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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렘린은 에스토니아 같은 소련에서 제일 작은 공화국이 소련 정권에 항거하는 대단위 활동을 벌일 수 있으리라 믿지 않았다. 그래서 크렘린은 그들이 하는 일을 KGB를 통해 다 파악하고 있었음에도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를 틈타 에스토니아의 뒤를 이어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도 인민전선이 결성되었고 코카서스,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에도 전파되자 소련도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모두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자유에 대한 요구는 총칼로 막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발크 씨는 전했다. 

노래하는 혁명, 그리고 '발트의 길'의 촉발 
 
맨 오른쪽이 에스토니아의 에드가르 사비사르, 두번째가 다이니스 이반스, 한가운데가 헤인즈 발크 (National Archive of Estonia)
▲ 발트의 길 성공을 자축하는 인민전선 대표들 맨 오른쪽이 에스토니아의 에드가르 사비사르, 두번째가 다이니스 이반스, 한가운데가 헤인즈 발크 (National Archive of Estonia)
ⓒ National Archive of Esto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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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인즈 발크 씨는 노래는 사람들의 영혼에 아주 강한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했다. 게다가 에스토니아인들에게 노래는 자아실현의 가능성이었다. 노래를 통해서 금지된 것을 밖으로 외칠 수 있었다. 노래가 정치적인 도구가 되었다. 단지 예술의 한 분야가 아니라 투쟁의 도구이자 사람들을 모으고 독립의 의지를 외칠 수 있는 동기가 되었다.

그것은 세계 최초로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 노래하는 투쟁이었다. 인민전선이 창설되자마자 하룻밤 사이에 모여서 다음 날 아침까지 노래를 불렀다. 첫날에만 15만 명이 참가했다. 1988년 7월 초반까지 이러한 노래하는 투쟁이 4차례나 이어졌고 헤인즈 발크는 이 사건을 '노래하는 혁명(Laulev Revolutsioon)'이라고 이름 붙여 일간신문에 기고했다. 이후로 그 표현은 발트3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한 투쟁을 대변하는 단어로 자리매김하였다. 

그 후 에스토니아인들을 비롯한 발트3국인들은 1939년 서명된 독소불가침조약의 무효성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고르바초프와 소련내 보수정치인들은 그 여론의 위험을 바로 직감하였다. 만약 독소불가침 조약이 범죄로 인정받거나 국제법상으로 무효가 되면 소련의 발트 3국 지배 자체 역시 무효화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련은 당연히 독소불가침 조약의 부당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독소불가침 조약 
1939년 8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조인된 독일ㆍ소련 양국간의 불가침ㆍ중립조약으로 체결 향후 10년간 상호국간에 어떠한 공격도 하지 않고, 양국간 중립을 약속하며 제3국과의 전쟁이 이루어진 경우 그 제3국을 지지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 협정이다.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 발트 3국(에스토니아ㆍ라트비아ㆍ리투아니아) 등을 비롯한 동유럽 지역을 서로의 권역으로 나누도록 하는 약속이 되어 있었고 소련의 영향권이었던 폴란드를 독일이 침공함으로써 공식적으로 2차 대전이 발발하였다. 발트3국을 비롯한 유럽 내 구 사회주의권 학자들은 2차 대전의 발발이 단지 독일의 폴란드 침공만이 아닌 본 독소불가침조약의 성립에서 기인하였다고 보는 해석도 크다. 

이 조약을 기반으로 하여 1940년 소련은 발트3국을 침공하여 사회주의 경제화를 가속화하였고 2차 대전 종전 후 끝내 소련의 공화국으로 복속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소련은 이를 라트비아의 자발적인 복속, 독일로부터의 해방 등 이유를 들어 합리화하지만 발트인들은 독소불가침조약에 근거하여 폭력적이고 비인도적인 방식으로 소련에 병합되었다고 보고 있어 대러시아 관계에 여러 가지 껄끄러운 문제를 양산하고 있다. 

 
러시아가 2차대전에 승리한 5월 9일이면 라트비아에 사는 러시아인들이 시내에 모여 축제를 벌인다. 라트비아인들에게 이날은 소련의 지배가 시작된 슬픔의 날에 불과하다.
▲ 누구에겐 역사적 상처, 누구에겐 축제  러시아가 2차대전에 승리한 5월 9일이면 라트비아에 사는 러시아인들이 시내에 모여 축제를 벌인다. 라트비아인들에게 이날은 소련의 지배가 시작된 슬픔의 날에 불과하다.
ⓒ 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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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소련의 입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발트지역의 관점으로나 세계적 유럽적 문맥에서 보더라도 우리는 그 조약에 대해서 정확한 평가를 내릴 수는 없다.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은 단순히 관심지역을 나눠놓은 것에 불과하며 1940년 발트지역이 소련에 병합된 것은 그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조약의 무효성을 인정하지 않는 소련에 대항하여 세계적인 거사를 추진해야한다는 여론 역시 봇물처럼 터졌다. 무언가 전세계의 관심을 끌만한 거대한 행사여야만 했다. 단순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는 세계적인 관심을 끌기가 어려웠다. 여기에서 바로 '발트의 길'이라는 아이디어가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다이니스 이반스 (Dainis Ivans)
 
리가 구시가지 한켠에 자리잡은 이 박물관은 주요 관광지들이 몰린 지역에서 약간 떨어져 있어 찾기가 어려울 수 있으나 발트의 길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꼭 방문을 해보기를 권한다.
▲ 라트비아 인민전선 박물관 (Latvijas Tautas Frontes Muzejs) 리가 구시가지 한켠에 자리잡은 이 박물관은 주요 관광지들이 몰린 지역에서 약간 떨어져 있어 찾기가 어려울 수 있으나 발트의 길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꼭 방문을 해보기를 권한다.
ⓒ 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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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라트비아의 상황은 어떠하였을까.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 역시 처음부터 에스토니아와 한배를 타로 발트의 길이라는 험한 항로를 시작한 것은 물론 잘 알고 있었으나 나름대로 그들이 가진 고충은 없었는지, 한 곳에 존재하지만 역사와 문화와 언어와 완전히 다른 세 나라가 한 가족처럼 그러한 거대한 일을 추진하는 데에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는지 궁금증이 커져갔다. 그래서 내가 찾은 곳 역시 라트비아의 인민전선 박물관이었다.

라트비아 수도 리가 구시가지 한켠에 위치한 라트비아의 인민전선 (Tautas Fronte) 박물관은 다른 나라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우선 에스토니아 탈린에 자리잡은 에스토니아 인민전선박물관은 시립박물관 차원의 관리만을 받고 있는 반면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의 인민전선 박물관은 과히 국립 박물관 수준에서 관리가 되고 있어 에스토니아에 비해 건물의 외관이나 규모면에서 더 내실이 있어 보였다.

게다가 에스토니아에서 인민전선 활동이 실지로 이루어지던 곳은 현재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반면, 라트비아는 인민전선 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벌어지던 당시의 건물을 여전히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그 시대의 분위기와 숨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했다.
 
사진이긴 하지만 저 사람들 사이에 서서 발트의 길에 참여하는 기분을 잠깐이나마 누려볼 수 있다
▲ 라트비아 인민전선의 내부 사진이긴 하지만 저 사람들 사이에 서서 발트의 길에 참여하는 기분을 잠깐이나마 누려볼 수 있다
ⓒ 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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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에스토니아 인민전선(Eesti Rahvarinne)과 리투아니아의 인민전선 격인 사유디스(Sąjūdis)의 경우 당시 중역들이 현재에도 정치 현직에서 중차대한 역할을 맡고 있으나 라트비스 인민전선의 전직 대표인 다이니스 이반스 씨는 현재 정치에서 발을 뗀 상태였고 과거에 이루었던 역사적 성과에 비해 현재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 인터뷰를 위해서 만났을 때 그는 라트비아의 인민전선 박물관을 찾아온 외국인들을 맞아 영어로 내부가이드를 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는 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연극이나 예술에 대한 비평기사를 쓰던 기자였다. 그러던 중 1987년 라트비아 최대의 강인 다우가바 강에 소련이 건설하려고 했던 댐건설이 강환경에 미치는 해악에 대한 기사를 연속 보도하였고 그 결과 댐건설이 취소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노래와 합창이 발트의 길과 이어진 에스토니아와는 조금 달리 라트비아에서는 환경운동이 발트의 길과 연관되어졌다는 특징을 보인다.  

소련이라는 골리앗에 맞서 승리를 일구어낸 기자로서 대중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다이니스 이반스는 에스토니아 인민전선 설립 직후인 1988년 10월 라트비아 인민전선의 대표로 선출되어 발트의 길과의 깊은 인연에 발을 담그게 되었다. 그 다음 해 발트의 길이 성공한 이후 라트비아 정치직에서도 상당 시간 머물렀으나 현재는 정치에서 완전히 발을 떼고 라트비아 인민전선 박물관 내에서 연구 활동에만 전념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발트의 길은 에스토니아가 처음 주창하긴 하였으나 3나라가 한 몸처럼 움직인 행사였다. 물론 불협화음이나 변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89년 6월 15일 에스토니아의 에드라르 사비사르가 에스토니아 패르누에서 열린 인민전선총회에서 발트의 길 조직을 처음으로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의 역사에는 그 발트의 길이 탈린에서 빌뉴스에 이르는 '비교적(?)' 짧은 구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에 세 배에 이르는 대역사로 남을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독소불가침조약으로 인해 공산화가 되거나 그 영향력에 놓였던 나라들을 모두 포함하여 핀란드부터 루마니아 국경까지 이르는 정말로 거대한 인간띠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이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여러 가지 여건상 어려움을 미리 파악하고 발트3국 내에서만 제한하여 인간띠를 만들어보는 것으로 결정이 내려졌다.

인민전선 총회에서도 처음엔 바보 같은 소리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에스토니아 인민전선에서도 성공 가능성을 낮게 평가했다. 우선 사람을 한곳에 끌어모으는 것이 아주 힘들 것이 뻔했다. 수백 명 수준으로는 부족한 수준이며 적어도 수십만 명은 동원이 되어야하는데 사람들을 동원하기 위해서 필요한 엄청난 교통량을 제공받기는 당시 상황으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가지 방법이 있다면 인민전선과 협력하는 기관들에게 차량을 공짜로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 많은 사람들에게 그 감동 충만하고 역사적이지만 동시에 위험천만해 보이는 그 사건에 참여해달라고 독려하는 것도 쉽지는 않아 보였다.  

자동차는 기름을 넣고 엑셀만 밟으면 앞으로 나아가지만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과 동기부여가 필요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시간이 없었다. 독소불가침조약이 체결 50주년이 1989년 8월 23일까지 불과 두 달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사실 그리고 이 행사는 1989년 8월 23일이 아닌 20일에 개최될 수도 있었는데 그 이유는 리투아니아 측에서 인원 동원의 효율성 차원에서 일요일이었던 8월 20일로 제안을 했던 탓이다 .

6월 15일에 열린 인민전선 총회 이후 2주간 각 국가에서 발트의 길을 잇는 데 필요한 사항들을 점검하고 다시 회의를 갖기로 잠정적인 결론이 내렸다. 라트비아만 보았을 때 한 사람당 1.5 미터 간격으로 서있는다고 할 경우 라트비아 구간에는 최소 20만 명이 필요했다.  그래서 각 도시, 지방. 단체별로 나누어 각 담당 인민전선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차를 동원할 수 있을지 계산하는 일이 추진됐다.
 
다이니스 이반스씨는 현재 정계에서 은퇴하여 본 박물관에서 연구원생활을 맡아하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사용하던 타자기와 인민전선 기관지인 '아트모다(Atmoda, 기상)'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다.
▲ 인민전선 당시 본인의 집무실에서  다이니스 이반스씨는 현재 정계에서 은퇴하여 본 박물관에서 연구원생활을 맡아하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사용하던 타자기와 인민전선 기관지인 "아트모다(Atmoda, 기상)"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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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스 씨는 수도 리가에 있는 인민전선 중앙본부에서는 지역 내 사람 동원에 대해서는 전혀 간섭하지 않았고 완전히 지방단체들이 자율적으로 알아서 계산하고 추진하였다고 전해주었다. 중앙본부에서는 어느 구간에 사람이 부족하면 담당지역과 연락하여 사람들을 채워달라고 부탁하는 정도로 중앙관리를 최소화하고 지방의 자율적 참여가능성을 최대화한 것이 본 행사의 성공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민전선은 라트비아에만 100개의 지부가 있었고 그 결과 라트비아 구간에만 처음 계획했던 20만명을 훨씬 웃도는 60만명이 손을 잡고 서있게 되었다.

크레믈린의 판단 착오 

인민전선 내 오피니언 리더들의 걱정은 기우와 같았다. 모든 것은 생각보다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이미 인민전선은 발트3국 전역에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리투아니아는 인민전선이 아닌 사유디스라는 이름으로 활동이 벌어졌다). 에스토니아는 전역에서 기부금이 전달되어 거기서 월급을 받고 일하는 직원도 있었다.

모든 도시와 마을에는 각 지역 단체가 있었고 각자 대표도 선출되었다. 모든 공장, 공무원 모임, 집단농장, 직업 동맹, 아파트 단지 등 모든 곳에 인민전선 모임이 결성되어 있었고 모든 정보가 오가는 거대한 네트워크였다. 심지어 각 지역별로 신문도 발행하고 있을 정도였다. 당시 사치품이었던 전화가 있는 사람들은 그 네크워크의 중심 인물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전화와 신문을 통해서 활동계획과 일정이 실시간으로 전국에 전달되었다.  

에스토니아의 발크 씨는 이것은 "거의 새로운 정당의 창설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민주적 메커니즘 바탕을 둔 자발적 정당활동이었다. 

고르바초프는 결사의 자유를 허락했으므로 처음엔 방해공작이 없었다. 에스토니아에서 벌어지는 일을 주목하고는 있었으나 별다른 금지 조치는 없었다. 그것은 고르바초프가 개혁과 개방 정책을 세계에 내보이면서 직접 한 약속이기도 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 자신도 그의 약속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다음 기사에 계속)

태그:#발트의 길,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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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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