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우리가 매일 이용하는 교통, 그리고 대중교통에 대한 최신 소식을 전합니다. 가려운 부분은 시원하게 긁어주고, 속터지는 부분은 가차없이 분노하는 칼럼도 써내려갑니다. 교통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전하는 곳, 여기는 <박장식의 환승센터>입니다. - 기자 말   

호남선 KTX나 SRT의 개통으로 약간은 의미가 퇴색된 감은 있지만, 그래도 '서울' 하면 떠오르는 기차역은 단연 서울역이다. 전국 곳곳으로 향하는 기차가 서울역에서 출발할 때마다, 전국에서 서울역으로 향한 열차가 도착할 때마다 사람들이 쏟아져나오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서울역이 원래는 지금처럼 숭례문에 가까운 위치가 아니라 순화동, 궁궐에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900년 개업했던 '서대문정거장'이 진짜 서울의 관문 역할을 했던 것이다. 6월 28일, 제126번째 철도의 날을 기념해 '진짜 경성역'이었던 서대문역과 관련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본다.

경인선의 '진짜 종착역', 경성정거장
 
 경성정거장의 개통 당시 모습.
 경성정거장의 개통 당시 모습.
ⓒ 서울특별시

관련사진보기


1899년 노량진에서 경인선의 제물포 구간이 개통됐다. 그 이후, 1900년 7월 8일을 기해 한강철교가 개통하며 용산역과 남대문역, 그리고 경성정거장이 개업하게 되었다. 지금의 서울역 자리에는 중간역이었던 남대문역이 있었고, 그 곳에서 북쪽으로 1km 정도를 위로 올라오면 나오는 순화동에 경성정거장이 있었다.

지금의 이화외고, 농협중앙회 일대, 그리고 경찰청 앞에 이르기까지가 경성정거장이 차지하고 있는 너른 위치였다. 반대로 당시의 남대문역은 10평짜리 목조 건물 간이역이었고, 도리어 용산역보다도 규모가 작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돈의문과도 100m 정도로 가깝고, 종로와도 가까운 경성정거장에 사람들이 몰린 것이다.

그래서인지 경인선의 개통식 역시 1900년 11월 경성정거장에서 치러졌다. 당시에도 일제의 자본이 상당수 투입되었기에 개통식에는 태극기와 일장기가 함께 휘날렸다는 문헌이 존재한다. 개통식에는 철도원의 총재였던 민병석, 미국·일본공사, 외부대신 등이 참석해 요즈음 못지 않은 성대한 개통식이 치뤄졌단다.

경인선 개통 전에는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이 인천에 도착하면 하루를 무조건 쉬어야 했다. 짐을 역꾼에게 맡기고 마차를 타고 가는 데 적어도 한나절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경인선이 서울 안까지 개통되자 배를 타고 인천에 내린 외국인이 바로 서울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개항 이후 20년 넘게 개화기의 상징이었던 인천의 쇠락이 시작된 것이다.

경성정거장은 대한제국기 중심지 역할을 했던 정동과 서대문 일대의 상징이 되었다. 황제가 살던 덕수궁이 있었으며, 경성정거장 앞에는 '스테이션 호텔'처럼 근대식 호텔도 들어섰다. 권력자들의 집 역시 정동에 자리했고, 여러 국가의 공사관 역시 정동과 서대문 일대에 속속 들어섰다. 그렇게 개화의 현장이 제물포에서 서울로 가까워졌다.

조선 사람은 서대문역, 일본인은 남대문역
 
 1902~1904년 경의 서울 도심의 모습. 왼쪽 서대문 바깥으로 경성정거장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1902~1904년 경의 서울 도심의 모습. 왼쪽 서대문 바깥으로 경성정거장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아카이브

관련사진보기


당초 계획대로라면 경의선 역시 경성역에서 출발해야 했다. 당시의 경의선 노선은 경성정거장에서 무악재, 구파발을 거쳐 벽제와 새말(지금의 금촌)에서 지금의 경의선으로 합류하는 형태였다. 하지만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건설이 어려워 비교적 평지였던 용산에서 서강, 수색을 거쳐 일산 쪽으로 돌아나가는 길을 골랐다.

경부선의 개통으로 천안, 밀양과 동래까지 향하는 열차를 경성의 한복판에서 바로 타게 된 것도 잠시, 경의선이 용산을 거쳐가는 노선으로 개통하자 경성역의 무게감이 크게 줄었다. 그러자 남대문역이 치고 올라왔다. 전차도 개통되어 있으며, 용산까지의 거리도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돈의문 일대는 과거 '새문' 내지는 '서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랬던 '새문'의 지명이 서대문으로 바뀐 것 역시 1905년 경성역이 '경성'의 이름을 잃었을 때 일이다. 4월 11일 황성신문은 경부철도주식회사가 경성역의 이름을 '서대문역'으로 개칭했다고 전한다. 서대문역과 남대문역의 양립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서대문역은 여전히 서울의 관문 노릇을 했다. 바로 전차를 타면 종로로 향할 수 있다는 이점이 여전히 있었고, 외국의 공사관과 영사관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난다 하는 사람들이 서대문역에 가까이 있었다. 조선인들이 많이 살던 곳은 서대문 인근과 서촌 일대라는 점도 사람들이 서대문역까지 가게끔 하는 이유였다.

반면에 일본인들은 남대문이 위치한 태평로와 남산 일대에 많이 살았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조선 사람들은 서대문역에서 기차를 타고 목적지로 향했고, 일본인들은 남대문역에서 기차를 타고 갈 곳에 갔다. 남대문역으로 기능이 상당수 이전되며 열차의 운행 편수가 눈에 띄게 줄어갔지만, 이 흐름은 그대로 이어졌다.

3.1운동에 겁난 일본... 역은 그렇게 사라졌다
 
 서대문정거장이 사라지고, 남대문정거장에서 바로 신의주, 나아가 중국까지 연결되는 철로가 개통되었다. 지금도 경의선 본선으로 남아있는 구간이다.
 서대문정거장이 사라지고, 남대문정거장에서 바로 신의주, 나아가 중국까지 연결되는 철로가 개통되었다. 지금도 경의선 본선으로 남아있는 구간이다.
ⓒ 박장식

관련사진보기


경술국치 이후 일제는 본격적으로 남대문역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켰다. 단선으로 운행했던 종로 - 남대문 - 남대문역 사이의 전차 노선을 복선화시켰다. 또, 서울에서 바로 대륙으로 향하는 노선을 만들고자 남대문에서 아현리, 모래내를 거쳐 수색으로 바로 통하는 새로운 경의선 본선 노선의 건설을 집도하기도 했다. 

그랬던 서대문역이 전환점을 맞게 된 건 3.1운동 때다. 서대문역을 중심으로 3.1운동에 참가하는 지역 사람들이 집결한 것이다. 일제에게는 그저 '조선인들이 이용하는 곳'이었던 서대문역이 큰 위협이 되었다. 이들은 이윽고 서대문역을 없애버리고, 남대문역으로 일원화를 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3월 18일, 일제가 갑작스럽게 이달을 마지막으로 서대문역을 폐역하기로 결정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경의선의 새로운 본선이 아직 완공되기도 전의 일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수색과 남대문을 잇는 직결선 공사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하지만 실제론 3.1운동으로 인한 일제의 두려움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1919년 3월 31일 서대문역은 오후 10시께 그날 막차의 출도착을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당시 매일신보에 따르면 9시 59분께 마지막 열차가 서대문역에 도착했고, 10시 10분에 마지막 열차가 인천으로 출발했다고 전해진다. 오는 열차에는 11명, 가는 열차에는 32명의 마지막 승객을 태웠다.

공원으로, 학교로... 사라진 서대문역의 흔적
 
 지금의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앞에 위치한 서대문정거장 터 표식.
 지금의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앞에 위치한 서대문정거장 터 표식.
ⓒ 박장식

관련사진보기


일제는 폐역 당일에 역 내부의 책걸상을 모두 치우고, 보름만에 서대문역의 내부 집기 등을 정리해 철거공사에 들어갔다. 이윽고 서대문역은 마치 없었던 곳인양 정리되었다.

뒤늦게 1921년 남대문역에서 아현리를 거쳐 경의선으로 직접 이어지는 선로가 개통되었다. 1923년에는 남대문역이 '경성역'의 이름을 가져왔다. 2년 뒤에는 경성역에 휘황찬란한 근대식 건물의 건물이 지어졌다. 그렇게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대문역으로 시작한 서울역은 서울을 대표하는 관문이 되었다.

선로도, 플랫폼도 치워진 역의 자리에는 철도관사가 대거 들어섰다. 철도 직원들을 위해 지어진 관사는 해방 이후 대부분이 철거되었다. 재단법인 이화학원이 1955년 철도관사 부지를 매입했다. 학교의 확장을 위해 철도관사를 철거하고 학교를 확장하는 데 쓴 것이다. 그렇게 경성정거장의 터는 지금의 이화외고 교정이 되었다.

옛 경성정거장이 있던 자리인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정문 앞에는 과거 이곳이 서대문정거장이었음을 알리는 유일한 흔적인 석판이 남아있다. 이마저도 과거 일제가 1930년 만든 '경성순환열차'의 서소문역으로 잘못 적힌 채 경찰청 건너편에 있었다가, 여러 지적을 받아들여 서대문정거장 터임을 알리는 석판으로 수정되어 옮겨진 것이다.

경성정거장이 지금까지 이곳에 있었다면 서울의 풍경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역이 더욱 확장되어 유럽의 여러 유명한 기차역처럼 서울의 랜드마크가 되지는 않았을까. 사람들이 자주 찾는 정동길과 서대문 일대의 모습 역시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가능성이 크다.

28일은 126번째를 맞이하는 철도의 날이다. '내장원 철도국'의 창설일을 기념한 날인데, 서대문정거장은 그 총재가 처음 개통식에 참석한 현장이기도 했다. 버스 안에서, 지하철 안에서 서대문역을 지나게 된다면, 100년 하고도 15년 전, 조선 사람들과 외국 사람들이 커다란 기차 안에서 내리는 풍경을 상상해보는 것은 어떨까.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대중교통 기사도 쓰고, 스포츠와 여행까지, 쓰고 싶은 이야기도 쓰는 사람. 그러면서도 '라디오 고정 게스트'로 나서고 싶은 시민기자. 그리고 자칭 교통 칼럼니스트. - 부동산 개발을 위해 글 쓰는 사람 아닙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