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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진달래꽃>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진달래꽃>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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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8월 6일 김소월이 태어났다. 김소월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 정서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시인으로 이름이 높다. 〈진달래꽃〉, 〈산유화〉, 〈금잔디〉, 〈초혼〉,  〈왕십리〉, 〈못 잊어〉, 〈엄마야 누나야〉 등은 그가 남긴 시 중에서도 특별히 우리나라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절창이다. 〈엄마야 누나야〉를 읽어본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김소월이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라고 노래한 때는 1922년이다. 소월은 어린 사내아이의 목소리로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이 있고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가 있는 강변에서 살자고 했다. 시의 길이가 짧은 것은 내용과 형식 두 측면에서 모두 동요 형태를 지니고 있는 까닭이다.

뜰에는 금모래, 뒷문 밖에는 갈잎

이 노래를 부르면 까닭 없이 애잔한 슬픔이 밀려온다. 현대인들은 첨단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풍요의 극치를 누리며 살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뜰에 반짝이는 금모래가 있고 뒷문 밖에 갈잎의 노래가 있는 곳에서 살게 될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 노래를 부르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간구하는 것만 같아 저절로 눈가에 슬픔이 고이는 것이다.

심지어 현대인의 대부분에게는 와유(臥遊)를 즐길 만한 여유조차 없다. 와유는 누워서 노닌다는 뜻으로, 한양에 사는 조선 시대 고관대작들이 방 안에 산수화를 걸어놓고 자연회귀의 꿈을 스스로 위무한 것을 가리킨다. 

그들은 벼슬을 그만두면 돌아갈 고향에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광활한 농토를 소유하고 있었고, 별서(別墅, 별장)도 있었다. 그러나 현대 도시인의 대부분은 소형 아파트에 갇힌 채로 살아가고 있다. 거실 벽에 시원한 그림 한 점 걸지 못하는 형편의 각박한 삶에 짓눌려 있는 처지다.

남의 노예로 살았으니 일제 때는 더 곤궁했다

당연히 소월이 살았던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더욱 삶이 팍팍했다. 철없는 소년은 엄마와 누나에게 뜰에는 금모래가 반짝이고, 뒷문 밖에는 갈잎이 노래를 부르는 전원으로 가서 살자고 조르지만, 애당초 이룰 수 있는 꿈이 아니다. 필자가 여기서 '조른다'고 표현하는 것은 시의 첫 행과 마지막 행이 한결같이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인 데에 주목한 결과다.

주권을 강탈당한 노예 신세였으니 일제 강점기 때 우리 민족이 겪은 곤궁함은 재삼 되짚어 볼 필요도 없다. 소월이 〈엄마야 누나야〉에 아버지를 등장시키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언제 집에 누워 쉴 겨를이 있었을까? 어떻게든 한 푼 두 푼 벌어야 가족이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

아래는 1925년에 발표된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이다.

나는 꿈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
벌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 손에
새라 새로운 탄식을 얻으면서.

동이랴, 남북이랴,
내 몸은 떠가나니, 볼지어다.
희망의 반짝임은, 별빛의 아득임은,
물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 다리에.

그러나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자칫 가느른 길이 이어 가라. 나는 나아가리라
한 걸음, 또 한 걸음, 보이는 산비탈엔
온 새벽 동무들,
저 저 혼자······ 산경(山耕)을 김매는.


농기구(보습)를 써서 해마다 붙박이로 농사를 지을 땅이 없는 까닭에 들판(벌가)에서 해가 질 때까지 농사일을 하다가 석양 무렵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꿈인 우리 겨레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김소월이라면 온통 결이 고운 서정시만 쓴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는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같은 사회성 짙은 시도 썼다. 그래서 김소월은 더욱 위대한 시인이다.  

8월 6일은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날

1910년 한반도를 강점한 일본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죽이고, 인권을 짓밟고, 재산을 빼앗았다. 남의 나라 국토를 점령하고 그곳 주민들을 수탈하여 자국의 풍요를 도모하는 제국주의 국가였으니 그들로서는 당연한 행위였다. 우리 민족은 그들의 강박 아래서 목숨을 잃었고, 고통을 받았고, 곤궁하게 살았다.

민족의 한을 노래한 김소월이 현실 사회의 진면목을 알지 못할 리도 없고, 외면할 수도 없다.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같은 시는 소월의 그러한 현실인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러나 소월은 일본의 항복을 보지 못하고 서른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귀천한 날은 1934년 12월 24일이다.

김소월이 요절하지 않고 살아 있었으면 1945년 8월 6일 자신의 43회째 생일날에 히로시마 원폭 투하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왕족 중 가장 두드러지게 반일 감정을 드러낸 인물로 알려진 이우(李鍝, 고종의 손자)가 원폭 피해로 8월 7일 사망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에는 원폭 피해로 히로시마에서 20만 명이 죽었으며, 그 중 3만 명이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비보도 접했을 것이다.

소월이 오래 살았으면 틀림없이 세계 평화를 기원하고, 전쟁 없는 지구를 염원한 명작을 남겼을 것이다. 그가 태어난 날을 맞으며, 아직도 좋은 세상이 오지 않아 여전히 〈엄마야 누나야〉가 슬프게 느껴지는 애잔함을 혼자서 토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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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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