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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칭에서 개최된 독립운동 좌·우 진영 통합 실현한 제34차 임시의정원 회의 기념사진(1942년 10월)
 충칭에서 개최된 독립운동 좌·우 진영 통합 실현한 제34차 임시의정원 회의 기념사진(1942년 10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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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중반 중국은 두 진영의 패권쟁투 속에 일제가 욱일승천의 기세로 점령지를 넓혀나갔다. 중국 관내의 우리 독립운동 진영은 우파의 한국국민당과 좌파의 민족혁명당 세력으로 양분되어 대일 투쟁의 역량을 분산시키고 있었다.
 
임시정부가 머물고 있는 진강도 안전한 지역이 못되었다. 1937년 12월 14일 장사로 이동하였다. 2년간 머물던 진강을 떠나 다시 더 내륙 깊숙이 들어간 것이다.

이동시기 임시정부의 법무장과 한국국민당의 감사로 활동하던 이시영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정부의 체제를 확고히 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시영은 이미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제헌의회 의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이후 법무총장과 통합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을 맡으면서 의정 활동에는 손을 떼었다.
 
이시영이 다시 의원에 선출된 제29회 임시의정원은 1936년 11월 10일 가흥의 임시처소에서 열렸다. 이날 회의는 새로 선출된 의원의 자격 심사가 통과되기 전까지는 의장 송병조 외에 조완구ㆍ양묵ㆍ차리석ㆍ김붕준 등 5명의 의원으로 회의가 열렸다. 자격심사 결과 윤봉길의거 이후 임시정부를 떠나 있던 김구를 비롯하여 이시영ㆍ조성환ㆍ엄항섭ㆍ민병길ㆍ안공근ㆍ안경근ㆍ왕중랑ㆍ이동녕 등 9명의 의원이 함께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동시기 임시의정원은 10명도 되지 않는 의원으로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한국국민당 결성 이후 새로운 인원이 참여하면서 의정활동도 활기를 띠었다. 임시의정원은 이후 한국국민당에 의해 운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주석 4)

  
 북경 노구교 인근에 있는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마당에 있는 '지난날을 잊지 말자'(前事不忘)라는 표어. 치욕적인 과거를 애써 잊으려 하기보다는, 이를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자극제로 활용하는 것이 지혜로운 민족의 자세가 아닐까?
 북경 노구교 인근에 있는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마당에 있는 "지난날을 잊지 말자"(前事不忘)라는 표어. 치욕적인 과거를 애써 잊으려 하기보다는, 이를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자극제로 활용하는 것이 지혜로운 민족의 자세가 아닐까?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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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이 장사에서 임시정부의 일을 하고 있을 때, 1937년 7월 7일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1931년 9월 만주침략으로 사실상 전쟁상태였으나, 일본군이 베이징 교외 노구교에서 군사행동을 도발하면서 본격적인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선전포고도 없이 총공격을 개시하여 삽시간에 베이징ㆍ톈진에 이어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고, 30만 명이 넘는 무고한 시민을 난징에서 학살했으며 우한(武漢)ㆍ광둥(廣東)에 이르는 주요도시 대부분을 점령했다. 중국은 장개석이 공산당의 항일 민족통일전선결성의 호소를 받아들임으로써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독립운동가들에게 중일전쟁은 바라던 일이었다. 양국의 전면전으로 중국 정부는 항일전의 전위인 임시정부의 존재가 더욱 소중해졌다. 당연히 지원도 따랐다. 차츰 '원조'에서 '협조'의 태도로 바뀌었다. 전황은 일본군의 우세로 중국군은 계속 밀리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1938년 7월 17일 광주로, 다시 1938년 11월 30일 유주로, 1939년 5월 3일 기강으로 이동하였다. 중국군의 이동에 발맞춰 활동본거지를 옮긴 것이다. 그리고 1940년 9월 국민당정부의 수도인 충칭으로 이동하여 일제 패망 때까지 5년 2개월간 머물렀다.
 
이시영은 어느덧 70대의 고령에 이르렀지만 망명 이래 어느 때보다 활기차게 활동하였다.
 
생전에 조국광복의 날이 있을까 고심해 왔는데, 미구에 그런 날을 보게 될 것 같았다. 그이 뿐만 아니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이념과 정파를 떠나서 기대했던 상황변화에 따라 대동단결하여 일제와 결전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임시정부가 그 중심이 되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오랫동안 독립운동의 방략과 노선, 인맥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이 한 울타리로 모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중국관내에서 활동하는 정당의 통합이 요구되었으나 역시 난관이 많았다. 이런 시기에는 이시영과 같은 존재가 필요했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화합형이며 포용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당시 같은 계열의 3당인 국민당, 만주독립당, 만주조선혁명당 등이 셋으로 분리되어 이를 통합하는 문제는 그 이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수월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김구 주석과 홍진 의장이 며칠 동안이나 논쟁을 벌여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성재는 시 한 수를 그들에게 보내어 자신의 답답함을 토로하였다. 즉 "몇 사람 때문에 일에 지장이 생기는데, 너무 자기 고집만 피우지 말고 일이 되도록 하라"이다. (주석 5)

이시영은 3당통합을 이루는 중재자 역할을 충실히 하고, 마침내 항일민족주의전선이 결성되었다. 하지만 민족운동 진영의 통합은 이것이 첫 걸음일 뿐이었다. 보다 큰 목표는 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아나키스트, 좌파계열까지 모두 통합하는 과제가 남아 있었다.


주석
4> 이재호, 앞의 논문.
5> 『독립운동사』 제4권, 「임시정부사」, 681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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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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