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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최고의 잡지 <개벽>의 표지(사진은 대구 이상화 고택 옆 '계산예가'에 게시된 것을 다시 촬영한 것임). 윤봉길은 1926년 6월호 <개벽>에 실린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보고 큰 감동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1920년대 최고의 잡지 <개벽>의 표지(사진은 대구 이상화 고택 옆 "계산예가"에 게시된 것을 다시 촬영한 것임). 윤봉길은 1926년 6월호 <개벽>에 실린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보고 큰 감동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 계산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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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1월 전두환 정권은 이른바 '언론 통폐합'을 실시했다. 신문협회와 방송협회는 전국 11개 신문사, 27개 방송사, 6개 통신사, 172종 정기간행물을 스스로 없애고, 언론인 1천여 명을 강제 해직한다고 발표했다. 언론사가 너무 많아 여러 가지 사회적 부작용을 일으키는 점을 고려한 자율적 결단이라고 밝혔다.

그 말을 믿는 국민은 없었다. 언론 통폐합을 기획하고 강제로 밀어붙인 곳은 보안사령부이고, 그 배후에 전두환 정권이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 언론 통폐합은 정치 권력이 집권 연장과 수월한 통치를 위해 언론을 마음대로 짓밟은 최악의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대한민국의 정치 지도자들의 수준이 얼마나 낮은지를 온 세계에 알린, 국가적 '흑역사'였다고 할 수 있겠다.

한국 정치 지도자의 수준을 보여준 박정희와 전두환

1974년에도 이에 못지않은 언론 탄압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시위·집회·기도회 등에 관한 당시 정권의 '보도 금지' 지시를 무시하고 언론자유 주창에 앞장섰던 <동아일보>사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기업들을 협박하고 회유해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 광고를 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은 약 7개월에 걸쳐 광고가 거의 없는 신문을 발간하고 전파를 내보냈다. 언론사상 초유의 우스꽝스러운 사태가 발생하자 일반 국민들은 앞다퉈 유료 격려 광고를 실었고, 세계 유수 언론단체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회사 소유주가 끝내 권력 압박에 굴복해 당시 114명 언론인을 해고함으로써 국내외 성원은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박정희‧전두환의 이런 작태는 창조적인 발상은 아니었다. 이미 일본 제국주의가 앞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반민주적 언론 탄압 조처를 해왔던 탓이다.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인 신문을 무수히 폐간하고, 사전 검열을 통해 보도 내용을 삭제하고 수정했던 예는 부지기수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일제의 문화적 만행을 이어받아 따라한 독재자들이었던 것이다.

일제의 언론 탄압, 그대로 따라한 박정회와 전두환

일제가 1920년대 최고 잡지 중 하나로 꼽혔던 <개벽(開闢)>을 폐간시킨 일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언론탄압사 한 페이지로 장식될 사건이었다. 월간 종합잡지 <개벽>은 1920년 6월 25일 창간했다. <개벽>을 발간한 천도교단(天道敎團)은 이 잡지를 통해 민족문화 운동을 펼치고자 했다. 개벽은 지금의 어두운 시대는 끝이 나고 새 세상이 온다는 뜻의 '후천 개벽 사상(後天開闢思想)'에서 딴 이름이다.

전체 지면의 약 1/3을 문학과 예술로 채운 <개벽>은 '세계사상을 소개함으로써 민족자결주의를 고취하며, 천도교사상과 민족사상의 앙양, 사회개조와 과학 문명 소개와 함께 정신적·경제적 개벽을 꾀하고자' 잡지를 낸다고 간행 목적을 밝혔었다.

그러나 이는 창간호부터 일제에 전량 압수됐다. 그 이후에도 <개벽>은 압수 40회 이상, 정간 1회, 벌금 1회 등 일제로부터 엄청난 압력과 박해를 받았고, 그 탓에 점점 경영난이 심각해졌다. 결국 <개벽>은 1926년 8월 1일 통권 72호를 끝으로 강제로 폐간되고 말았다(이후 1934년·46년 각 복간했다가 다시 자진 휴간함 - 편집자 주)
 
잡지 <개벽>에 대한 평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개벽〉일부 : 민족항일기의 《개벽》은 일제의 정책에 항거하여 정간 ‧ 발행 금지 ‧ 벌금 ‧ 발행 정지 등의 가혹한 처벌을 감수하면서까지 민족의식 고취에 역점을 둔 대표적인 종합잡지이다. 뿐만 아니라, 문예잡지 못지않게 문학이론의 전개, 문학작품의 발표, 외국문학의 소개, 신인 발굴 등 다각적인 배려를 함으로써 1920년대 문학 창달에 기여한 바가 커서 이 시기 문학연구에 귀중한 문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언론으로 박정희 독재에 맞선 독립지사 장준하, 끝내 의문사
  
박정희는 일제의 <개벽> 강제 폐간 사례도 고스란히 본받았다. 1953년 4월 독립지사 장준하의 주도로 창간된 <사상계>는 줄곧 독재 정권을 심도 있게 비판했다. 박정희는 발행인 연행, 판매서점 탄압, 세무사찰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사상계> 폐간을 시도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치졸한 술수를 부렸다. '자체 인쇄소를 가지고 있지 아니한 출판사는 책에 인쇄소 책임자를 인쇄인으로 밝혀둬야 한다'는 규정을 적용했다. 그렇게 '지나가던 소가 웃을' 터무니없는 이유로 <사상계>는 1970년 5월 통권 205호에서 속간을 멈췄다.
 
장준하의 '의문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장준하〉 일부 :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현 포천시)에 있는 약사봉에서 등산하다가 의문의 사고로 사망했다 이후 사망 경위에 대해 논란이 분분했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사망경위를 조사했으나, 변사 사건 기록 폐기, 수사 관련 경찰관들의 사망, 국가정보원 자료의 미확보 등으로 2004년 그의 사망이 공권력의 직‧간접적 행사에 의한 것인지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러나 2012년 8월 묘지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두개골 함몰 흔적이 발견되어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이상화 시인이 '빼앗긴 들'의 시상을 얻은 대구 수성못에 띄워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1, 2연
 이상화 시인이 "빼앗긴 들"의 시상을 얻은 대구 수성못에 띄워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1, 2연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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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은 폐간 두 달 전인 1926년 6월호에 이상화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게재했다. <개벽>을 '한 권도 빼놓지 않고 읽어온(김상기 <윤봉길>)' 윤봉길이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만났다.

윤봉길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게재된 '<개벽>을 보다가 눈물을 터뜨렸다. 동생 남의(윤봉길의 본명은 우의)의 증언에 의하면, 형 윤봉길이 울음을 터뜨리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이태복<윤봉길 평전> 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 읽으며 눈물 흘린 윤봉길

그에 따르면, 윤봉길은 동생한테 눈물을 보인 것이 창피했는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남의가 재빨리 형 책상을 보니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가 놓여 있었다. '윤봉길 의사는 <개벽>을 통해 새 사조에 눈을 떴고, 민족의식이 솟아났으며, 억압에 저항하는 청년의식이 왕성해졌다(이태복)'고 한다. 이 사례는 일제가 왜 <개벽>을 강제 폐간시켰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해주는 역설적 증언이다.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중략)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윤봉길 의사(자료사진)
 윤봉길 의사(자료사진)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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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에 다닐 때 시회(詩會)에서 자주 장원을 했던 윤봉길은 '장부가 집을 나서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의미의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을 써서 스스로 결의를 다진 뒤 중국을 향해 출발했다. 그는 고향을 떠나 상해로 망명하는 자신의 감회를 〈슬프다 내 고향아〉라는 한 수 시에 남겼다.

자유의 백성 몰아 지옥 보내고
푸른 풀 붉은 흙엔 백골만 남네

고향아 내 운명이
내가 어렸을 때는
쾌락한 봄 동산이었고
자유의 노래 터였네
지금의 고향은
귀 막힌 벙어리만 남아
답답하기 짝이 없구나

동포야 내 목엔 칼이 씌우고
입가엔 튼튼한 쇠가 잠겼네
고향아 옛날의 자유 쾌락이
이제는 어데 있는가?

악마야 간다 나는 간다
인생의 길로 정의의 길로
어디를 가느냐고 물으면

유랑의 가는 길은
저 지평선 가리켜
오로지 사람다운 인류세계의
분주한 일꾼 되려네

갈 곳이 생기거든 나를 부르오
도로가 울툭불툭 험하거든
자유의 불꽃이 피랴거든
생명의 근원이 흐르려거든
이곳이 나의 갈 곳이라네

떠나는 길 기구한 길
산 넘고 바다 건너
구렁을 뛰어 넘고
가시밭 밟아 가네

잘 있거라
정 들인 고국강산아

  
윤봉길 지사가 야학을 열었던 저한당의 방
 윤봉길 지사가 야학을 열었던 저한당의 방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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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는 이상화 시인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상을 떠올린 수성못이 남아 있다. 시인이 거닐면서 '빼앗긴 들'을 바라보았던 못둑의 '상화 동산'에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비와 흉상이 세워져 있다. 시내로 들어가면 생가도 있고, 시인이 생애의 마지막 시간을 보낸 '상화 고택'도 볼 수 있다.

서울에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있다. 고향인 충남 예산에도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오른쪽에 사당 충의사가 있고, 사당 왼쪽 연못 너머 언덕에 부인 배용순 여사의 묘가 있다.

기념관에서 도로 건너편으로 들어가면 의사가 태어나고 자란 광헌당과 저한당 등 옛집들이 복원되어 있다. 옛집 일원에는 의사를 기려 세워진 동상, 기념비, '윤봉길 의사 일대기 체험관', 의사가 야학을 차려 농민교육을 실시했던 집 부흥원도 있다.
 
예산의 윤봉길 의사상
 예산의 윤봉길 의사상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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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의 윤봉길 의사 유적지는 가을이면 은행잎이 노랗게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나 '떠나는 길 기구한 길 / 산 넘고 바다 건너 / 구렁을 뛰어 넘고 / 가시밭 밟아 가네 // 잘 있거라 / 정 들인 고국강산아'라는 말을 남긴 채 곁을 떠난 의사는 살아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비록 '장부는 집을 나서면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스스로 다짐했지만, 그 일을 생각하면 늘 죄송하다.

의사가 1932년 4월 29일 폭탄을 던져 민족 기상을 세계에 떨쳤던 상해 홍커우에 '윤봉길 의사 생애 사적 전시관'이 있다고 한다. 서울 효창공원 묘소와 예산 유적지는 참배했지만 아직 홍커우의 루쉰 공원에는 가보지 못했다. 그곳에 가는 일은 가시밭을 밟고 구렁을 뛰어넘어야 하는 기구한 길도 아닌데 말이다. 의사를 주요인물로 한 장편소설 <한인 애국단>을 쓰기는 했지만, 거사의 현장을 미처 답사하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저 죄송할 따름이다.
 
윤봉길 지사의 사당 충의사
 윤봉길 지사의 사당 충의사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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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 윤봉길 유적

수성못, 상화 시비, 흉상 : 대구광역시 수성구 무학로 112
이상화 생가 :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13길 7-20 '라일락뜨락 1956'
이상화 고택 :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6-1
(서울)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매헌로 99 양재시민의숲
(예산)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 사당, 부인 묘소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덕산온천로 183-5
윤봉길 생가 광한당, 도중도 매헌 무궁화공원, 부흥원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부흥길 21
윤봉길 성장지 저한당, 동상, 기념비, 체험관 : 충남 예산군 덕산면 덕산온천로 182-10

태그:#이상화, #윤봉길, #개벽, #언론통폐합, #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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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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