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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국가정보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박지원 후보와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가 설전을 벌였다. '주적이 북한인 것은 틀림없죠?'라는 주호영 질문에 박지원은 '대한민국에 위해를 가하려는 어떤 국가도 우리의 주적이다' '북한은 주적이면서 평화와 협력, 통일의 대상이다'라고 답했다.

주호영이 동일한 질문을 되풀이하자, 박지원은 "말씀드렸는데, 기억을 못 하느냐?"며 "여기서 100번 소리 지를까요? 광화문광장에서 할까요?"라고 말했다(관련 기사: 박지원-주호영, '내통 발언' 이어 '대북송금 합의서' 공방). 주호영의 '주적' 질문은 박지원 후보자 내정 이후 나온 '적과 내통한 인물' 발언, '남북 이면합의서 의혹'의 같은 궤도에 있다.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가 27일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열린 박지원 국가정보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 참석, 박 후보자에게 다가가 악수하고 있다.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가 27일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열린 박지원 국가정보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 참석, 박 후보자에게 다가가 악수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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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적(主敵)이란 표현은 주(主)가 아닌 일반 적이 더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현재, 북한을 제외한 국가 중에서 한국에 가장 큰 위협을 가하는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은 독도 영유권을 위협할 뿐 아니라 경제보복과 무역전쟁으로 한국의 목줄을 조이려 하고 있다.

오늘날 전쟁은 군사뿐 아니라 경제·문화 방면 등으로도 전개된다. 그런 방면에서도 넓은 의미의 적이 존재한다. 이렇게 따지면, 일본도 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그렇지만 미래통합당을 포함한 보수·극우 세력은 일본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식민지배 문제 등과 관련해 일본을 노골적으로 두둔하기까지 한다.

'주적'을 운운한다면, '적'도 마땅히 운운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넓은 의미의 적에 포함될 만한 국가조차도 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오로지 하나의 대상만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 오직 하나의 대상한테만 적대적 태도를 취할 거라면, 그냥 '적'이라고 말하면 된다. 굳이 '주적'이란 표현을 씀으로써, 대한민국이 많은 적을 두고 있는 듯한 인상을 풍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너는 나의 적'이라고 명시적으로 선언하는 것은 인간관계에서든 국제관계에서든 바람직하지 않다. '너는 나의 적'뿐 아니라 '너는 나의 경쟁자'란 말 역시 마찬가지다. 좋아하는 척하며 살아도 힘든 판국에 '너는 나의 경쟁자', '너는 나의 적'보다 한술 더 뜬 '너는 나의 주적'이란 표현까지 써가며 산다면 아무래도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을 것이다.

미국은 왜 중국을 일컬어 '전략적 경쟁자'라 부를까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인도·태평양을 통한 중국의 세력 팽창을 견제하고자 2017년 12월부터 인도·태평양 전략을 공식적으로 운용하고 있다. 이때부터 미국은 러시아를 최우선으로 견제하던 종전 입장을 버리고 중국을 제1의 위협으로 상정하고 있다.

지금 미국과 중국의 대결은 남북한 대립을 훨씬 능가해 있다. 그들 사이에서는 피 터지는 무역 분쟁이 벌어지고 있다. 홍콩 문제를 둘러싸고도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난지나해(남중국해)에서도 군사적 긴장감이 커지고 있다. 돌발적 사고가 하나라도 터지면 언제라도 전쟁이 터질 것 같은 긴장 상태가 조성돼 있다.

이렇게까지 적대적 분위기를 고조시키면서도 미국은 중국을 주적이 아닌 '전략적 경쟁자'(strategic competitor)로 부르고 있다. 경쟁은 적뿐만 아니라 친구와도 벌일 수 있다. 중국과 사생결단을 낼 것처럼 하면서도, 주적이 아닌 전략적 경쟁자라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가 전략적 경쟁자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징후가 있었다. 2019년 6월 오사카 G20(주요 20개국) 정상회담 때 시진핑 주석을 만난 직후에 그가 보여준 태도에서 그 점이 언뜻 비쳤다. 이 상황을 지난해 7월 2일자 <워싱턴포스트> 기사 '중국은 전략적 동반자인가 경쟁국가인가?(Is China a strategic partner or rival power?)는 이렇게 보도했다.

"일본 오사카에서 G20 정상회담과 별도로 중국 지도자 시진핑과 만난 지 몇 분 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가 전략적 동반자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한다(I think we're going to be strategic partners)'고 언명했다. 이것은 중국에 대한 트럼프 행정부의 표준적 입장으로부터 상당히 전환된 것이다. 2017년 말에 발표된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은 중국을 경쟁자(competitor), 경쟁국가(rival power), 현상타파 국가(revisionist power)로 지칭했다."

중국을 전략적 경쟁자로 부르며 적대시 정책을 구사하던 트럼프도 막상 시진핑을 만난 직후에는 그 표현을 사용하지 못했다. 엉뚱하게도 '전략적 동반자가 될 것 같다'는 발언이 나왔다. 트럼프 같은 인물조차도 상대방을 경쟁자로 부르는 것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9일(현지시간) 의회에서 공화당 상원의원 주례 오찬에 참석한 뒤 기자들과 만나 발언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 예방 차원에서 말라리아 치료제인 하이드록시클로로퀸을 복용 중이라고 발언해 논란을 빚은 것과 관련, 이 약의 평판이 좋고 추가적 안전을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을 전략적 경쟁자로 부르며 적대시 정책을 구사하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사진)도 막상 시진핑을 만난 직후에는 그 표현을 사용하지 못했다. (자료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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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자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이 정도로 부담되는 일이라면, '적'도 아닌 '주적'이란 표현을 쓰는 게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일지는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김창수 국가안보실 통일정책비서관이 2001년 <황해문화> 제31호에 기고한 '주적 개념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이런 대목들이 있다.

"주적이란 정확한 개념 정의도 없고, 학문적으로 검증된 개념도 아니며, 국민적인 공론화 과정을 거친 개념도 아니고, 국제적으로 어느 나라도 사용하지 않는 개념이다."

"미국·일본·호주·캐나다·중국과 같이 현재 <국방백서>를 발간하고 있는 나라들 가운데 어느 나라도 주적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다. 특정 국가를 주적으로 명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주적이라는 용어도 사용하지 않는 것이 국제사회 현실이다."


미국은 북한·이란을 불량국가나 악의 축으로 폄하하면서도, 양국을 주적으로 부르지는 않는다. '북한·이란은 불량국가다' '북한·이란은 악의 축이다' 같은 표현은 명명자와 상대방의 관계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다. 명명자의 눈에 상대방이 그렇게 비친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를 '주적'이라고 부르는 일의 위험성

하지만 '북한·이란은 주적이다'라는 표현은 명명자와 상대방의 관계를 노골적으로 노출한다. 명명자가 상대방을 적대시하고 있음을 분명히 전달하는 표현이다. 이것이 명명자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렇게 위험한 일이므로 정상적인 국가들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상대방을 좋아하는 척해도 살아가기 힘든 판국에 '너는 나의 주적'이라며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시하는 것은 나라를 위험에 빠트리는 무모한 짓이기 때문이다.

이런 대한민국을 북한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남한의 <국방백서>에서 주적 표현이 등장했다 사라졌다 하는 일이 반복되다가 1999년 및 2000년 백서에 다시 등장한 것을 두고, 2000년 12월 10일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대변인 성명을 통해 "주적론을 철회하지 않는 한, 남북 합의사항들이 제대로 진척될 수 없다" "대화와 협력의 상대방을 주적으로 간주하면서 북남 상급(장관급) 회담과 군사실무회담을 누구와 하자는 것이며 적십자회담과 흩어진 가족, 친척들의 상봉은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라고 따져 물었다.

사실, 주적 개념은 1980년대 후반 이전 미·소 냉전 시대에나 어울릴 만한 것이다. 냉전 시절에는 제3세계 비동맹 진영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이 미국 진영 대 소련 진영으로 양분돼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 이 구도에서는 상대방 진영 전체가 적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 적들 중 하나를 주적으로 설정할 만도 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다른 나라들은 주적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다. 한국만 그렇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탈냉전이 정착된 1990년대부터는 그런 진영 대결이 사라졌다. 그래서 상대방 전체를 적으로 규정할 필요도 없어졌고, 그중 하나를 주적으로 상정할 이유도 없게 됐다. 또 탈냉전 하에서는 누가 적이고 누가 친구인지도 불명확해졌다. 인간관계뿐 아니라 국제관계에서도 가급적 친구인 척, 좋아하는 척하고 살아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또 국가간 대결이 군사 분야 이외의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됨에 따라, 자국과 특정 국가의 관계를 일의적으로 규정하기도 힘들게 됐다. '적이다, 아니다'를 딱 부러지게 규정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일례로, 지금 한국과 일본은 한·미·일 삼각 동맹에 편입돼 있다는 점에서는 우방이지만, 독도·식민지배·무역분쟁 등에서는 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적으로 규정하기도 모호하고 동맹으로 규정하기도 모호한 관계들이 1990년대 이후 많이 생겨났다. '주적' 표현은 고사하고 '적' 표현도 쉽게 사용하기 힘든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주적' 개념, 이순신·신립 등 역사적 전투 사례로 살펴보니

더군다나, 주적 개념을 사용하면 군사·안보상 유연성도 발휘하기 어렵다. 임진왜란이 발생한 것과 임란 초기에 조선이 고전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동아시아 질서를 교란하는 2대 행위자는 대마도(당시까지 독립정권)·일본의 왜구와 만주의 여진족이었다. 동아시아 최강인 명나라는 이중에서 여진족을 더 위험시했다. 여진족이 명나라 수도 북경과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나라는 조선과 공동으로 여진족에 대한 압박 정책을 전개했다.

이런 상황은 조선을 곤란케 만들었다. 명나라에 이끌려 여진족을 일종의 주적으로 상정하다 보니 여진족을 조선 편으로 끌어들이는 게 힘들어졌다. 그래서 여진족과의 긴장 관계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뿐 아니라 조선군이 유목민 기병대와의 전투에만 최적화되는 문제점도 발생했다. 선박을 타고 다니다가 육지에 상륙해 보병으로 전환되는 왜구에 대해서는 방비를 소홀히 하게 된 것이다.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한 이유 중 하나는 조선의 국방태세가 여진족과의 대결에 최적화돼 있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이 그 틈을 노렸던 것이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만 해도 조선 최고의 명장이었던 신립 장군과 그를 믿고 따르던 8천 병력이 충주 탄금대에서 의외의 일격을 당하고 장렬히 전사해 전쟁 초반의 전세가 크게 기울어진 것 역시 동일한 이유에 기인했다. 신립 장군의 전법이 여진족 기병대한테나 통할 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충장공 신립 장군과 팔천고혼 위령탑’, 충북 충주시 탄금대에서 찍은 사진.
 ‘충장공 신립 장군과 팔천고혼 위령탑’, 충북 충주시 탄금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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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임진왜란 전에 함경도에서 여진족을 상대했었다. 그런데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줬다. 이런 천재가 한 시대에 여럿 등장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신립 같은 최고의 명장도 기존 틀에서 쉽게 벗어나기 힘들다. 이 사례는 주적 개념이 군사안보 전략의 유연성을 얼마나 많이 저해하는지 잘 증명한다.

이처럼 주적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안보를 불안케 하고 탈냉전 시대에 맞지 않으며 군사 안보의 유연성을 떨어트리는데도, 미래통합당과 일부 보수·극우는 아직도 주적 개념에 연연해하고 있다. 이들이 대한민국 안보를 얼마나 저해하고 있는지 절감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광화문광장에 서서 '우리는 전 세계를 다 사랑합니다' '우리는 북한도 사랑합니다'라고 100번을 외쳐도 안보의 확실성을 기약하기 힘든 이 판국에, 상대방이 짜증이 날 정도로 '북한이 우리의 주적이 맞냐?'고 묻고 또 묻는 인물이 제1야당 원내대표 자리에 앉아 있다. 먼 옛날의 환상 속에 갇혀 시대 변화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한국 보수·극우의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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