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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6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통로 게시판에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 관련, 피해자를 지지하는 대자보와 메모들이 붙어 있다.
 지난 16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통로 게시판에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 관련, 피해자를 지지하는 대자보와 메모들이 붙어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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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이름에, 얼굴까지 드러내놓고 이야기해야만 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미투 이후 나의 일상은 산산조각 났고, 파괴되었다. 지금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책 <김지은입니다> 64p)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을 고발한 김지은씨는 자신의 책 <김지은입니다>에서 왜 얼굴과 이름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지 밝히고 있다. 그는 먼저 안 전 지사가 '거대 권력'이라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수사를 요청하면 "사건이 덮이거나 내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유명 정치인 수행비서였기 때문에 얼굴을 가리고 성폭력 고발을 했더라도 '숨겨질 수 없다'고 여겼다.

김지은씨는 책 속에서 "블라인드 뒤에서 미투를 한다면 온갖 억측이 사건을 가리고 수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서 "제발 사건에 집중해달라, 제발 제대로 수사해달라, 진행과정을 지켜봐달라 애원하는 마음으로 나를 방송에 드러냈다"고 말했다.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안 전 지사의 성폭력으로부터 벗어났으며 또 다른 피해자를 막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일상은 사라졌다. 대법원 판결이 나올 때까지 재판에만 힘을 쏟았고, 직장에도 다닐 수 없었다. 

미투 운동 관련 구호 중 '가해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가해자가 감옥에 갔음에도 피해자는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김지은씨 역시 그랬다. 

안 전 지사 측은 공개적으로 김지은씨의 행실이 부적절했다고 비난했고, 측근들은 인터넷상에 김지은씨를 향한 욕설이나 비방 댓글을 달았다. 언론들은 안 전 지사 측 변호인의 주장을 실시간 속보로 보도했다. 김지은씨가 한 명의 노동자로서 사회생활을 하기에 어려운 상황을 만든 것이다.

피해자가 얼굴을 공개한다는 것
 
지금은 우리가 함께해야 할 시간 '미투' 세계 여성의 날인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3.8 여성의 날 민주노총 전국 여성노동자대회에서 주최 측이 참가자들과 시민들에게 나눠주기 위한 미투 배지가 진열돼 있다.
 2018년 3월에 열린 민주노총 전국 여성노동자대회에서 주최 측이 참가자들과 시민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미투 배지를 진열해놓았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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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피해자'라는 이유만으로 감당해야 하는 비난이 큰 사회에서는, 얼굴을 드러내고 자신의 피해를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다. 김지은씨 역시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판단에서 방송 출연을 결정했다. 그러나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피해자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대해서, '떳떳하면 나와서 이야기하라'는 일각의 공격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 21일 <뉴시스>는 '피해자가 2차 기자회견에 가지 않는다'는 내용의 보도를 했다. 그러자 포털사이트 다음에서는 2차 가해성 댓글이 쏟아졌다. 베스트 댓글을 살펴보면 욕설을 포함해 전부 피해자에 대한 의심과 비난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안희정처럼 아예 나와서 밝히지. 찔끔찔끔 뭐야." (찬성 1302, 22일 오전 11시 기준)
"미투라며 장난해?" (찬성 2072)
"떳떳하면 나와라. 정말 성추행을 4년간 당했다면 누구나 그 상처를 위로해줄 것이다." (찬성 6107)


2018년, 서지현 검사가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자신의 성폭력 피해를 세상에 알린 이후, 한국에서도 미투 운동이 가속화됐다. 이어서 김지은씨, 유도 선수 신유용씨 등도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고 성폭력을 고발해 주목을 받았다. 자신의 시를 통해 고은 시인의 과거 성추행 의혹을 제기한 최영미 시인도 있었다. 이렇다보니 피해자가 신분을 밝히는 경우에만 '미투'인 것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그러나 정치인이나 연예인을 성폭력 가해자로 고발했던 상당수의 '미투'에서 피해자들은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았으며, 전 세계적인 미투 운동을 촉발한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성폭력 사건에서도 피해자들이 신분을 숨기거나, 재판 과정에 들어선 뒤에야 신분을 공개한 경우도 있다.

미투(#MeToo)는 '나도 고발한다'는 뜻이다. 미투 운동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거나 유명한 여성들이 공개적으로 성폭력 고발에 나섰고, 이로 인해 대중의 지지와 신뢰를 얻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미투의 본질은 '고발'이며, 나아가 그 고발을 지지해주면서 함께 하는 것은 '연대(WithYou)'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미투가 아니라고 말하거나, '정정당당하게 나서라'며 불신을 드러내는 것은 성폭력 사건을 바라보는 비뚤어진 인식에 불과하다.

피해자가 방송에 공개되는 방식이 일반적인 성폭력 고발 방식으로 굳어지면 안 된다는 우려의 목소리는 이전부터 있었다. <미디어오늘>은 'JTBC 미투보도 그 명과 암'이라는 기사(2018년 3월 19일)에서 "피해자를 전면에 세우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미투' 고발만이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생각을 굳힌다는 것이다. 이는 성폭력 고발 이후 2차 피해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고발을 하려는 피해자들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미투 운동을 촉발시키면서 사회 곳곳의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시킨 JTBC 보도에 현 상황의 책임을 모두 전가할 수는 없다. 그때부터 2년 4개월이 지났다. 여전히 '2차 가해'를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고, '실명 미투'만이 제대로 된 성폭력 고발이라고 생각하는 사회 분위기라면, 분명 변화가 필요하다.


 
 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교육관에서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이 열렸다. 왼쪽부터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변호사,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
 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교육관에서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이 열렸다. 왼쪽부터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변호사,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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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전 시장이 생존해있었다면 피해자에게 "나오라"는 요구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양측이 법적인 절차를 밟아나가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쪽 당사자가 존재하지 않는 지금은, 피해자에게만 계속 '직접 나와서 증거를 대보라'는 요구가 끊이지 않는 상황이다. 

피해자는 분명 지금보다 훨씬 스스로를 잘 보호할 수 있는 상황에서 수사나 재판 과정에 임하고 싶었겠지만, 박 전 시장의 사망은 그에게 더 큰 압박이 가해지는 상황을 만들었다. 사실 이미 피해자는 변호인을 통해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다. 피해 증거는 수사기관에 전부 제출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내 성에 안 차서' 혹은 '믿을 수가 없어서' 피해자에게 직접 신분을 드러낸 상태에서 증거를 하나하나 공개하라는 것은 피해자에게 '피해를 검증받으라'고 덫을 놓는 행태나 다름없다.

지난 13일 박 전 시장이 '속옷만 입은 사진'을 메신저로 보내왔다는 피해자의 증언이 나오자, "박 전 시장에게 속옷(러닝 셔츠)은 평상복이었다"는 반박과 조롱이 나왔다. 이처럼 피해 사실을 공개했을 경우 피해의 강도를 제멋대로 판단하는 이들도 많은 데다가, 피해자에게는 여전히 '피해자다움'과 '완전무결함'이 요구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피해자가 자신의 신분을 밝힌 채로 대중 앞에서 증거를 모두 보여줘야 할까?  

앞서 밝혔듯 극심한 2차 가해가 포털 댓글이나 커뮤니티 등에서 끊이지 않고 있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의 2차 가해와 관련해 변호를 맡은 서혜진 변호사(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결과(징역형과 사망)에 대한 책임을 '너 때문이야'라면서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모습이 안 전 지사 사건 때와 매우 유사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서 변호사는 "이대로라면 앞으로 많은 피해자들이 유력 정치인이나 유명한 사람들 상대로는 성폭력 혐의로 고소하기 힘들지 않겠냐"라며 "성폭력에는 '진영'이 없는데 진영의 논리로만 바라보다 보니 2차 가해를 하게 된다. 이 사건 그대로를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박원순'이라는 인물의 특수성을 빼놓고 보자면, 해당 사건은 여성이 4년 동안 위력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며 '거대 권력'을 상대로 한 고소 건이다. 우리 사회는 이미 김지은씨의 경우를 보면서, 피해자의 길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험난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피해자가 고소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는 것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이다.  피해자 측에서 22일 연 2차 기자회견에서 대독된 피해자의 글 중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더 중요하다.

"저는 기다리겠습니다. 그 어떠한 편견도 없이 적법하고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과정이 밝혀지기를. 본질이 아닌 문제에 대해 논점을 흐리지 않고 밝혀진 진실에 함께 집중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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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마이뉴스 박정훈 기자입니다. stargazer@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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