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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수많은 열등감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중 많은 것들은 포기할 수 있을 만큼 시간이 지났지만,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유학파 동료들 앞에서 주눅 드는 것은 아직도 쉽게 벗어날 수 없어요. '영어의 유창함'이라는 언어적인 능력은 자연스럽게 우월함의 증거처럼 느껴졌고,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으로 옮겨졌어요.

그런데, 이런 열등감을 단번에 깨어버릴 책을 발견하였기에 통쾌한 심정으로 읽어내려갔습니다. 얼마 전까지 동네 책방에서 친구들과 같이 읽었던 <배드 블러드>입니다. 이 책은 2002년부터 2016년까지 14년 동안 실리콘 밸리의 촉망받는 유니콘 기업으로 여겨졌던 '테라노스'의 사기행각을 담아낸 탐사보도의 결과물인데요, 미국 선진 기술의 산실이라는 실리콘 밸리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배드 블러드' - 테라노스의 비밀과 거짓말 책표지
 "배드 블러드" - 테라노스의 비밀과 거짓말 책표지
ⓒ 와이즈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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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스탠퍼드 대학교의 학생이었던 열여덟 살의 엘리자베스 홈스로부터 시작됩니다. 바늘을 무서워하는 소녀였던 엘리자베스는 당시 주목받았던 '미세전자기계시스템(MEMS: Micro-Electro-Mechanical-System)' 기술을 적용하여, 손끝에서 채취한 한 방울의 피로 100개가 넘는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냅니다.

그녀는 이 아이디어를 특허로 출원하고,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와 같은 실리콘 밸리의 전설을 따라, 학교를 중퇴하고 '테라노스'를 창업합니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너무나 황당한 제안이었지만, 그녀는 아이디어를 정리한 26페이지의 발표 자료만으로 실리콘 밸리의 투자자들로부터 성공적으로 투자를 유치해내죠.

이렇게 '테라노스'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후로 그녀는 14년 동안, 아무런 기술적인 증거를 보여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투자를 유치했고 회사를 키워나갔어요. 월스트리트 저널의 탐사전문 기자인 존 캐리루가 그녀의 비밀을 세상에 드러내기 직전, 테라노스의 가치는 10조에 달했다고 합니다. 물론, 세상에 비밀이 드러난 직후, 바로 휴지조각이 되었지만 말이에요.

오랫동안 미국이 선진국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코로나19에 대처하는 2020년의 미국을 보면 도저히 믿어지지 않지만, 제가 성장하던 시간 동안 가장 강한 나라는 미국이었으니까요. 대학에서 나를 가르쳤던 교수들 대부분도 미국의 교육을 받았고, 수많은 대한민국의 일터에서 전력을 다해 끌어들이려던 인재라는 사람들도 거의 미국의 유명한 학교를 졸업한 사람이었으니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 '미국'을 조선의 중국처럼 당연하게 '모셔야 하는' 나라로 여겼는지도 모르겠고요. 솔직히, 그랬어요. 부끄럽지만, 사대주의죠. 그런데, 그런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은, 실제로 미국인들과 같이 일을 하고 미국에 다니면서부터 였나 봐요. 

일 때문에 찾았던 미국 '유수'의 대학교에서 저는 인종차별의 욕설을 들어야 했고, 미혼의 여자가 미국에 들어간다는 것만으로도 입국장에서 한참을 까다롭게 대답해야 했어요. 한 번은 특별한 이유도 듣지 못한 채 30분도 넘게 입국 심사장에 잡혀있기도 했답니다. 저는 미국을 알면 알수록, 점점 더 의심스러웠어요.

<배드 블러드>가 지적하는 미국의 가장 큰 문제는 '배경'이라는 포장만으로도, 진실이 쉽게 힘을 잃는다는 것이었어요. 엘리자베스에겐 든든한 가족의 배경이 있었고, 스탠퍼드 대학교라는 그들마저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학교의 간판이 있었어요. 게다가 그녀는 금발의 백인 여성이라는 인종적인 우월성도 갖고 있었고요.

이런 그녀의 배경과 사회적인 호감을 갖게 한 외모는, 전통적인 기득권을 가졌던 실리콘 밸리의 사업가들을 설득시켰고, 그녀는 전략적으로 실리콘 밸리의 권력자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죠.

책에서 등장하는 실력자들은 전직 국무장관이었던 조지 슐츠나 미군의 주요인물이었던 제임스 매티스를 비롯하여, 헨리 키신저와 같은 미국의 상징 같은 인물들이었어요. 게다가 그녀는 비밀을 덮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무기로 당시 미국에서 가장 힘이 있던 변호사를 선택했지요.

엘리자베스의 전략은 실수 없이 먹혀들었고, 10년 동안 이어졌던 오바마 정부에서도 그녀는 실리콘 밸리에서 엄청난 성공의 아이콘이었어요. 이 모든 일이 '어떠한 실체적인 성과' 없이도 가능한 일이라니, 믿어지지 않았지만 사실이었죠. 그녀는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속여넘기기 직전이었어요.

결국, 거의 성공 직전이었던 '테라노스'의 거짓말을 세상에 드러낸 것은, 의심을 제대로 파고들어 2년 넘게 취재했던 '언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더 놀라운 것은 이 모든 탐사 취재를 한 '월스트리트 저널'의 소유주인 루퍼트 머독이 테라노스의 거액 투자자였음에도, 머독은 그들이 진실을 말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는 거죠.

대한민국에서 언론사 사주의 이해관계가 얽힌 기사가 해당 언론사를 통해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한 상상을 하다 보니, 결국 이렇게나 엉망인 미국을 지탱하는 것은 그들이 끝내 지키고자 하는 '헌법의 약속(언론의 자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언론의 기능은, 이젠 많은 부분 미국을 넘어섰다 여겨지는 2020년의 대한민국에서 가장 부러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만약 월스트리트저널이 의심을 파고들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그들의 거짓말에 세계 의료의 미래를 맡기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자기들이 진단키트도 치료제도 만들 수 있다면서 허풍을 치고 있지 않았을까요? 테라노스는 그동안 사스도 신종플루도 진단하겠다면서, 전 세계를 속였었거든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찔해요.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여전히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완전히 벗어내지는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씌워놓은 안경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았으니, 나만의 눈으로 온전히 바라보기까지는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모양입니다. 그래도, <배드 블러드>를 통해 바라본 민낯이 여실히 현실이 되는 2020년의 미국을 보다 보면, 조금은 일찍 정신을 차릴 수도 있겠다는 자신이 생겼어요.

혹시라도, 미국의 문제를 제대로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싶다면, <화씨 911>, <볼링 포 콜럼바인>, <다음 침공은 어디> 같은 마이클 무어 감독의 작품들을 추천해요. 막무가내의 '국뽕'에 취해있는 것도 문제가 있겠지만, 현실을 우리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계속 연습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선, 저부터 영어 열등감에서 벗어나야겠지만요.  

책 정보: <배드 블러드> 존 캐리루 지음/박아린 옮김, 와이즈베리

배드 블러드 - 테라노스의 비밀과 거짓말

존 캐리루 (지은이), 박아린 (옮긴이), 와이즈베리(2019)


태그:#오늘날의 책읽기, #배드 블러드, #테라노스, #엘리자베스 홈스, #월스트리트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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