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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위정자들은 옛 이야기를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펴는 일이 잦았다. 조선왕조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사를 거론하면서 현실 문제를 언급하는 신하나 군주를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일례로 정도전은 <조선경국전> 치전(治典) 편에서 "요임금·순임금 시대에는 군주와 신하가 모두 성자였다"라면서 "그래서 함께 당폐(堂陛, 조정)에서 도(都)라 유(兪)라 하면서 태평한 정치를 이뤘다"라고 말했다.

'도'와 '유'는 일종의 감탄사로서 찬성의 뜻을 표시하는 단어였다. 고대 중국의 모범적 시기로 기억되는 요·순 시대엔 군신간에 동의의 말이 오가며 국정을 이끌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도전이 이 고사를 인용한 것은 신생국 조선의 백성들에게 뭔가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요·순 시대에는 군주가 훌륭했기에 신하들과 함께 국정 운영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정도전이 사는 시대에는 군주의 평균적 자질이 부족하므로 자신을 비롯한 철학자들이 전면에 나서고 군주는 뒤로 빠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재상 중심의 정치체제를 표방할 목적을 드러낸 셈이다. 과거 역사를 현실 정치에 끌어들이는 방식은 현재를 긴 역사적 안목으로 조망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역사발전의 패턴을 포착하고 미래의 흐름을 예견하는 효과가 있다. 

그런데, 이런 접근법은 전제조건이 따른다. 역사를 보는 통찰력은 물론이요, 상당 수준의 역사지식을 갖춰야 한다는 점이다. 부정확한 지식으로 과거와 현재를 접목하는 건 현재만 운운하는 것보다 못하다. 엉뚱한 지식으로 역사를 끄집어내면 과거를 잘못 이해하게 됨은 물론, 현재도 제대로 분석할 수 없다.

추미애 저격한 김종인... '바이마르 공화국' 꺼내든 김은혜
 
당선자 총회 참석한 김은혜 미래통합당 김은혜 당선인이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당선자 총회에 참석하고 있다.
 김은혜 미래통합당 대변인. 사진은 지난 4월 28일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당선자 총회에 참석하고 있는 모습.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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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오전, 김은혜 미래통합당 대변인은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을 예로 들면서 2020년 대한민국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추미애 법무부장관의 지휘권을 문제 삼기 위해서였다. 추 장관은 25일 초선 국회의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장관의 말을 겸허히 들으면 좋게 지나갈 일을 새삼 지휘랍시고 일을 더 꼬이게 만들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바이마르공화국을 언급하기 전에 김은혜 대변인은 독일 유학파인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의 코멘트를 먼저 전달했다. "국민들이 여당에 177석을 몰아준 것은 민주주의 기본원칙을 파괴하라고 준 것이 아니다"라며 "다수 의석으로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것은 우리 헌법정신에 맞지 않다"라는 말이 바로 그것. 이를 전한 뒤 김은혜 의원은 "추가적인 보충 설명을 드리겠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1918년에 국민주권·민주공화국 헌법을 내세운 바이마르공화국을 기억하실 듯합니다. 헌법적으로 선출됐지만 다수의 횡포로 패망했습니다. (중략) 우리가 북한보다 우월한 것은 무엇입니까? 대한민국은 법치의 나라라는 점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다수의 원칙이 폭력이 되지 않도록, 자유주의를 보완하는 민주주의를 우리가 보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말한 뒤 추미애 장관을 거론하면서 "다수의 폭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라고 비판했다. 추미애 장관의 지휘권을 다수당의 힘에 기반한 폭력으로 규정하고, 이를 근거로 문재인 정부의 운명을 바이마르공화국의 몰락에 빗댔다. 

바이마르공화국을 아십니까
 
 1919년부터 1928년까지 사용된 바이마르공화국의 문장.
 1919년부터 1928년까지 사용된 바이마르공화국의 문장.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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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제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1919년에 수립된 바이마르공화국은 이 나라의 국호가 아니다. 이 나라의 명칭은 1871년부터 사용된 '독일국'이었다. 하지만 1918년까지의 황제체제와 달리 국민주권국가가 된 1919년 이후를 똑같이 볼 수 없었다. 그래서 1919년 이후를 바이마르공화국으로 구분해서 부른다.

오늘날을 기준으로 할 때, 베를린에서 자동차 도로로 남서쪽 3시간 거리에 바이마르란 곳이 있다. 이곳에서 헌법 제정을 위한 첫 회의가 열렸다. 그래서 바이마르공화국이라는 별칭이 생겼다.

바이마르공화국은 바이마르헌법과 함께 거론되는 일이 잦다. 현대 헌법을 논할 때, 이 헌법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20세기 헌법의 전형으로 손꼽힐 정도로 모범적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가운데,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인간다운 생활권 같은 '사회권'까지 규정하고 있다.

일례로, 바이마르 헌법 제151조은 "경제생활의 질서는 각자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정의의 원칙에 합치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했다. 당시로서는 진보의 첨단을 걷는 헌법이었던 것이다. 성낙인 서울대 교수의 <헌법학>에 이런 대목이 있다.

"사회권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 독일을 이끌었던 우파와, 자본주의의 모순을 혁파하려는 좌파 사이에 하나의 국가공동체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타협적 구조로 성안(成案)된 1919년 바이마르헌법에 최초로 도입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좋은 헌법을 가진 나라였다. 법률제도를 논하는 법학서에서 바이마르란 이름을 자주 접하다 보면, 이 나라에 대한 인상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 그 시대에 이런 헌법을 만들었으니 꽤 괜찮은 나라였겠지 하는 경외감마저 들 수 있다. 하지만 제헌으로부터 14년 뒤에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을 목격하게 될 나라라는 점에 생각이 도달하면, 경외감은 부정적 인식으로 바뀔지 모른다. 

바이마르공화국 패망의 제1원인은 경제난
  
1933년 이후의 히틀러 시대에도 독일국이라는 국호는 계속 사용됐다. 하지만 황제체제나 다름없는 히틀러 시대를 바이마르시대와 똑같이 놓고 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인들은 히틀러의 나라를 편의상 '제3제국'으로 부른다. 962년부터 1806년까지의 신성로마제국이 제1제국,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에 의해 세워진 통일 독일이 제2제국이라는 전제 하에 그렇게 부른다.

바이마르공화국이 히틀러에 의해 불과 14년 만에 종식된 결정적 원인 중 일부는 훌륭한 헌법을 떠받칠 만한 환경과 시스템의 부재였다. 미래통합당의 해석처럼 '다수당의 횡포'로 망한 게 아니었다. 이 나라의 붕괴를 가져온 근본 요인은 패전 이후의 경제난이었다. 서울대 교수들인 민석홍·나종일·윤세철이 1988년에 펴낸 <세계문화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무엇보다도 격심하였던 것은 경제난이었고, 그것은 마르크화의 하락에서 단적으로 나타났다. 전쟁 전에 미화 1달러당 4.2마르크였던 것이 종전 후 계속 그 가치가 하락하더니 1923년 초에는 놀랍게도 미화 1달러가 5만 마르크가 되고, 프랑스의 루르 점령으로 독일 경제가 최악 상태에 빠졌던 동년 12월에는 1달러에 수조억 마르크라는 경이적인 폭락 현상을 빚었다.

우표 한 장이 5000만 마르크였다니,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언어를 절(絶)한 경제난은 자연(히) 사회불안을 야기시키고, 극우와 극좌의 폭동이 연달아 일어났다. 히틀러의 뮌헨에서의 자그마한 폭동도 이때의 일이었다."

 
 1931년 독일 베를린. 군대가 굶주린 시민들을 위해 배급하고 있는 모습.
 1931년 독일 베를린. 군대가 굶주린 시민들을 위해 배급하고 있는 모습.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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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문을 막히게 하는 경제난이 바이마르 체제의 멸망을 부추긴 데 이어, 이 나라의 정치적 역량 부족도 체제 종말을 앞당겼다. 미래통합당은 '다수당의 횡포' 때문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소수당의 난립' 때문에 이 나라는 쇠약해졌다. 다수를 이끌 만한 역량이 결여된 시대였던 것이다. 2015년에 <법과 정책> 제21집 제2호에 실린 이부하 영남대 교수의 논문 '독일 이원정부제에 대한 법정책적 조명'은 당시를 이렇게 평가한다.

"바이마르헌법의 제정자들은 이원정부제의 영향을 받아 평상시에는 의원내각제 형태로 운영하고, 비상시에는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권한 행사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평상시에 군소정당들의 난립으로 정권교체가 잦아졌고 내각의 정치적 불안정이 야기되었으며 비상시에 대통령의 독재로 인하여 바이마르공화국은 몰락하게 되었다."

다수당이 국정을 주도하기 힘들었던 이유를 논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바이마르헌법상 제국의회의 의원은 비례대표제 선거로 선출되었고, 정당의 의회 진입 장벽을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수많은 정당이 의회에 난립하게 되었다. 하나의 정당의 의석 점유율이 압도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타 정당과의 연정이 필수적이었으나, 이해관계가 상이한 정당들의 난립으로 정권교체가 잦아졌고 정치적 불안정이 야기되었다."

이처럼 바이마르공화국의 몰락 원인은 통합당이 말한 것과는 한참 동떨어진다. 통합당이 국민들에게 엉뚱한 역사 지식을 제공한 것이다.

고사 정치? 하려면 제대로, 성의있게

이런 잘못을 소소한 역사지식의 오류로 치부하고 넘어가선 안 된다. 집권여당과 정부를 비판하고 국민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과거 사례를 인용하고자 했다면, 그 과정이 치밀하고 정확했어야 한다. 국민들에게 제공할 정보를 무성의하게 수집해서는 안 된다.

정보를 제대로 수집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변인을 통해 맞지 않는 말을 내보내는 것은, 현상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통합당의 지적 역량에 하자가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국민들에 대한 성의가 부족함을 증명하는 것일 수 있다. 

만약, 혹시라도 통합당이 말한 다수당이 바이마르시대의 여타 정당이 아니라 히틀러의 나치당이었다면? 이는 통합당의 역사인식 능력이 땅바닥에 떨어져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나치당은 지금의 대한민국 집권당과 판이한 환경에서, 판이한 모습으로 탄생하고 존재했다. 지지 기반 역시 크게 다르다.

이런 나치당을, 단순히 '다수'라는 이유만으로 더불어민주당과 등치시키려 한다면 통합당의 역사 이해력이 F학점보다 더 안 좋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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