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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뜨겁게 올라가던 한낮 열기를 한풀 식혀주는 시원한 아침 빗소리가 반갑다. 마침 시원할 때에 얼른 집안일을 해치워야 한다는 분주한 마음으로 세탁실이며, 베란다며, 이리 저리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문득 욕실 거울에 비친 나에게 시선이 멈춘다. 밤 사이 주름들이 더 굵어지지나 않았는지, 숱이 성긴 가운데 머리의 동정은 어떤지 살펴본다. 

나이가 든다는 건, 가졌던 뭔가를 잃어가는 데에 익숙해지는 시간이다. 자잘한 기억들을 잃어가고, 튼튼했던 관절과 달콤했던 깊은 잠도 서서히 잃어가며, 뜨거웠던 체온마저 식어간다. 당연하게 가지고 누렸던 많은 것들을 천천히 잃어가는 시간이다.

그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상실은 바로 머리카락들이다. 거울을 보며 두피를 빈틈없이 채웠던 촘촘한 머리카락들이 정말 그 자리에 있기나 했던가 싶다.

카톡으로 받은 사진, 시선 잡아끈 정수리
 
   나이듦이란,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을 천천히 잃어가는데에 익숙해지는 게 아닐까...
  나이듦이란,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을 천천히 잃어가는데에 익숙해지는 게 아닐까...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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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 동네 축제에서 아이들에게 전통놀이를 소개하는 부스를 맡아 운영했다. 아이들과 딱지 접고, 제기 차고, 긴 줄넘기도 넘으며 놀이에 빠져 있던 나를 지인이 멀리서 사진을 찍어주셨다. 카톡으로 보내준 사진을 보니 희끄무레한 정수리가 시선에 확 들어왔다.

어머나! 평상시에도 정수리 쪽 가운데 머리숱이 없는 줄 익히 알고는 있었으나 몇 년 사이 탈모가 더 진행되었는지 휑하게 드러난 부분은 충격이었다. 그나마 가르마의 방향을 바꿔 숱이 좀 많은 옆머리로 썰렁한 가운데를 잘 덮고 있다고 여겼는데.

거울을 보며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치켜뜨고 뒤편 머리를 조금이라도 굳이 앞쪽으로 쓸어 보내는 응급조치랄 것도 없는 걸 했다. 스스로 애잔했다.
 
큰아이 출산 후 호르몬 변화 때문인지, 몸이 안 좋았는지, 한동안 머리카락이 매일 한 움큼씩 빠졌다. 두피를 손가락으로 누르면 아프고, 모발도 얇아져 뚝뚝 끊어지기 다반사였다. 머리를 감을라치면 욕실 배수구를 뒤덮는 검은 머리 뭉치가 무서웠지만, 젊다고 자만했고, 아이들 키우는데 여유가 없어 치료는 생각도 안했다.

그렇게 잊고 살다가 동네 아이들에게 영어 가르치는 일을 몇 년 했는데 신경이 많이 쓰였는지 다시 왕창 빠졌다. 이젠 머리를 조금만 들추면 허연 두피 언덕이 선명하게 확인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수리 머리숱을 잃은 대가로 내가 얻은 것은 무엇인지, 얻은 게 있기나 한 건지 가만히 셈해 본다. 잃은 게 있으면 분명 얻은 것도 있을 터이니.

크리스마스를 맞은 가난한 아내가 탐스러운 긴 머리카락을 팔아 남편의 시계줄을 선물로 마련했다던 오헨리의 단편이 떠오른다. 남편에 대한 사랑이 충만하지 않다면 외모에 민감한 젊은 여인이 윤기 있는 탐스러운 긴 머리를 뎅강 자르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사랑으로 가능한 일이다.

돈을 받고 판 건 아니지만 나는 머리숱을 기꺼이 잃으며 아이들을 키웠다. 내 삶에 등장한 여린 생명들이 경이로워 원 없이 사랑을 퍼부었고 되받았다. 나의 온 에너지와 노력과 시간을 내가 아닌 다른 존재에게 쏟아부었던 첫 경험. 그야말로 타인을 위해 애정 어린 자발적 희생이 가능하다는 것, 희생하고도 행복할 수 있음을 덕분에 알게 되었다.

동네 아이들은 돈을 벌기 위한 일로 만나기는 했지만, 한 번 엄마가 되어 보니 그 아이들도 한 명 한 명 한없는 사랑을 받을 존재들로 보였다. 아이들의 마음이 편치 않은 채 나에게 올 땐 마음이 쓰였다. 녀석들의 다사다난한 일상을 들어주고자 노력했고, 잔소리지만 따뜻하게 하려고 했다.

일은 그만두었지만, 그때 만났던 동네 아이들 덕분에 내 자식뿐 아니라 주변 또래 아이들에게도 내가 할 수 있는 바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스며들게 된 것 같다. 동네 축제에서 전통놀이 부스를 맡은 마음도 그런 마음이었을 게다. 머리숱을 잃으며 아이들을 키우고 돈만 번 줄 알았는데, 그 시간들이 내 안의 사랑을 키운 귀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이 정도면 전 국민의 고민, 탈모

탈모가 나만 고민인가 싶었는데, 이야기를 꺼내보니 탈모 걱정에서 자유로운 지인이 거의 없다. 누구는 모발 영양제를 독일에서 직구해서 복용한다 하고, 누구는 탈모 방지 샴푸를 권하고, 누구는 검은콩과 호두 등 좋다는 음식을 이야기한다.

청결하게 유지하고, 두드리는 마사지를 하고, 과음하지 말며 금연 또한 필수란다. 탈모 치료에 관한 한 우리나라에서 K병원이 제일 잘하는데 예약이 밀려 4개월은 기다려야 한단다. 효과를 보장한다는 병원들의 광고도 여기저기 넘쳐난다. 이 정도면 탈모는 가히 국민 걱정이라 할 만하다.

걱정은 하면서도 치료법에 별 관심은 가지지 않는 게으른 나지만, 대책은 마련해야 할 것 같다. 정수리 뒤쪽, 옆쪽 머리를 앞쪽으로 쓸어 넘기고 넘기다 결국 한계에 도달할 날이 올 테니까. 가발은 아무리 잘 써도 표가 나고, 더울 것 같아서 그리 당기지 않는다.

그런데 조원희 작가의 그림책 <중요한 문제>에 힌트가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원형탈모가 나타난 수영강사는 의사의 심각한 처방을 받아들고 그대로 따라 하려고 애쓰지만 결국엔 머리를 밀어버림으로써 머리숱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진다. 때가 되면 나도 과감히 머리나 밀어버릴까.

덧붙이는 글 | 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려 있습니다.


태그:#나이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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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궁금한 게 많아 책에서, 사람들에게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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