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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전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왜적과 싸웠다. 살아서 다음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 퇴각하기도 하고, 때로 항전력 보존을 위해 전투를 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전투가 벌어지면 용맹하게 적을 물리쳤다. 주력부대의 성공적 퇴각을 위해 잔류해서 목숨을 바쳐 적의 진격을 막기도 하고 적에게 체포되지 않기 위해 마지막 탄환으로 자결하기도 했다.

하지만 살아서 다음 전투를 전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곧 불가피하게 적에게 체포되기도 했다. 피체는 독립군의 단위 전투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전투의 시작이었다.

또다른 전투

독립군이 만주와 국내 전투에서 일제 군경에게 체포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전투가 시작되면 적에게 타격을 주고 성공적으로 퇴각하거나 전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1920년대 전반기까지 국내 신문은 독립군의 국내 진입 작전을 거의 매일 보도했는데 대부분 일경의 포위망을 뚫고 퇴각하거나 전사했다고 나온다. 전투 중 피체된 경우는 적었다.

독립군이 피체될 때는 만주에서 비무장 상태로 중국 군경의 공격을 받았던 경우가 많다. 또 국내일지라도 정규 의용군이 아닌 모 연대의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인 경우가 많았다. 중국 군경이 일제의 사주를 받고 독립군을 체포했지만, 만주라는 지역 특성상 중국 군경을 왜적과 같이 적대적 관계에 둘 수만은 없었기 때문에 만주에서 종종 피체됐다.

중국 관헌은 이중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론 일제의 돈을 받고 독립군을 체포해 일경에게 건넸고(돈을 목적으로 한 경우 중국관헌이 독립군을 총살하지는 않았다), 다른 한편으론 독립군 지원을 받으면서, 즉 독립군을 알면서도 체포하지 않거나 일제 군경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기도 했다.(주1)

일제 총영사관 사주를 받은 중국군은 대한독립단 김창곤 일대(一隊)를 체포하여 일제경찰에 인도했다. 독립군을 일경이 인도받으면 재판도 없이 밤중에 끌고나가 총살해서 압록강에 던지는 예가 많았다(한철수, <나의 길>). 김창곤 일대는 밤에 강변까지 끌려갔다가 다시 감옥에 구치(拘置)돼 생명을 보존했다. 그리고 기나긴 심문·옥중 투쟁의 길에 들어섰다.
 
경성감옥 9옥사(지금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독립군을 포함하여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 투옥되어 온갖 고초를 겪었고 옥중 투쟁도 전개했다.
▲ 경성감옥 9옥사(지금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독립군을 포함하여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 투옥되어 온갖 고초를 겪었고 옥중 투쟁도 전개했다.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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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김혁 등 간부 11명은 회의 중에 일경 30여 명과 중국경찰 100여 명의 습격을 받고 피체됐다. 신민부 무장대오인 보안대는 다른 곳에 출장 중이었고 함께 있던 간부들은 비무장이었다. 앞서 체포됐던 신민부원를 통해 신민부 근거지 상황이 드러났고 일경은 기회를 엿보다가 신민부 무장대의 경호가 없을 때 공격했다. 간부들은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결국 피체됐다(<동아일보> 1928.3.22. 이하 출처 인용에선 날짜만 적는다).

백서농장 장주, 서로군정서 참모장을 역임한 김동삼은 1931년 10월 하얼빈 동지 집에 머물다가 밀정의 밀고로 일경에게 피체됐다. 비무장 상태였다. 김동삼은 피체된 날부터 단식했다. 일경의 취조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옥중투쟁에 들어갔다. 정의부 군사위원장이던 오동진도 밀정의 밀고에 비무장상태로 일경에게 피체됐다.

참의부 1중대 소대장 김창균은 1926년 위원군에 진입하다 일경에게 피체됐다. 그는 1924년 참의부의 사이토(齋藤) 총독 공격작전에 참전했으며, 화창면 일경 주재소를 공격하기도 했다. 피체될 당시에 농민으로 변장하고 고향의 형을 만나러 가던 길이었다. 잡힐 때 일경이 참의부 군인임을 몰랐는데, 근처의 참의부 변절자 최치삼(崔致三)이 알려주어 피체됐다(1926.9.7.).

군정서에 가담했던 선규환은 1922년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으다 피체됐다. 1927년 출감한 뒤에 다시 군자금을 모집하러 평양에 잠입했다가 또 피체된다. 의용군은 아니고 군자금을 모집하면서 국내에서 독립군을 지원하는 조직 활동을 했다(1928.4.23.; '판결 대정 11년 형상 제139호').

군비단 간부 이승(이민환, 일명 이홍파)은 군자금을 모집하고 지단을 조직하기 위해 국내에 진입했다가 동지들과 함께 피체됐다. 밀정의 밀고 때문이었다(<백절불굴하던 전우 이홍파의 회상담>). 이승은 군비단 무장대원이 아니고, 군사 활동을 지원하는 간부였다.

많은 사례는 아니지만 위에서 보았듯 피체된 독립군은 주로 비무장 상태이거나 비전투요원이었다. 중국 군경과의 무력충돌을 피하기 위해 피체되는 경우도 있었다.

붙잡힌 독립군들은 주로 비무장 상태였다 

지휘관이건 일반 병사건 피체는 무장대오의 중대한 손실이고 특히 대규모로 피체될 때 타격이 컸다.

이를테면 1932년 1월 19일 조선혁명당·군 간부회의 때 일경과 중국보안대가 습격해서 이호원·김보안·김관웅·이종건·박치화·이규성·장세용·차용륙·전운학·이동산·서세명 등 지휘관이 피체됐다. 조선혁명군 항일전에 큰 충격을 준 이른바 신빈 사건이다. "만주 독립운동사상 심장을 잘린 치명타를 입었다"는 회고(계기화, <삼부·국민부·조선혁명군의 독립운동 회고>)가 있을 정도였다. 그 뒤 양세봉, 고이허 등 노력으로 대오를 정비해 항전을 지속했지만 신빈 사건은 항전력에 큰 손실을 가져왔다.

중요한 지휘관 회의가 어떻게 일제 주구에게 노출됐으며 왜 무장경호대는 없었는지 의문이 남는다. 습격에 대한 방어 전투, 또는 전사에 대한 기록이 없다. 무장 경호대가 없고 지휘관들도 비무장이었던 탓이다. 회의 장소를 밀정에게 노출시키지 않으려 무장 경호 없이 회의했을 가능성도 있다. 장세용, 박치화, 김보안, 전운학은 감옥에서 순국했고 이호원, 이규성, 차용륙은 살아서 출옥했지만 다시 항일전에 나서지 못했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조선혁명군 항전은 더 강화됐을 것이다.

피체된 동지를 구출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1929년에 중국 관헌이 조선혁명군 4명을 체포하여 일경에게 넘겼다. 정보를 파악한 조선혁명군은 호송대열이 지나가는 지점에서 매복 공격하여 동지를 구출했다(1929.10.2.). 정의부 군사위원장 오동진이 피체되자 장기선 등 부하가 세 차례에 걸쳐 구출 활동을 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천마산대는 희천군 창참주재소를 공격해서 천마산대 군인 임성률을 구출하고 일경을 사살했다(1924.6.9.).

독립군들, 일본 경찰의 고문을 이겨내다

독립군은 피체되면 곧 새로운 전투를 시작했다. 몸은 자유롭지 못하고 무기도 없지만 말과 행동으로 항전을 지속했다. 피체는 전투의 끝이 아니라 새 전투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김동삼은 피체와 동시에 단식을 시작해 며칠 동안 지속했다. 취조에도 말을 하지 않았다. 고문이 계속됐다. 1931년 10월 22일 기사에는 '원기가 왕성'하다고 했는데 불과 사흘 뒤의 기사(1931.10.25.)에는 '신음 중에 있다'고 했다. 사흘 동안의 고문에도 그는 말을 하지 않았다. 가혹한 고문에도 취조에 응하지 않는 투쟁이었다. 김동삼을 체포해서 가혹하게 고문한 주구는 하얼빈 고등계 형사 양영환(梁永煥)이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1949.4.2.).

단식은 옥중 투쟁의 시작이었다. 허로(許鷺. 주2)는 1922년에 독립군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에 들어왔다가 피체됐다. 일경의 취조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백이숙제의 고사를 들어 "회복하려던 사직도 회복치 못하였으며 오늘날 너희에게 잡혔은즉 어찌 너희가 주는 음식을 먹으랴"고 외치고 단식하였다. 결국 동대문경찰서는 허로를 본적지인 대구로 보냈다(1922.8.8.). 단식투쟁의 승리였다.

1920년 광복군사령부 특파원 안해용은 입대할 청년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왔다가 일경에 피체됐다. 그는 압송 도중에 성주 읍내, 칠곡군 왜관 도선장 등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판결 대정 12년 형공 제12호'). 국내 동포들에게 독립만세를 외쳐 항전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렸다.

신문·취조 과정에서는 잔혹한 고문이 자행되었다. 군비단 이승의 경우, 밤에 자고 있는 이승을 끌어내어 일경 4명이 몽둥이로 난타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4명이 더 가세하여 정신을 잃을 때까지 때렸다. 이튿날 잠시 깨었다가 다시 혼절해서 6일 뒤에나 정신을 차릴 정도였다. 그는 눈을 뜨지 못하고 몸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고문을 당했다(<백절불굴하던 전우 이홍파의 회상담>).

대한독립단 이정서는 옥상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를 공격하고 일경에게 중상을 입혔다. 동지들과 함께 피체됐다. 곤봉으로 난타당하고 거꾸로 매달려 입과 코에 물과 술을 부어넣는 고문을 당해 4-5차례나 기절했다. 4-5일을 견디다가 잔혹한 고문 때문에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판결 대정 10년 형상 제88~91호'). 그는 추후 사형당해 순국했다.
  
일제경찰의 농민 고문 기사(동아 24.5.4) 일제경찰은 독립군과 관련 없는 순박한 농민들을 고문하고 그들의 집을 불태워 살곳도 없애버렸다.
▲ 일제경찰의 농민 고문 기사(동아 24.5.4) 일제경찰은 독립군과 관련 없는 순박한 농민들을 고문하고 그들의 집을 불태워 살곳도 없애버렸다.
ⓒ 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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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들에 대한 참혹한 고문... 맨살 태우고 손톱 아래 대바늘을 꽂았다

항일운동, 특히 무장항일운동과 관련된 일경의 고문은 상상을 초월했다. 사람으로서 견디기 힘든 참혹한 고문이었다. 고문은 일경이 조작한 사실도 인정하게 만들었다. 1924년 17명의 천마산대 대원은 창참주재소를 공격해서 동지를 구출했다. 일경은 그 화를 무고한 동포주민들에게 돌려 50-60명을 체포해 취조했다. 독립군이 주재소를 공격할 때 그 길을 안내하고 일경의 동정을 알려주었다는 핑계였다. 28명이 재판을 받고 4명이 결국 실형을 선고받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비인간적 고문을 11일 동안 당했다. 고문 끝에 다수가 손과 팔,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

일본 측은 부젓가락(火箸)으로 맨살을 태우고 불침(火針), 대나무침(竹針)을 맨몸에 놓았다(1924.2.21., 5.4.). 그러나 이들은 실제 천마산대와 연관 없는 무고한 농민들이었다. 사람이 견딜 수 없는 잔혹한 고문에 거짓 자백을 하고, 고문에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조서에 도장을 찍었다. 재판에서 고문 흔적을 보자 그 참혹함에 "법관도 얼굴을 찡그렸다"고 한다. 무고한 농민들은 재판 도중 깊은 원한이 폭발해 대성통곡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고문 속에서도 고문을 이겨내고 다시 항전에 나서려는 독립군도 있었다. 신문 투쟁의 일환으로 고문에 대처했다. 광복군사령부의 한철수 등은 피체 뒤 20여 일 동안 매일 온갖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의 회고(<나의 길>)는 자세하다.
 
철갑은 계속 채운 채, 고문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다. 소위 십자가 형틀에 두 손을 십자가 상단에 뒤로 제쳐 걸게 하고 전신을 바싹 끌어 당겨 두 발목을 하단에 결박한 다음 중간의 무릎을 역시 형틀에 잡아맨 뒤 곤봉으로 정강마루를 강타하는데 골절은 되지 않으나 피부는 온통 파열되는 지경이었다. 그리고 물초롱만한 수관(水鑵: 물두레박)으로 여러 통의 물을 계속 코와 입에 붓는데 숨이 막혀 기절을 하니까 정신을 잃어 고통의 감각조차 모르게 되니 도리어 편안한 편이다.

나는 이러한 악형으로 10여 차례나 기절하였다. 그밖에 수갑을 뒤로 손에 잠근 채 양팔을 포승으로 뒤로 결박한 후 상공에 높이 달고 옷을 벗겨 벌거숭이를 만들어 놓고 세 사람이 번갈아 종일 때리니 요부(腰部: 허리) 이하는 전체가 출혈하여 피투성이가 되어, 풀어 놓아도 앉을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어떤 때는 수갑을 채운 채 광장에 내다놓고 10여명이 둘러서서 마치 뽈을 치듯 하니 동에서 치면 서로 남에서 치면 북으로 밀리는 뽈치기 고문으로 반사지경에 이르게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수족을 천정에 달아 놓은 채 두기도 하며, 혹은 손가락에 참대를 끼워 좌우로 제치기도 하고 손톱에 참대바늘을 꽂기도 하는 등 가짓수를 일일이 들기 어렵다.
 
형틀에 묶고 몽둥이로 정강이 강타, 기절할 정도의 물고문, 공중에 매달아 때리기, 손톱 밑에 대나무바늘 꽂기 등 악형을 20여 일 동안 자행한 것이다. 그럼에도 한철수는 자신의 활동 사실을 자백하지 않았다. 자백해 사형 당하나 악형으로 죽으나 같다고 생각하고 악형을 택했다. 그는 사형을 면했다. 신문투쟁 일환으로 활동 사실을 줄여 다시 운동에 나서기 위함이었다. 한철수만이 아니다. 당시 피체된 운동가들은 발각되지 않은 사건은 모두 부인해 빨리 출옥, 다시 항전한다는 자세였다.

'무장독립단'으로 피체된 최준국 또한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범죄 사실'을 자백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죽는 날까지 어떠한 고통이라도 조선독립을 위하여서는 절대로 사양치 아니할 터이오. 최후까지 마음을 변치 아니 한다"는 말만 했다(1922.6.16.). 그는 대한청년단에 가입해 군자금을 모집했는데, 소속 단체나 활동 사실에 대해 어떤 자백도 하지 않았다.

고문으로 실제 순국에 이른 경우도 적지 않다. 통의부 의용군 유석정은 밀정인 봉천보민회 회장 대리를 토벌하려다가 일경에게 발각되어 피체됐다. 악독한 고문을 당하고 순국했다(1924.3.14.). 취조과정에서 건강 악화로 가출옥한 뒤 사망한 경우도 사실상 고문에 따른 순국이었다.

신문투쟁을 끝낸 독립군은 재판투쟁에 들어갔다. 이들은 당당한 태도로 왜적의 법을 인정하지 않음을 말하고 독립 의지를 강하게 밝혔다. 군자금을 모집하다 피체된 선규환은 징역 10년이 언도되자 분노하며 "징역을 얼마든지 시켜라. 그러나 나는 그대들의 법률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외쳤다(1928.7.1.).

광복군 사령부 김창곤은 사형이 선고되자 태연한 얼굴로 방청석을 향해 "나는 누구의 죄로 죽게 되느냐"고 말하다가 간수에게 끌려갔다(1922.4.17.).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나라를 왜적에게 강탈당한 겨레 모두의 죄 때문에 죽는 사실을 밝히며 독립투쟁 의지를 천명했던 것이다. 

대한독립단 사한장(司翰長) 김기한은 징역 8년의 판결 후에 강도 일본에게서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며 다음과 같이 외쳤다(1921.12.10.).
 
개인이 남의 것을 훔쳐 가면 강도질이라 하여 죄를 주거늘, 삼천리강산을 빼앗아간 일본인에게 대하여 우리가 잃은 것을 찾고자 하는 것이 무슨 죄이기로 팔년 징역에 처하였으며 팔년 징역은 고사하고 팔십년 징역이라도 시키면 하기는 하겠지마는 내 뜻으로는 불복하나니 삼군의 장수는 빼앗을지언정 필부의 뜻은 빼앗지 못한다.
 
참의부 소대장 김창균은 "사형을 당하거나 와석종신을 하거나 죽기는 일반이라 결국은 시간문제에 불과하다"고 태연하게 말했다. 또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것만으로 사형을 준다면 사양할 바도 아니다"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1928.9.27.). 무장투쟁에 군인으로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였으니 죽음 앞에서도 태연했던 것이다. 그는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 중 옥사 순국했다.

1930년 함경남도에 진입해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경을 토벌하던 국민부 의용군 최효일 등 10명은 판결 전 연설을 하고 만세를 외쳤다. 곧 방청석을 향하여 조국 독립을 위한 '일장연설'을 하고 피체된 결사대 모두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경이 극력 제지하였으나 결사대원들은 계속 만세를 불렀다(1931.10.22.) 국민부 특무 제1대장 최효일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당해 순국했다. 박차석은 10년형을 언도받았으나 변절해서 왜적의 주구가 됐다.

벽창의용단 단장 양승우는 사형을 언도 받자, 자신은 죽어도 상관없지만 "사건을 명백히 해 두지 않으면 이후에 자기 부하가 또 체포돼 비명횡사할는지 알 수 없으니 잘 처리하라"고 재판장을 압박했다(1925.9.17.). 그는 자신의 죽음은 두려워하지 않고 부하를 구하려는 독립군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상 여러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신문투쟁에서 고문을 이겨낸 독립군은 재판에서도 항일투쟁의 뜻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 싸웠다. 일제가 만든 법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일제가 나라를 빼앗은 강도임을 밝히면서 독립만세를 높이 외쳤다.

(주)
1)<국경에서 어든 雜同散異>, <<개벽>> 제38호, 1923년 8월 1일, 100쪽.
2)의병장 허위의 동생으로 고령에도 남북만주를 다니며 독립군 조직을 위해 활동했다.

덧붙이는 글 | '새로 쓰는 독립군사'는 주중에 연재합니다. 다음 이야기는 '독립군의 피체와 옥중 투쟁, 그리고 순국 2'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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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독립군가' 1절. 지은책 -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일제강점기 겨레의 노래사), '황국신민'의 시대, '책'의 운명(조선-일제강점기 금서의 사회사상사), '책'-사슬에서 풀리다(해방기 책의 문화사), 고서점의 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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