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3 08:32최종 업데이트 20.07.13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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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까르띠에(Cartier)'라는 브랜드를 마주하면 '보석'이 먼저 떠오릅니다. 까르띠에는 1847년 '루이 프랑수와 까르띠에(Louis Francois Cartier)'가 설립해 17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왕의 보석상'이란 애칭으로 더 유명한 프랑스 명품 브랜드입니다.

보통 까르띠에라 하면 주얼리를 주력으로 하고, 시계와 향수 등을 같이 만드는 브랜드로만 알고 있는데, 볼펜, 만년필과 같은 필기구도 생산합니다. 몽블랑, 펠리칸, 파카, 워터맨, 그라폰, 라미, 오로라, 몬테그라파 등등 많은 필기구 전문 생산업체가 확고히 영역을 구축해 일반인들에게 덜 알려졌습니다만, 펜 좋아하는 이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럴싸한 디자인으로 눈을 현혹하는 데 그치는 브랜드가 아니라는 걸 말이지요.

펜 한 자루도 예술작품처럼

우리는 일상에서 어떤 귀한 사물을 마주했을 때 '마치 보석 같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보석'의 사전적 의미는 '빛깔과 광택이 아름다워 장식물로 이용하는 광물'이란 뜻이며, 그 가치는 희귀성에서 나옵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4000종 이상 광물 중 극소수인 50여 종에만 보석이란 이름이 허락됩니다.


주얼리로 시작한 까르띠에는 1888년 시계로 발을 넓히고, 1938년 '까르띠에 향수(Parfums Cartier)'로 명성을 공고히 해왔습니다. 필기구 전문 브랜드가 팔리는 펜을 만드는 데 주력한다면, 까르띠에는 펜 한 자루도 예술작품처럼 빚어낸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생산품은 팔려야 의미가 있습니다만, 까르띠에는 보석을 세공하듯 필기구 한 자루에도 기능성 이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공을 들입니다. 필기구 전문 업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역사는 짧지만, 펜 한 자루에 미적 가치를 담는 데는 밀리지 않습니다.

까르띠에는 시계와 보석으로 유명한 '피아제(Piaget)', 세계 4대 시계 브랜드 중 하나로 손꼽히는 '바쉐론 콘스탄틴(Vacheron Constantin)', 최고의 만년필 생산 업체로 우뚝 선 '몽블랑(Montblanc)' 등과 함께, 스위스 다국적 기업 '리치몬트(Richemont)' 그룹에 속해 있습니다.
 

까르띠에(Cartier) ⓒ Unsplash


통상 만년필 브랜드 완성도를 가름할 때, 펜촉을 자체 생산하느냐 아니면 아웃소싱 하느냐로 구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유명세가 비슷한 돈가스 맛집이 둘 있다 가정할 때, 이왕이면 소스를 자체 제조하는 집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 거지요.

맛의 차이를 구분하긴 힘들지만, 아무래도 매일 아침 신선한 재료로 일정량만 만들어내는 소스가, 공장에서 대량 생산해 비닐팩에 담겨오는 그것보다 더 좋을 거라 여기는 것도 일리 있습니다.

거기에는 진정한 맛집이라면 적어도 소스를 직접 만들어야 얼굴이 서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깔려 있습니다. 물론 공장에서 대량생산하는 소스가 더 균일한 맛을 낼 수도, 보다 위생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음식의 맛은 사람 손에서 완성되는 만큼,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았을 거라 생각해 플러스 점수를 주게 됩니다.

똑같은 케이스는 아니지만, 만년필 펜촉도 이런 관점에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독일의 '복(Bock)社'가 세계에서 가장 체계화된 닙 전문 생산 업체인 건 맞지만, 그래도 만년필의 핵심인 펜촉을 자체 생산하지 않는다면 뭔가 중요한 것 하나를 놓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거지요.

만년필 사용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만년필의 핵심 부속은 펜촉입니다. '캡(Cap: 뚜껑)'과 '배럴(Barrel: 몸통)'이 없어도 쓰기 곤란하지만, 펜촉이 없으면 아예 사용할 수 없습니다. 축구의 스트라이커, 야구의 4번타자와 같습니다.

만년필 펜촉은 '규모의 경제'가 일정 부분 영향력을 미치는 영역입니다. 규모의 경제는 초기 비용을 투입해 일단 어느 정도 시스템을 갖추면, 생산량이 증가할수록 비용을 낮출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문제는 모든 만년필 생산업체가 몽블랑처럼 대형화되어 있지 않기에, 펜촉 생산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 자체가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적잖이 들어갈 초기 투자 비용은 제조사에게 큰 부담일 수 있습니다. 믿을 만한 업체에 펜촉 생산을 맡기고, 나머지 디자인, 제품개발, 마케팅 등에 역량을 집중하는 전략을 쓰는 거지요. 작은 업체 입장에서, 효율적인 측면만 보면 이게 더 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년필은 사람이 손에 쥐고 쓰는, 일상생활의 필수품이라기보단 지극히 감성의 영역에 있는 도구입니다.

돌고 돌아 안착한 제조사도 있습니다. 1832년 독일 하노버의 작은 공방에서 시작한 펠리칸은 화방 도구와 잉크를 생산해오다 1929년 첫 만년필을 시장에 내놨습니다. 초창기 펠리칸은 몽블랑에서 닙을 받아 사용했지만, 어느 순간 자체 생산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1997년부터 '복(Bock)社'의 것을 쓰다, 2000년대 중반에 와 다시 자체 생산으로 선회했습니다.

굳이 직선도로를 마다하고 우회 도로를 택한 이유가 분명 있을 터입니다. 아니다 싶을 때가 가장 빠른 순간일 수 있습니다. 물론 펜촉을 자체 생산하지 않고도 탄탄대로를 걷는 업체도 많습니다. 하지만 자체 생산하는데도 저물어가는 곳은 드뭅니다. 마치 반도체 핵심 소재인 '포토레지스트(Photoresist)'를 스스로 생산할 능력을 갖춰야 기술 자립도 면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까르띠에는 리치몬트그룹 휘하 같은 계열사인 몽블랑으로부터 펜촉을 공급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몽블랑은 펜촉을 자체 생산하는 업체 중 하나일 뿐 아니라, 현 필기구계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업체입니다. 그저 브랜드 로고만 달았을 뿐, 만년필은 까르띠에의 주력 업종이 아니니 구색만 갖췄을 거라 생각했던 이들이, 기가 막힌 필기감이라며 감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추락해 펜촉이 꺾인 까르띠에 디아볼로 블랙 F촉 

만년필 모델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펜을 이해하기 쉬운 경우가 많습니다. 캡탑이 비스듬히 잘려 반구의 형상을 한 워터맨의 '헤미스피어(Hemisphere)'가 그렇고, 배럴이 주름진 플래티넘의 '게더드(Gathered)'가 그렇습니다. 배럴에 링이 장식된 그라폰의 '아넬로(Anello)'가 그렇고, 오각형 몸체를 가진 비스콘티의 '펜타곤(Pentagon)'이 그런 것처럼 까르띠에 라인 중 하나인 '디아볼로(Diabolo)'는 팽이를 의미합니다.

캡탑 상단부에 박힌 사파이어가 마치 팽이를 뒤집어 놓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어 이런 이름을 붙인 게 아닐까 싶습니다. 몰라도 즐겁지만,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게 만년필입니다.

사파이어는 9월의 탄생석이며, 청색을 의미하는 라틴어 '사파이러스(Sapphirus)'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변치 않는 사랑을 의미해 결혼 45주년 선물로도 쓰입니다. 사파이어가 신비로움을 자아내긴 하지만, 캡탑을 제외한 디아볼로의 나머지 부분은 그리 화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은은함이 이 펜의 매력입니다. 오래 봐도 질리지 않습니다.

금이 간 캡에 접착제를 발라서까지 써온 펜이라면, 평소 얼마나 이쁨을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애착하는 펜은 금전적인 가치를 떠나 소중합니다.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입니다. 뭘 해도 이뻐 보이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무조건 좋은 펜이 있습니다. 접착제로 안 되면 테이프를 친친 감아서라도 어떻게든 버리고 싶지 않은 펜이 있습니다. 이 펜처럼 말이지요.
 

까르띠에 디아볼로 블랙 F촉 - 사용자가 접착제로 자가 수리한 캡. ⓒ 김덕래


이 만년필이 어느 펜보다 귀한 이유는, 그저 유명 브랜드의 이름표를 달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쓰는 이의 손때가 진하게 묻어 있어서입니다. 다소 외형이 험해도 그것은 흉터가 아니라 세월입니다. ​

자가 수리해 울퉁불퉁한 캡이 더 근사합니다. 마치 내 이름을 각인한 것처럼 세상에 유일무이한 펜입니다. 그래서 손대지 않았습니다. 최고의 수리는 내 펜을 내가 손보는 것입니다. 내가 하기엔 도저히 무리다 싶을 때 다른 이의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마무리가 매끈하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습니다.

이 펜은 생산된 지 20년이 훌쩍 넘은 모델입니다. 사람의 1년이 강아지에겐 15년과 같다 합니다. 만년필의 20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입니다. 만년필이란 도구의 전체적인 생명력을 기준으로 하면 아직 어린아이인 셈이고, 20년 동안 이 펜으로 써낸 이야기와 담긴 사연이 많다면 청년일 수도, 혹은 장년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키우던 강아지가 나이 들어 병에 걸렸다고 길가에 슬쩍 버려두고 오지 않는 것처럼, 여기저기 삐거덕 거리는 만년필도 쉽게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강아지를 키워보지 않은 사람은, 내게 달려와 살갑게 안기는 생명체와의 교감에서 오는 포근함을 알지 못합니다.

오래 써 이미 나와 하나가 된 만년필과의 의리를, 한발 떨어져 있는 사람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정도로 망가졌으면 버리고 새것을 사면 되지 않냐'라고 말하는 게 귀에 들어오지 않는 건 너무 당연합니다.

추락하며 펜촉이 꺾였습니다. 하지만 살릴 수 있습니다. 분해 후 세척한 다음, 한발 한발 내딛다 보면 종국엔 끝이 보입니다. 마음을 조급히 먹어봤자, 빨리 가는 건 내 시계뿐입니다.

펜을 고쳐서 쓴다는 것
 

추락의 충격으로 틀어져버린 펜촉. ⓒ 김덕래

  

완전분해한 까르띠에 디아볼로 만년필. ⓒ 김덕래

 
손봐진 펜을 테스트할 땐, 그저 끊기느냐 아니냐가 전부는 아닙니다. 나오더라도 얼마나 매끈한지, 여러 방향으로 그었을 때 균일한지, 촉에 맞는 적당한 굵기인지가 중요합니다.

흡수율이 서로 다른 여러 종이에 그어보며 테스트해야 합니다. 직업과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존중받아야 마땅한 것처럼, 금액의 많고 적음을 떠나 모든 펜은 다 잘 나와야 합니다. 저렴한 펜은 잘 안 나와도 그럴 수 있고, 값나가는 펜이기에 절대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되는 게 아닙니다.

만년필은 눈으로 첫 맛을 보고, 손에 쥐어 보다 확실한 손맛을 느낀 다음, 종이에 쓰며 필기감이라는 종국의 맛을 음미하는 도구입니다. 손이 작아도 몸통 둘레가 굵은 펜을 좋아하는 이도 있고,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남성은 무조건 묵직한 펜을 좋아하고, 여성은 가느다란 펜을 좋아할 거라는 건 편견입니다. 씨름선수처럼 덩치가 커도 손에 쏙 들어오는 포켓펜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고, 체구가 작은 여성도 금속으로 된 무게감 있는 모델을 즐겨 쓰기도 합니다. 정답이 없는 취향의 문제입니다.

펜을 고쳐서 쓴다는 건, 계속 이어지다 잠깐 멈춘 누군가의 역사를, 그 수레바퀴를 다시 가게 하는 일입니다. 새 펜촉이 보다 완벽할 순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건 다른 펜이지요. 심장이 바뀐 것과 같으니까요. 설령 수리한 흔적이 남더라도 쓰는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살려서 쓰고 싶은 게, 그저 오래되고 낡은 것을 손에서 놓지 않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만년필을 손보는 일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같은 모델, 같은 촉이더라도 한 자루 한 자루가 다 다릅니다. 게다가 쓰는 사람도 다 다르니 변화무쌍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말썽만 부리던 학생이 더 기억에 남는다는 선생님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까다로워 시간을 많이 들인 펜일수록 더 오래 생각납니다. 만년필은 그저 필기만을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이 더 빛나게끔 해주는, 보다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행복 촉진제입니다. 버려질 뻔했던 미끈한 펜 한 자루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내 입꼬리도 따라 올라갑니다.
 

다시 내달릴 준비를 마친 펜. ⓒ 김덕래

  
* 까르띠에(Cartier)
- 1847년 '루이 프랑수와 까르띠에 (Louis Francois Cartier)'가 설립해, '왕의 보석상'이란 애칭으로 더 잘 알려진 프랑스를 대표하는 럭셔리 명품 브랜드.
'피아제(Piaget)', '바쉐론 콘스탄틴(Vacheron Constantin)', '몽블랑(Montblanc)' 등과 함께, 스위스 다국적 기업 '리치몬트(Richemont)' 그룹을 대표하는 브랜드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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