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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얼굴 좀 보자는 지인의 카톡이 왔다. 마침 다른 볼 일이 있기도 했거니와 왠지 정리되지 않은 꺼림칙함이 올라와 다음에 보잔 말로 답을 했다. 그리고는 식탁에 앉아 집안을 둘러보는데, 문득 우리 집의 휑한 살림살이가 참 내 성품을 많이 닮았구나 싶었다.

어려서부터 호, 불호가 강한 나는 불호인 사람들, 관계들을 내 시야에 좀처럼 두지 않으려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결정을 앞두고 주저하는 우유부단을 싫어했고, 아니다 싶으면 뾰족한 수가 없으면서도 직장을 때려치우고 그랬다. 중간의 애매함을 버텨야 할 이유를 잘 알지 못했거나 버틸 정도로 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무심히 둘러본 우리 집의 살림살이도 그런 나를 꼭 닮아 있음을 알아챈 것이다. 시끄러운 TV도 과감히 퇴출시킨 지 오래되었고, 전자파 우려되는 전자레인지를 없앤 지는 15년이 넘어간다. 안방에 싱글 침대 2개 놓은 지도 얼마 안 된다. 그전까지는 안방 문을 열면 마주 보이는 붙박이장 빼고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미니멀리즘을 추구해서가 아니라 태생적으로 그런 성품인 거다. 뭔가 그득하면 괜히 답답하고 신경이 쓰여서.

식탁을 놓아둔 한쪽 벽면도 위아래로 휑하다. 가족사진이든, 그림이든 두려면 얼마든지 둘 수 있겠으나, 어차피 가족들은 다 아는 기억인데 누굴 보여주려고 그러나 싶어 멋쩍기도 했다. 한참 유행하던 에어프라이기는 주변에서 다들 좋다 해도 들일 마음이 나지 않았다. 꼭 필요치 않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기회가 오면 미련 없이 처분하고, 있으면 편리하겠지만 없어도 그만인 새 물품들은 굳이 두지 않는 게 속이 편했다. 
 
  필요한 것만 갖춰놓는 성품은 맺고 있는 관계에, 살림살이에, 심지어 글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필요한 것만 갖춰놓는 성품은 맺고 있는 관계에, 살림살이에, 심지어 글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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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꼭 필요한 것들만 두다 보니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천으로 된 벽장식들 등이 주는 아늑함따위는 우리 집엔 없다. 남편은 가끔 귀가할 때 그런다. 또 다른 오피스로 출근하는 기분이라고. 사실 글을 쓰는 나에게 집은 작업실이기도 하니 뭐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놀라운 건, 글에도 이런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점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써야겠는데, 그 이야기에 생생함을 더하고 마음을 울리게 하는 섬세한 사유에 약하다. 예를 들면, 1 더하기 1은 2인 이야기를 하는데, 누구는 그 당연한 이야기를 맛깔스러운 비유로 생기를 입히고, 또 누구는 그 당연한 이야기를 여운을 남기는 일화로 잔잔히 스며들게 만든다. 통찰의 힘도 물론 있겠지만, 섬세한 사유와 스타일리시한 표현의 덕분이 아닐까 싶다. 나는 그저 '1 더하기 1은 2입니다' 하면 그만인데 말이다.

군더더기의 여지를 주지 않는 나의 성품이 고대로 드러나는 이 건조한 글쓰기를 어째야 하나... 글쓰기를 계속 하긴 할 수 있으려나 심히 이만 저만 우려스러운 게 아니다. 그간 호, 불호를 내세우며 단순하고 거침없이 살아온 게 이제 와서 괜히 못마땅해진다. 왜 진작 좀 더 섬세하게 여지를 두어 살지 못했나 자꾸 삶을 뒤돌아 보느라 선뜻 앞으로 나아가질 못한다. 

섬세한 사유의 결핍에 대해 스스로를 밤낮으로 괴롭히던 즈음, 그래도 계속 써 보려는 긍정의 마음을 갖게 하는 반가운 증거를 찾아냈다. 그간 호, 불호만 내세우며 내 방식대로만 살아온 줄 알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불호가 되었어도 끊어내지 못한 중요한 관계가 있었다. 바로 남편이다.

오래된 부부 사이에 우여곡절 사연이 없기가 드물듯, 나도 한때는 그만 갈라서자고 절박하게 애원했던 적이 있었다. 남편은 그야말로 철벽이었다. 애원은 철벽에 부딪쳐 다시 내게 돌아와 시간과 함께 스러졌을 뿐이다.

다행히 그 와중에 어떻게든 납득해 보려고 이리, 저리 머리를 굴려보고, 또 헤아려 보았던 시간들이 결국 내게 남았던 것 같다. 이제 보니 나를 버텨 준 남편이 좀 고맙기는 하다. 덕분에 어중간한 상태에서 생각을 여러 갈래로 뻗어 본 전력을 찾았으니 글쓰기에서도 섬세한 사유의 연마가 아직 가능할 수 있다는 증거로 보여 반갑다. 

남편밖에 없겠지 했는데, 찾아보니 여지를 두고 버틴 관계가 또 있다. 오랜 지인인데, 한동안 같이 일을 하다가 오해가 있어 잠시 갈등을 빚었던 적이 있다. 믿었던 분이라서 적잖이 실망한 마음이 쉬이 회복되지 않아 '아, 이제 이분과도 끝인가 보다' 했더랬다. 

그런데 막상 함께 하던 일이 끝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뵙게 되자, 예전 갈등은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오랜 시간 나눠온 정만 남아 반갑고 정겨웠다. 갈등이 있을 때에 공연히 경거망동하지 않은 건, 남편과의 경험에서 나도 모르게 훈련된, 버티며 여러 갈래로 헤아려 보기의 힘 덕분일지도 모른다. 

여지를 두지 않고 확실하게 뭔가를 가르는 성품은 분명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 주저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지 않고 주도적으로 속도감 있게 일을 진행할 수 있다. 또, 삶이 단순하니 원하는 곳에 에너지를 집중해서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복잡한 세상살이를 내 입맛대로 맞춰 살기는 요원한 일이다. 새로운 일이나 관계를 만나 성품대로 못해 답답하고 고통스럽지만, 버티다 보면 그 새로운 경험으로 인해 익히고 배우는 좋은 점들이 분명히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김혜령은 책 <내 마음을 돌보는 시간>에서 위기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 믿을 만한 내가 되어가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개인은 모든 자발적 활동을 통해 세계를 받아들인다. 자발적 활동의 경험들은 대개 고통을 수반하기 마련이지만 그 과정에서 자아는 온전해지고, 더 강해지며 더 단단해진다.

결국 내게 주어진 시간을 자발적으로 누리고 충실하게 살아낸다는 것은 어떤 괴로움이든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게 일상을 적극적으로 살아냈던 시간들이 모여 위기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 믿을 만한 내가 되어가는 것'이라고. 

글을 계속 쓰고 싶은 욕심에 스스로를 또 한 번 깊이 들여다 보았다. 본래 가진 성품을 알아채고 받아들이고자 노력하며, 아쉬운 부분, 약한 부분은 괴롭지만 마주하고, 향상시키고자 의지를 가져본다. 혹여 스스로의 이해가 깊고 단단해져 믿을 만한 내가 되면, 남편도, 내게 불호의 사람들도 언젠가는 편안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가는 길이 괴로워 몇 번이고 넘어질지언정 멈추지 말고 부디 다시 일어나 그 여정을 지속할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조용히 다짐해 본다.

덧붙이는 글 | 기자의 브런치에도 같이 실립니다.


태그:#자기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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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궁금한 게 많아 책에서, 사람들에게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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