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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누리 <월간 옥이네> 편집장
 박누리 <월간 옥이네> 편집장
ⓒ 이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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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초집중화 시대지만 모두가 서울로 향하는 것은 아니다.

<월간 옥이네>(아래 <옥이네>)는 20, 30대 청년들이 충북 옥천이라는 농촌에 모여 만드는 잡지다. 구성원 대부분 충북 청주, 경기 평택, 경남 양산 등 타지에서 왔다. 이들은 한번도 살아본 적 없는 옥천에 2017년 3월 사회적기업 '고래실(대표 이범석)'을 세워 지역에 필요한 문화 사업을 이것저것 만들어가고 있다.

같은 해 7월 탄생한 <옥이네>도 그중 하나다. <옥이네>는 옥천의 '비옥할 옥(沃)'을 따서 지은 이름으로, 옥천 사람들이 일궈온 역사와 삶을 매달 담아낸다. 청년이 떠나는 농촌에 다른 지역 청년들이 들어와 원하는 일을 찾고 만들어가는 셈이다. [관련기사 : '3년도 못 갈 것'이라던 농촌잡지의 생존비결]
     
박누리 편집장이 옥천에 온 건 그보다 훨씬 앞선 10년 전의 일이다. 경북 구미 출신인 그가 자라며 귀가 닳도록 들었던 말은 '잘 되려면 서울 가야지'였다. 어른, 또래 할 것 없이 '못해도 대구는 가야지' '놀아도 (대구) 동성로에서 놀아야지' 하고 채근했다. 그런 조언이 그에겐 구미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부정하는 말처럼 들렸다.

'왜 지역 사람들은 지역을 사랑하지 못할까.' '꼭 대도시에 가지 않아도 되는 삶이 어딘가엔 있지 않을까.' 그때부터 품기 시작한 막연한 고민은 그를 서울과 대구가 아닌, 낯선 옥천으로 향하게 했다. 2010년 지역언론인 <옥천신문> 취재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옥이네>로 무대를 옮겨 지금까지 이곳에 터를 잡고 지내는 중이다.

그와 동료들이 함께 일궈온 각종 사업은 이제 조금씩 성과를 내고 있다. 지난 7월 창간 3주년을 맞은 <옥이네>는 올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잡지협회의 '2020년 우수콘텐츠 잡지'로 선정돼 이름을 알렸고, 지자체 후원으로 진행하는 마을여행 기획과 교양 강좌도 지역민들의 참여가 꾸준히 늘고 있다. 고래실에서 운영하는 지역문화창작공간 카페 '둠벙'은 동네 사람들로 북적일 만큼 지역 '핫플'이 됐다.

지난 13일 옥천읍 카페 둠벙에서 박누리 편집장을 만났다. 점심 먹고 찾아간 둠벙은 학생과 성인들로 거의 만석이었다. 복층으로 짜인 좌식 공간에서 어린이들은 보드게임을 하거나 담요를 덮고 낮잠을 청했다. 도시의 여느 프랜차이즈 카페처럼 업무 미팅을 하거나 노트북을 펼치고 공부를 하는 사람도 보였다.

2020년 7월 기준 인구 5만768명, 청년(20~39세) 8442명, 충북 소멸위험지역 5곳 중 하나이지만, 그는 10년 동안 옥천에 살며 도시로 나가야 한다는 불안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오히려 지역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고, 배우고, 먹고 살 수 있어 행복하다며 밝게 웃었다.

"스타벅스는 없지만, 그보다 더 좋은 가치들이 있다"
 
그동안 발간된 <월간 옥이네>
 그동안 발간된 <월간 옥이네>
ⓒ 월간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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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 인구가 만 명도 안 되는 옥천에 어떻게 오게 됐나요?
"대학 다닐 때부터 막연하게 지역에서 살며 지역을 바꿀 수 있는 일을 해보면 좋겠다 싶었어요. 한편으로는 기자가 되고 싶다는 꿈도 있었고요. 제가 언론정보학과를 나왔는데, 어느 날 수업 중에 교수님이 <옥천신문>이라는 지역언론을 소개해주셨어요. 나한테 기회가 온다면 그곳의 기자가 되고 싶다 생각했어요. 타이밍이 잘 맞아서 4학년 2학기에 <옥천신문> 신입기자 채용 공고가 나서 지원했고 여기로 오게 됐어요. 운이 정말 좋았죠."

<옥천신문>은 옥천군민들이 출자해 만든 주간신문으로, 오로지 보도로만 승부해 광고 의존도가 낮고 유료구독률이 높아 성공적인 지역언론 모델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취재기자도 20, 30대가 대다수다. 그중 일부가 지역 문화 인프라를 발굴하고 농촌을 재생하고자 2017년 사회적기업 고래실로 독립해 나왔다. 박 편집장은 고래실 준비 단계에 참여했다가 2년 후인 2019년 8월 정식 합류했다.

- 왜 하필 잡지를 만들기로 했나요?
"전에 <옥천신문>에서 9년간 취재기자로 일하며 청소년과 청년을 만날 일이 많았는데, 10명 중 9명은 지역을 떠나고 싶어 했어요. '옥천이 고리타분하고 싫어서 무조건 나갈 거야.' '돈 벌려면 다른 데 가야지.' 이 지역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이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서 슬펐어요. 제가 지역에서 기자일 하면서 알게 된 옥천은 역사도 깊고 멋진 사람들도 많은 곳이거든요. 어리고 젊은 친구들은 잘 몰라요. 그런 이야기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어요. 그러니 '옥천은 별 볼 일 없어'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거죠."

옥천역에서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박 편집장이 가장 많이 한 이야기는 옥천 자랑이었다. 그가 참여하는 <옥이네>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해낸 인물 소개뿐만 아니라, 옥천에서 살고 싶게 만드는 지역민의 힘 있는 사연을 비중 있게 다룬다. 주민이 원하는 빵을 소량으로 만들어주는 베이커리 주인, 옥천을 사랑해서 지역 고유의 가락을 채록한 선생님 등이 잡지의 주인공이다.

그는 "스타벅스는 없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가치들이 이곳에 있다"고 믿었다. 옥천 사람들이 언젠가 이곳을 떠나더라도 사는 동안만큼은 지역에 호감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고래실 구성원들도 그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옥천의 매력을 대중적인 방법으로 알릴 수 있을까' 다 같이 고민하다 나온 사업이 마을여행 프로그램, 학생들이 와서 만화도 보고 보드게임도 하며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문화공간 둠벙, 그리고 <옥이네> 다. "떼돈은 벌지 못해도 우리가 원하는 곳에서 밥은 먹고 살지 않겠냐는 마음"이었다. 실제로 잡지와 여행·문화사업, 외주 작업까지 동시에 하면서 겨우 회사를 유지하고 있지만, 중요한 건 '계속' 할 수 있는 만큼의 수익과 보람이 있다는 점이다.

- 돈과 사람이 수도권으로 몰리는 시대인데요, 서울이나 대도시로 가지 않아서 불안하진 않나요?
"여기 오고 1년 정도 지나니까 친구들이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거냐고 물었어요. 옥천에서의 시간은 서울로 나가기 위한 발판이겠거니 하는 거예요. '그 정도면 경력 쌓았잖아, 서울 와야지.' 처음엔 그런 말 들으면 화가 났어요. 이곳에서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저는 믿었거든요. 그랬기 때문에 불안보다는 여기에서의 일을 얼마나 더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컸고, 걱정할 틈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지냈어요. 지금은 화는 안 나요. 단지 이런저런 삶도 있는 건데, 우리 사회가 다른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구나 하는 생각은 들어요."

"일자리 개수만큼 다양성도 중요"
 
사회적기업 고래실 직원들
 사회적기업 고래실 직원들
ⓒ 고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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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에서 일하며 좋다고 느낀 점은 무엇인가요?
"지역에서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게 즐거워요. 개인의 사연이자 사회적 가치를 지닌 이야기들을 직접 듣고 기록하는 게 재밌어요. 작지만 지역에서 의미 있는 일을 직접 일궈나가는 것에 대한 뿌듯함을 느끼기도 해요. 공교육 12년에 대학 교육까지 받았지만 지난 10년간 여기 와서 배운 게 훨씬 많아요. 사람과의 관계부터 시작해서, 잘 몰랐던 농업문제, 지역에 산다는 것에 대해서도요. 혼자였다면 아마 어려웠을 것 같은데 천만다행히도 괜찮은 언론사에서 좋은 동료를 만나는 시간이 제게 있었고, 덕분에 <옥이네>도 만들게 된 거죠."

- 반대로 지역에서 청년이 일하기 어려움 점도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재미있고 보람도 느끼니까 옥천에 계속 있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에요. 선택한 직업이 안 맞아서 또는 지역이란 공간이 기대와 달라서 떠나는 사람도 있어요. 지역이라고 해서 좋은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고 좋아하는 일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다들 도시로 나가는데 나는 여기 있어서 낙오한 것 같다는 불안 때문에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도 봤어요. 돈을 더 벌고 싶어서 다른 데로 가는 경우도 있고요."

- 그렇다면 지역에서 살기 원하는 청년들을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요?
"당장 필요한 건 일자리예요. 20, 30대 청년이 갈 만한 일자리가 지역사회에 그리 많지 않아요. 옥천에도 농공단지가 있는데 일단 일자리 수가 많지 않아요. 또한 지역에 있는 일자리가 다양하지 않다 보니 다른 지역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어요. 일자리의 개수뿐만 아니라 다양성도 중요한 것 같아요. 청년들이 선호하는 일이 두루두루 있어야 해요.

두 번째는 주거 문제예요. 타지에서 들어올 때 살 만한 집 찾기가 쉽지 않아요. 옥천에 원룸이 있지만 월세가 낮은 편이 아니어서 주거비용 때문에 부담을 갖는 경우도 있어요. 수도권만 아니라 작은 지역에도 청년들이 편하고 안전하고 저렴하게 살 수 있는 공간이나 제도적 지원이 필요해요."

- 일자리도 중요하지만 지역이 청년에게 살 만한 곳이어야 계속 머물 수 있을 것 같아요.
"장기적으로는 문화공간을 늘려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본적으로 젊은 사람들은 예쁜 카페에 가고 싶어 하고 영화도 큰 스크린으로 보길 원해요. 그런데 농촌같이 작은 지역엔 아예 없으니 싫다며 떠나는 거예요. 젊은 친구들이 지역에 오래 머무르려면 결국 여가를 향유할 수 있는 인프라가 있어야겠죠.

또 하나 제가 중요하다고 느끼는 건 지역 미디어의 역할이에요. 서울의 지명과 유행하는 트렌드는 잘 알아도 내가 사는 지역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미디어가 자꾸만 서울만 비추고 '중앙'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향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지역에서 일어나는 큰 사건조차 웬만해서는 서울 뉴스에 안 나오고, 공공이 함께 해결해야 할 지역 문제도 미디어에서 하나도 관심을 두지 않는 실태를 지역에 살며 느껴요. 최근 '내가 보는 TV나 신문에 우리 동네 수해 상황이 안 나온다'는 지역민의 하소연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고 봐요."

- 옥천은 지역 언론이 비교적 활발한 편이죠?
"옥천은 좀 달라요. 옥천에 물난리가 나면 주민들은 곧바로 <옥천신문>에 전화해요. 빨리 보도해 달라고요. 발로 뛰며 지역에 필요한 소식을 전하고 주민을 직접 만나며 쌓아온 건강한 언론 네트워크가 옥천에는 있어요. 그런 바탕이 있으니 저희가 <옥이네>도 만들고 문화 사업도 시도하며 이런저런 활동으로 넓혀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지역이 지속하려면 주민들이 지역을 잘 알아야 하고, 누군가는 지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계속 이야기해야 해요. 굳이 서울에 가지 않아도 돈도 벌고, 문화생활도 할 수 있고, 지역 소식도 계속 접하며 살 수 있는 거점이 많아진다면 그게 국토균형발전 아닐까요."

태그:#월간옥이네, #박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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