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인종차별 공격과 "미국이 싫으면 떠나라"는 비판 대상이 된 민주당 유색 여성 하원의원 4명이 15일(현지시간) 의회의사당에서 기자회견하고 있다. 왼쪽 부터 과시다 틀라입(미시간주), 일한 오마(미네소타주),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뉴욕주)와 아이아나 프레슬리(매사추세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인종차별 공격과 "미국이 싫으면 떠나라"는 비판 대상이 된 민주당 유색 여성 하원의원 4명이 지난 2019년 의회의사당에서 기자회견하고 있다. 왼쪽 부터 과시다 틀라입(미시간주), 일한 오마(미네소타주),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뉴욕주)와 아이아나 프레슬리(매사추세츠). ⓒ 연합뉴스


만 30세 유색인종 여성의 명연설에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지난 7월 23일 미 민주당 하원(뉴욕주)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의 의회 연설 장면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급속도로 퍼졌다.
 
"저는 힘 있는 남자가 여성에게 다가가 위협적인 말을 한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보여주신 요호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딸을 가진 남성이면서도 아무런 후회 없이 여성에게 위협을 할 수 있고, 아내가 있는 남자도 여성에게 위협적인 말을 할 수 있고, 사람들에게 보이는 사진 속에서는 가정이 있는 따뜻한 남자로 비치는 사람이 아무런 후회도 없고, 책임도 지지 않은 채 여성들에게 폭언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피렌체의 식탁> 7월 27일, <[박상현의 '리더의 말과 글'] AOC, '욕설·폭언' 남성 의원을 시대적 명연설로 날려버리다> 중에서)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히스패닉이자 급진적인 '민주사회주의자' 그룹 소속이며 소셜 미디어 '인플루언서'이기도 한 알렉산드리아 의원을 입구에서 마주한 공화당 테드 요호 의원은 다짜고짜 그녀에게 "역겹다", "미쳤다" 같은 폭언을 내뱉었다. 

알렉산드리아 의원이 곧바로 연설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요호 의원에 대한 비판 여론이 쏟아지고, 공화당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자 오효 의원이 직접 사과했다. 하지만 (사과는) 형식적인 것에 그쳤고 이에 분노한 알렉산드리아 의원이 연설에 나선 것이다.

"어느 남성에게 딸아이가 있다고 해서 그 남성이 훌륭한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아내가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훌륭한 남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타인을 인격체로 대하고 존중하는 행동을 할 때 비로소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이 나라에서 매일 일어납니다. 이 나라의 국회의사당 계단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런 일은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여성들에게 상처를 주고, 그 말을 우리 모두를 향해 할 때 일어납니다."
 

연대 연설에 나선 민주당 동료 의원들

이 30대 히스패닉 여성 의원의 연설도 연설이지만, 더 특이할 점은 민주당 동료 의원들도 연대 연설에 나섰다는 사실이다. 그 중엔 동료 여성 의원은 물론 요효 의원과 동년배인 60대 백인 남성도 포함돼 있었다. 미국의 '리버럴'(자유주의자)들이 존중하는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연대의 실천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방점은 미 연방의회 역사상 최연소 의원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의 용기에 찍힌다. 일찍이 대학 시절부터 이민국에서 일하며 미국 내 이민자와 유색인종을 위한 정치인을 꿈꿨다던 알렉산드리아가 나이 어린 여성이면서 히스패닉이란 이중고에서 오는 차별과 혐오를 정면으로 맞서고 폭로했다는 사실에 전 세계가 놀랐다. 

지난 7월 29일 개봉한 영화 <세인트 주디>를 보면서, 이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의 용기가 떠올랐다. 영화의 배경은 9.11 테러 이후 '국토안보법'이 제정된 2003년 무렵이다.

남다른 '여성 서사'를 장착한 영화 <세인트 주디>는 '여성·이민자·유색인종'이 미국의 이민법을 어떻게 바꿨는지, 또 어떻게 바꿔나가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당선 직후 멕시코 장벽을 세워버린 '트럼프 시대'가 얼마나 퇴행하고 있는지도 증명하고 있다. 게다가 이 영화는 미국 이민법의 역사적 변화를 이끌어낸 인권 변호인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여성 변호인의 30년
 
 영화 <세인트 주디> 스틸 이미지

영화 <세인트 주디> 스틸 이미지 ⓒ (주)미로스페이스 ,(주)태왕엔터웍스

 
홀로 키우는 아들과 캘리포니아로 막 '이주'한 열혈 여성 변호사 주디 우드(미셀 모나한)에게 이민법 법률사무소의 대표 레이(알프레드 몰리나)는 '적당히 돈 될 만한 사건을 물어오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불법 이민자들이 모인 수감시설에서 우연히 약에 취한 아세파를 발견한 주디는 무턱대고 변호를 자처한다. 망명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고향 아프가니스탄에서 살해를 당할 아세파의 처지까지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제3세계 젊은 여성인 아세파가 처한 현실은 기구하다는 표현을 넘어 절망적이기 짝이 없다. 여성 인권이 전무한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자 아이들을 가르치며 제 목소리를 내 온 아세파는 탈레반에 투옥됐다가 극적으로 미국으로 탈출한다. 하지만 곧 추방될 위기에 처해 있다. 

이슬람 국가 내의 '명예살인'(가족, 부족, 공동체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조직 내 구성원을 살해하는 행위)이 서슬 퍼렇게 현존하는 아프가니스탄으로 소환될 경우, 아세파의 목숨은 장담할 수 없다.

손쉽게 망명이 가능할 줄 알았던 주디는 이민법의 실상을 알게 된 후 경악한다. 당시 미국 법원은 정치범들에게 관대한 것과 달리 본국에서 핍박받고 목숨을 위협받는 여성 이민자들의 망명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살해 위협이 현존함에도 말이다.

위기에 몰린 의뢰인을 돕는 정의의 열혈 변호사 이야기는 제법 익숙하다. 미국의 법조계를 바꾼 여성 법조인인 대법원 판사 루스 긴스버그의 생애 또한 극영화(<세상을 바꾼 변호인>)와 다큐멘터리(<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로 엇비슷한 시기에 선보인 바 있다. 

<세인트 주디>가 특별한 것은 비단 미국 이민법을 재정의하고 (영화 속에 문서로 등장하는) 미국 인권 단체 '휴먼 라이츠 프로젝트'를 이끈 '주디 우드'의 젊은 시절을 그렸다는 점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세인트 주디> 스틸 이미지

영화 <세인트 주디> 스틸 이미지 ⓒ (주)미로스페이스 ,(주)태왕엔터웍스

 
9·11 시대로 퇴행한 미국 그리고 트럼프

"영혼이 부서진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싸우는 거야."

영화 속 주디의 대사처럼, 아세파를 지키기 위한 주디의 신념은 단순히 정의나 여성 차원의 연대에 그치지 않는다. 주디는 명예살인이 현존한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성으로서의,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 증명을 위해 제 목소리를 내고자 했던 아세파의 신념과 존엄의 가치를 외면하지 않는다. 사무실을 비워줘야 하는 궁핍한 현실에도 개의치 않는다.

그렇다고 백인 여성의 시혜적인 태도를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다. 영화가 종종 주디와 아세파 사이에 지어진 경계를 '시청각'화 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니다. 미국에서 쫓겨날 처지에 처한 이주 여성과 변호인의 차이를, 무너뜨려야 할 그 경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회상 속에 등장하는 익명의 탈레반(과 아세파의 가족 중 일부)을 제외하곤, 영화 속에서 존재감 있는 악인이 없는 것 역시 같은 노선이라 할 수 있다. 아세파가, 주디가 싸워야 할 대상은 결국 '제도'다.

이를 위해 영화는 주디의 변론이 발전하는 과정과 증언에 나서는 아세파의 용기를 묘사하는데 공을 들이고, 효과적인 묘사를 위해 나름의 영화적 반전을 마련해 놓기도 했다. 물론 아세파를 살리는 판결을 이끌어내며 이민법 자체에 영향을 미친 현실 자체가 해피엔딩이긴 하지만 말이다.

30년간 이주 여성을 위해 쌓아온 주디 우드의 실화인 동시에 그와 함께 인턴으로 일했던 시나리오 작가가 각본을 쓴 만큼, 영화는 분명 어떤 낙관적 희망을 품고 있다. 그럼에도 드리워진 '트럼프 시대'의 잔향은 떨쳐버릴 수 없다.

정부를 대변해 주디와 맞붙은 변호사 벤자민이 이민귀화국(INS)이 이민세관단속국(ICE)으로 개칭되었음을 알릴 때, 현실 밖 우리는 '트럼프 시대'의 미국이, 멕시코 장벽을 쌓고, 경찰이 흑인을 별다른 이유 없이 숨지게 만든 일을 떠올리게 된다. 

그럼에도, <세인트 주디>의 낙관주의는 관객들에게 어떤 안도감을 주기 충분하다. 30년여 년 동안 이주 여성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헌신하고 이민법을 바꾸기 위해 헌신한 주디 우드와 같은 여성이 씩씩하게 동시대와 싸워왔다는 사실을 덜 극적이고, 좀 더 담담하게 묘사하며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2020년의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가 트럼프 시대의 미 의회에서 백인 남성 위주의 기득권층과 싸우고 있듯이 말이다. 
세인트주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