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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올해 3월 2일에 국가보훈처 공훈발굴과로부터, 독립유공 공적심사를 요구한 전봉준(1855∼1895)과 최시형(1827∼1898) 선생에 대해 똑같이 "활동내용이 독립운동 성격 불분명하다"라고 한 줄로만 기재된 황당한 통보를 전달받았다. 두 분에 대한 독립유공 서훈이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심사 결과가 부당하여 필자는 <오마이뉴스>에 "독립유공 지정, 전봉준·최시형의 항일투쟁은 왜 안 됩니까"(2020, 5, 14)라는 반박 글을 게재하였다. 공적심사에 참여한 심사위원의 판정에 대해 조목조목 근거를 들어 비판하였다. 글의 말미에 국가보훈처의 담당 공무원과 독립유공 심사위원이 언론 매체를 통해 반론을 펴라고 주장하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까지 반론을 게재하지 않고 있다.

교과서에 실린 학계 정설도 부정한 보훈처
 
전봉준 장군이 일본영사관에서 심문을 받은 뒤에 찍은 마지막 모습(1895년 2월 27일) 2015년 고 양상현 교수가 전봉준 사진을 발굴 공개함
▲ 전봉준 장군이 일본영사관에서 심문을 받은 뒤에 찍은 마지막 모습(1895년 2월 27일) 2015년 고 양상현 교수가 전봉준 사진을 발굴 공개함
ⓒ 양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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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103쪽에 달하는 증빙자료를 첨부하여, 지난 5월 18일에 국가보훈처를 방문하여 담당공무원에게 전봉준·최시형 독립유공 서훈에 대해 재심을 신청하였다. 그 뒤, 지난 5월 22일 인권연대가 국회의원 회관에서 주최한 '국민 중심의 보훈을 위한 과제와 개혁 방안'이라는 주제로 열린 정책 토론회에 참여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 이 정책 토론회에는 국가보훈처가 추진하는 보훈혁신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 많이 참여한 토론회였다.

"똑같이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항거하다가 순국했는데, 을미의병 참여자(양반 유생)는 서훈하고,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평민, 전봉준 등)는 서훈을 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1962년에 이병도와 신석호(둘 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됨)가 정한 독립유공 내규 즉 '독립운동의 기점은 을미의병이다'라는 내규를 고치지 않고, 지금도 여기에만 의거해서 서훈을 하고 있다. 을미의병 참여자와 똑같이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도 항일 구국 투쟁을 했다. 69년이나 지난 내규를 지금도 고치지 않고 있다. 국가보훈처 공무원들은 국민들이 내는 세금으로 월급을 받고 있으니, 독립유공 내규를 고쳐야 한다."

필자는 다시 지난 6월 19일에 국가보훈처를 방문하여, 공훈발굴과의 담당 과장과 연구관을 만나 아래와 같은 내용을 건의했다.

"1962년에 공적심사위원회(이병도와 신석호 참여)가 결정한 내규 즉 '독립운동의 기점은 을미의병이다'라는 내규는 수명이 다했기에, 이제는 고쳐야 한다. 이병도는 자신이 지은 <신수 국사대관>(1961)에서 동학농민혁명을 '동학란'으로 기술했고, '폭동'으로 서술했으며, 2차 동학농민혁명의 구호가 '척왜를 부르짖었지만, 그야말로 형식적인 구호에 불과하였'다 라고 기술하였다. 신석호도 자신이 지은 <중학교 국사>(1960) 교과서에서 동학농민혁명을 '동학당의 난'이라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역사학자는 아무도 이병도와 신석호와 같이 동학농민혁명을 인식하지 않는다. 독립유공 서훈 내규도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약칭:독립유공자법)에 나온 내용대로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 항거하다가 순국한 자는 서훈한다'로 하면 된다. 아니면 '국권 수호 운동의 기점은 갑오변란(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 이후 일제에 항거하는 때부터다'로 바꾸어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가 통일되어 집필된 8종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한국사 개설서, 독립운동사 분야의 최고 학자(예로 들면 조동걸, 신용하, 김상기 등등)의 저서와 논문에서 갑오변란을 일제가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첫 번째 침략 사건으로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국가보훈처 공훈발굴과는 독립유공 서훈 내규 개정위원회를 만들어 내규를 개정하기를 바란다."


2020년 현재 8종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2차 동학 농민 운동을 일으킨 전봉준을 항일 구국 투쟁을 전개한 총사령관으로, 최시형을 항일 구국 투쟁을 전개하도록 지시한 최고 지도자로 기술하고 있다. 중학교 역사교과서는 '동학 농민 운동의 전개' 부분에서 "농민군이 해산하자 정부는 청과 일본에 군대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오히려 경복궁을 점령하여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고, 청·일 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동학 농민군은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다시 봉기하였다. 서울로 진격하던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관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였다"로 서술하고 있다. 계속해서 '동학 농민 운동의 의의' 부분에서 "동학 농민 운동은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려 한 반외세 민족 운동이었다"(조한욱 외 10인, <중학교 역사➁>, 비상교육, 2019, 26쪽)로 기술하고 있다.

교과서는 한국 근현대사학계가 인정하는 정설과 통설을 바탕으로 기술된다. 학계의 의견이 통일되어 모아진 내용이 교과서에 기술된다. 모든 한국사 개설서에 2차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반일투쟁, 반외세 반침략 민족운동으로 서술하고 있다. 아래는 두 학술단체가 발간한 개설서에서 기술한 내용이다.

한국역사연구회가 지은 <한국역사>의 '1894년 농민전쟁' 부분에서는 "봉건사회를 변혁하고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을 물리치려 한 대규모의 반봉건·반침략투쟁이었다. 농민전쟁이 좌절된 것은 무엇보다도 일본군의 압도적인 무력 때문이었다"(역사비평사, 1992, 255쪽.)라고 기술하고 있다. 역사문제연구소가 지은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의 역사>3에서는 "농민군은 일본이 국왕을 감금하는 사태가 빚어지자 일본을 상대로 다시 봉기하였다. 전봉준 등은 일본이 국왕을 감금하고 국권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군을 몰아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고 생각하고, 각지에 흩어져있던 농민군을 다시 집결시켰다"(웅진출판, 1993, 54∼55쪽.)라고 서술하고 있다.

차이는 신분뿐
 
홍범도 장군 홍범도는 전봉준 장군이 이끈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에 반일, 반봉건 의식에 눈을 떴고”, 그해 의병 투쟁에 나섰다.
▲ 홍범도 장군 홍범도는 전봉준 장군이 이끈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에 반일, 반봉건 의식에 눈을 떴고”, 그해 의병 투쟁에 나섰다.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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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동학농민혁명과 의병운동의 공통점은 적극적인 국권 수호 운동, 항일무장투쟁, 일본의 침탈에 맞선 반침략·반외세 민족운동이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차이점은 항일 투쟁의 주체가 농민이냐, 양반 유생이냐에서 갈렸다. 의병운동에 참여한 양반은 서훈이 되고, 2차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항일 농민은 서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불공평과 모순은 시정되어야 한다.  

국가보훈처 공훈발굴과는 즉각 독립유공 서훈 내규 개정위원회를 만들어 내규를 개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이후에 나온 수많은 한말 의병 연구와 동학농민혁명 연구 성과가 내규 개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필자의 주장과 의견이 다른 독립유공 심사에 참여하고 있는 심사위원은 언론 매체를 통해 반론을 펴기를 바란다.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한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갑오의병과 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순국한 애국선열의 명예를 진정으로 회복해 드려야 하는 역사적 책무가 우리에게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봉준 최시형 독립유공 서훈 재심 신청서를 들고서, 필자 박용규 2020년 5월 18일에 국가보훈처에 제출함
▲ 전봉준 최시형 독립유공 서훈 재심 신청서를 들고서, 필자 박용규 2020년 5월 18일에 국가보훈처에 제출함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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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가 발간하는 월간지 <독립정신>112호(2020, 7·8월)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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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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