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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는 누군가 자신의 등을 밟고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존재다. 또한 모든 것을 이어주는 존재다. ‘이음과 매개, 변화와 극복’은 자기희생 없인 절대 이뤄질 수 없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옛 다리부터, 최신 초 장대교량까지 발달되어 온 순서로 다룰 예정이다. 이를 통해 공학기술은 물론 인문적 인식 폭을 넓히는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기자말]
판운리 섶다리에서, 산 고개를 넘어 7km 남짓 서쪽으로 가면 면사무소 소재지가 나온다. 영월군 주천면 주천리이다. 현대식 형교(桁橋)인 주천1교 북서 측에 쌍으로 된 섶다리가 놓여 있다.

순박한 마을 사람들이, 주천강에 쌍 섶다리를 공들여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을 잇고 아름다운 마을을 꾸려가려는 주천 사람들의 마음이, 가을 단풍처럼 곱기만 하다. 규모는 판운 섶다리와 유사하다. 쌍 섶다리는, 큰 짐을 실은 우마차도 건널 수 있었다.
 
무더운 한 여름 주천강에 놓인 쌀 섶다리를 건너는 사람들
▲ 주천강 쌍 섶다리 여름 무더운 한 여름 주천강에 놓인 쌀 섶다리를 건너는 사람들
ⓒ 김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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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천(酒泉)은 말 그대로 '술이 나오는 샘'이다. 술 샘은 쌍 섶다리 부근 주천강가 망산(望山) 아래 바위틈에 있었다. 향긋하고 달콤한 술이 무궁무진 샘솟는다. 두주불사로 술을 마셔대는 사람들에겐 꿈의 낙원이었으리라.

공짜 술을 마시려는 사람들이 술 샘으로 구름처럼 몰려든다. 순박한 인심 덕분이다. 사람들이 몰려들자 순수하던 풍속이 어지러워진다. 관아에서는 이를 매우 난감하고 괘씸하게 여긴다. 급기야 술이 솟아나는 샘의 돌구유를 깨뜨려버린다. 그 바람에 술 샘이 말라버렸다. 술꾼들에게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바위에 酒泉이라 음각되어 있고, 왼쪽 하단에 작은 샘이 보임.
▲ 주천강 술 샘 모습 바위에 酒泉이라 음각되어 있고, 왼쪽 하단에 작은 샘이 보임.
ⓒ 김원식_주천 강 문화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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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이곳이 그만큼 물이 맑았다는 반증이다. 맛 좋은 술은 맑은 물이 기본이다. 맑고 깨끗한 물에, 좋은 재료와 숙련된 기술이 뒷받침 되어야만 맛 좋은 술이 빚어진다. 또한 많은 물이 흐르는 곳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수량이 풍부하다는 것은, 물을 이용한 교통이 발달했음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뗏목이건 나룻배건 수상교통의 요충지다.

주천은 예로부터 원주에서 평창을 거쳐 동해로 나가는 주요 길목이었다. 사람들과 물산이 몰려든다. 자연스럽게 다리에 대한 필요가 생겨난다. 교통결절지로 주막거리가 번성한다. 왁자지껄 큰 장터가 들어선다. 맑고 고운 술이 샘처럼 솟아나듯, 넉넉한 인심이 더불어 쌓여간다. 순수한 사람들의 착한 마음씨가 술처럼 향기롭기만 하다. 오늘도 주천에는 달콤한 술 향기에 젖은 쌍 섶다리가, 지나는 객들을 유혹한다.

단종의 애잔하고 서러운 넋을 기리는 쌍 섶다리
 
서강이 굽이도는 강 건너편 육지 속 섬 청령포 모습.
▲ 청령포 서강이 굽이도는 강 건너편 육지 속 섬 청령포 모습.
ⓒ 스마트_강원관광_DB_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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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 섶다리에 대한 유래가 특이하다. 숙종24년(1698년) 11월 6일자 실록에 '노산군을 단종으로 묘호는 장릉(莊陵)으로, 그의 비(妃)는 정순(定順)으로 묘호는 사릉(思陵)이라 정하여, 시호(諡號)를 추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노산군을 왕으로 복권시킨 것이다.

1698년이 지나가기 전에, 단종과 정순왕후의 위패를 종묘 등에 안치시키는 일을 마무리한다. 약 250년 만에 왕의 지위를 되찾은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699년, 수차례에 걸쳐 장릉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수리한다. 윤7월 23일에서야 가까스로 능 수리를 마쳤다고 숙종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그리곤 강원 관찰사에게 장릉에 참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관찰사는 여러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영월 인심은 그동안 한양과 권력에 대해선,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모두 단종의 죽음에 대한 반발심이었다. 복권된 단종의 제사만이라도 성대하게 치러내야 민심이 조금이나마 달래질 것 같았다.

이에 관찰사는 갖은 제수용품을 바리바리 준비해 우마차에 싣고, 원주를 떠나 청령포로 향한다. 길은 험한 산길에 구불구불 물길이다. 장릉을 60여리 남겨두고 주천강에서 외 섶다리를 만난다. 섶다리는 낡아 있고 백성들은 냉담하기만 하다. 처지가 난감하다. 하지만 이내, 단종에게 제향(祭享)하는 관찰사 행렬임을 알아보고, 발 벗고 나서준다. 외 섶다리로는 수레 등이 지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주천리와 신일리 백성들이 각각 하나씩 섶다리를 새로 만든다. 쌍으로 된 섶다리가 놓여진다. 우마차도 지나다닐 정도의 넉넉한 인심이 배어 나온다. 백성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참배를 마치게 된다. 관찰사는 순박한 백성들의 마음이 고맙기만 하다. 원주로 돌아가는 길에, 쌍 섶다리를 놓아 준 백성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곡식을 나누고 따뜻한 위로잔치를 열어준다. 이때부터 쌍 섶다리가 주천강의 상징물이 되었다.
 
장릉에서 단종대왕 제향제 모습
▲ 555주기(2012년) 단종대왕 제향제 장릉에서 단종대왕 제향제 모습
ⓒ 김원식_주천 강 문화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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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은 단종의 고장이다. 단종의 억울하고 비참한 죽음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야심만만한 수양대군이 저지른 폭거였다. 왕이던 형이 갑자기 죽는다. 어린 조카 자리가 무척 탐이 난다. 나라의 지존자리였다. 유일한 경쟁자는 형제들이다. 형제들을 제거하기 위해, 계유년에 정난(靖難)을 일으킨다. 김종서 등 반대파를 동생 안평대군과 엮어 일거에 제거해 버린다. 금성대군은 순흥으로 유배시킨다.

이 일로 모든 권세를 틀어쥐고, 24살이나 어린 조카를 상왕으로 밀어 낸다. 달콤한 꿀이 흐르는 자리였다. 의기가 충만한 단종의 신하 여섯이서, 수양대군을 죽이려다 실패한다. 사육신이다. 그런데 사육신은 몇몇 모사꾼이 꾸며낸 음모에 오히려 말려든 측면이 있어 보인다.

이를 기화로 단종은 모든 권한을 빼앗기고, 영월 청령포로 유배된다. 경상도 순흥에서 모모가 금성대군과 함께 또 다시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킨다. 이 사건도 형제 중 유일한 경쟁예정자로 남아 있던 금성대군을 제거하려는 음모로만 보인다.

단종은 서러운 죽임을 당한다. 그 죽임에는 여러 이야기들이 분분하다. 그 중 '권력에 눈이 먼 어느 아둔한 자가, 뒤 창문에 단종의 목을 매달아 죽였다(絞殺)'는 설이 유력하다. 사약을 든 관원이 도착하자, 시신이 서강에 무참(無慘)하게 버려져 있었다. 서강에 둥둥 떠 있는 시신을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현재 장릉에 고이 묻어준다.

정선아리랑과 더불어 단종의 죽음은 그 자체로 비극이다. 굽이굽이 흐르는 맑은 서강이, 그래서 더욱 애잔하기만 하다. 쌍 섶다리를 지나온 맑은 물이, 청령포에 무기력하게 갇힌 단종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주었을까? 말없이 흐르는 강물이, 한양에 두고 온 왕비에게, 단종의 그리움 한조각이나마 실어다 주었을까? 청령포를 회돌이 치는 서강이, 눈부시게 푸르러 더 서럽기만 하다.
 
꽁꽁 언 강물과 꼿꼿하게 서 있는 주천강 쌍 섶다리
▲ 겨울 속 쌍 섶다리 꽁꽁 언 강물과 꼿꼿하게 서 있는 주천강 쌍 섶다리
ⓒ 김원식_주천 강 문화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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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사진을 제공해 주신 주천 강 문화센타 김원식 님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림.


태그:#주천강, #술_샘, #단종_청령포, #쌍_섶다리, #순박한_인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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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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