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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당기념관에 걸린 사진들. 독립운동에 목숨과 재산을 바친 우당을 비롯한 여섯 형제가 나와 있다.
 우당기념관에 걸린 사진들. 독립운동에 목숨과 재산을 바친 우당을 비롯한 여섯 형제가 나와 있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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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 형제들의 우애는 남달랐다. 어렸을 적부터 우애가 깊었기에 뒷날 6형제가 한마음으로 모든 재산을 팔아 망명길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선생의 집안은 6형제로 번성한 가족이었다. 형제 모두가 화합하고 즐거워하여 그 우애가 마치 악기를 서로 맞춰 연주하듯 즐거웠고, 산앵두나무의 만개한 꽃과 같이 화사하였으니, 온 집안이 즐거운 기운이 가득찼고 형제간의 우애의 소문이 온 서울 시내에서 으뜸이었다. (주석 6)

우애와 개성은 다르다. 아무리 우애 깊은 형제라도 개성과 성향이 같을순 없을 것이다. 특히 넷째형 이회영과 다섯째인 이시영은 두 살 터울인데도 생각하는 방향과 청소년 시절에 걷는 길이 확연히 달랐다. 이회영 역시 유가의 전통에서 성리학을 공부하며 성장하지만 다른 형제들과는 크게 달랐다. 이회영에 관한 평가이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혁명적 소질이 풍부하여 사회 통념을 뛰어넘는 과감한 행동으로 그의 친척들과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집안에 거느리고 있던 종들을 자유민으로 풀어주기도 했고, 더 나아가 남의 집 종들에게도 높임말을 쓰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당시의 양반들이나 판서의 집안 자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당치않은 짓'이었다. (주석 7)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할아버지인 우당을 가리키고 있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할아버지인 우당을 가리키고 있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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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이 소년 급제하고 관계에 진출하여 중앙정계의 요직을 두루 거칠 때, 그의 넷째형 이회영은 과거 같은 것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서양의 신지식을 배우고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천품과 성격을 지닌 선생은 소년 시절부터 진취적이어서 옛 경전을 공부하기보다는 서구의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기를 좋아하였다. 이 때문에 봉건제도의 계급적인 구속과 형식적인 인습을 싫어하였다. 그래서 선생의 가정적인 분위기나 사회적인 환경으로 볼 때 당연히 관계에 투신할 입장이었지만, 선생은 조금도 벼슬길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당시의 부패한 관계(官界)를 원수 보듯이 싫어하였다. (주석 8)
 
이회영과 이시영의 생각과 진로를 갈라놓은 것은 양명학이었다. 이들의 집안은 이건창ㆍ이건방 등 당대의 양명학자들과 오래 전부터 세교(世交)가 이루어졌다.

당시 이회영 집안은 양명학자 이건승ㆍ홍승헌ㆍ정원하 집안과 세교가 돈독하였다. 이회영 가문이 교유했던 집안들 역시 당시 쟁쟁한 명문거족이었다. 이건승 가문은 이건창ㆍ이건방 등 쟁쟁한 학자를 배출한 가문이며, 홍승헌은 이계 홍양호의 5대 증손이었다.(…) 정원하 가문은 바로 한국 양명학 곧 강화학(江華學)의 거두이며 숙종ㆍ경종ㆍ영조 삼조빈사(三朝賓師)의 영예를 누린 하곡 정제두를 배출한 집안이었다. 이건승ㆍ홍승헌ㆍ정원하는 모두 이회영 가문과 마찬가지로 만주로 망명한 우국지사들이었다. (주석 9)

양명학에 천착한 이들은 "일의 성패를 문제 삼지 않고 동기의 순수성 여부가 문제일 따름이라고 한 왕양명의 가르침, 시작과 끝을 오직 진실과 양심에 호소할 뿐, 성패를 묻지 않는 강화학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였다. 
  
우당 이회영 선생 우당 이회영 선생
▲ 우당 이회영 선생 우당 이회영 선생
ⓒ 우당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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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과 이상설 등 일군의 의식청년들은 성리학의 적폐에서 벗어나 점차 기울어져가는 국가의 명운을 살리기 위해 양명학을 탐구하고 이를 실천이념으로 수용하였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치지'는 지식을 닦는 것에 머물지 않고 지(知)를 실현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실천하였다.

이들은 양명사상에 따라 『대학(大學)』에 나오는 '친민(親民)'을 주자학에서처럼 '신민(新民)' 즉 "백성을 새롭게 한다"고 해석하지 않고 "백성을 친하게 한다"고 그대로 해석하고 실천하였다.
 
이시영이 성리학으로 급제하고 충군사상으로 조선왕조에 출사하고서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주권재민의 헌법(약헌)을 만들고, 이후 민주공화주의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형 이회영과 그의 친구 이상설 등으로부터 양명학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이시영과 비슷한 시기에 급제하고 출사한 인물들 중 국치 후 총독부 관리로 전향하거나 시국의 격랑에 묻히게 되고, 공화주의자로 변신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주석
6> 김명섭, 『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 14쪽, 역사공간, 2008.
7> 앞의 책, 16쪽.
8> 이완희, 『보재 이상설선생 전기초』, 21쪽, 1976.
9> 이정규, 『우당 이회영 약전』, 21~22쪽, 을유문화사, 1985.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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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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