다. 섬 안 교대는 향원정으로 향하는 보도와 잇닿는 곳에 큰 돌을 각지게 다듬어 만들었다. 2017년 발굴 결과, 교각을 받치는 초석이 놓인 자리에서 적심이 발굴되었다. 땅을 파내고 그 자리에 잔돌을 쌓아올려 지반을 보강한 흔적이다.

정확한 년도는 불명확하나, 영국인 화가 아놀드라는 사람이 찍었다는 사진에서 옛 취향교 모습을 극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향원정 2층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에는, 11명 남녀 외국인과 조선인 수행원 2명의 모습도 같이 보인다. 멀리서 보면 유려한 곡선의 하얀색 널다리였다.

우리 역사와 운명을 같이 한 취향교

취향교 역시 굴곡진 우리 역사와 운명을 같이 했다. 나무다리 한계는 짧은 수명이다. 썩거나 부서지면 즉시 보수하거나 재가설해야 한다. 일제는 취향교를 여러 번 재가설한 것으로 보인다. 시기별 사진자료마다 각기 다른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반원형이 점차 낮아지기도 하고, 교각 모양이 바뀌기도 한다. 그런 고초를 견뎌내던 취향교가 한국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어 사라져 버렸다.
 
구체적인 년도는 불명확하나, 일제강점기 사진으로 추정된다. 유려한 타원형의 하얀색 널다리가 사라진 자리에, 거의 평면에 가까운 난간도 없는 다리가 들어서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향원정이 있는 섬 호안도 돌로 바뀌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일제강점기 취향교와 향원정 구체적인 년도는 불명확하나, 일제강점기 사진으로 추정된다. 유려한 타원형의 하얀색 널다리가 사라진 자리에, 거의 평면에 가까운 난간도 없는 다리가 들어서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향원정이 있는 섬 호안도 돌로 바뀌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서울역사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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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원지 남측 취향교는 1953년 본래 자리가 아닌 곳에 가설한 다리다. 이 널다리는 2020년 8월 현재 자취를 감추었다. 남측 취향교는 4각 돌기둥 교각에 잘 다듬은 멍엣돌로 결구시켰다. 약 3m 경간에 교각은 총 10열이었다. 멍엣돌 위에 귀틀목을 걸고, 길고 두꺼운 홑겹 널빤지를 깔아 상판을 만들었다. 난간은 동자목을 세워 난대목을 끼우고, 그 사이에는 틈이 없는 하엽 목판을 끼웠다. 다리는 궁궐에 어울리는 단청을 하고 있었다.

취향교가 복원되었으니 70여 년 동안 봐오던 향원정 모습이 바뀔 예정이다. 2020년 8월 현재 향원정은 보수 중이다. 널다리는 고종이 맨 처음 만들 당시와 같은 하얀 초승달 모습으로 원래 위치를 되찾았다. 시대와 세대가 바뀌었다. 복원된 취향교와, 보수되어 새로워질 향원정이 뿜어낼 맑고 아름다운 향기가 천 리를 넘어 만 리 까지 뻗어나가길 빌어본다.
 
3열의 키가 다른 비스듬한 교각과 간결한 멍에목, 유려한 타원형의 귀틀목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 옆에서 바라보면 새하얀 초승달을 보는 듯 하다. 상판 통 널빤지는 나무 본연의 색깔이며, 교대는 향원지 석축 위에 단을 높인 것이 관찰된다. 앙증맞은 출입문을 만들어 놓은 모습이 보인다.
▲ 복원된 취향교 근경 3열의 키가 다른 비스듬한 교각과 간결한 멍에목, 유려한 타원형의 귀틀목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 옆에서 바라보면 새하얀 초승달을 보는 듯 하다. 상판 통 널빤지는 나무 본연의 색깔이며, 교대는 향원지 석축 위에 단을 높인 것이 관찰된다. 앙증맞은 출입문을 만들어 놓은 모습이 보인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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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취향교, #향원정, #향원지, #경복궁, #널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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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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