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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망피해자 고 노광욱씨의 부모 노만규씨와 임금재씨가 아들의 사진을 함께 들고 있다.
 군사망피해자 고 노광욱씨의 부모 노만규씨와 임금재씨가 아들의 사진을 함께 들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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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만에 아들의 사인(死因)이 드러났다. 부부는 아들이 보냈던 사인(sign)을 이제야 눈치 채고 가슴을 내리쳤다. 하지만 그들의 잘못은 없다. 국가는 군인의 목숨을 앗아갔고, 진실을 은폐했으며, 진실의 규명을 미뤘다. 지연된 정의는 뻥 뚫린 그들의 가슴을 더욱 후벼 팠다.

1998년 7월 입대한 고 노광욱 이병(당시 21세)은 100일 휴가 복귀 날 새벽 자신이 살던 인천의 한 아파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버지 노만규(66)씨는 온몸이 으스러진 아들을 들쳐업고 병원으로 내달렸다. 아들은 이미 세상을 등졌다.

스무살에 연애를 시작한 부부는 스물넷에 아들을 얻었다. 외동이었던 아들은 기꺼이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자 했고, 부부도 그런 아들이 군에서 더욱 건강해지길 바랐다. 아버지는 지금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군사망피해자 고 노광욱씨의 어머니 임금재씨가 아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군사망피해자 고 노광욱씨의 어머니 임금재씨가 아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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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도 씩씩하게 입대했어요. '안 간다', '가기 싫다' 이런 말을 한 번도 안 했거든요. 우리도 군대에서 몸도 마음도 더 씩씩해져서 나오길 기대했죠." - 어머니 임금재(66)씨

그런데 아들은 왜 그런 선택을 했던 걸까. 그때로선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부부가 연락하기 전까지 부대 측은 장례식장에도 나와 보지 않았다. 분노한 아버지는 소주병으로 얼굴을 내리쳤고, 얼굴에 붕대를 감은 채 부대에 연락했다.

"그제야 부대 측에서 장례식장에 찾아와 이런저런 말을 하더라고요. '군에서 이런 일이 한두 건 있는 것도 아니니 문제를 크게 만들지 말자', '소대장이 이제 막 소위 달고 군 생활 시작했는데 젊은 애 앞길 막을 필욘 없지 않냐'고 그래요. 그땐 정신이 없어 그러려니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충격적이죠. 그러면서 장례를 다 치러주겠대요. 자식 잃은 부모가 무슨 경황이 있겠어요. 그거라도 고맙게 생각했죠." - 아버지 노만규씨

망가진 삶

이후 부부는 아들이 근무했던 부대를 찾기도 했다. 그때도 부대로부터 아들의 죽음과 관련해 아무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아들이 생활했던 곳을 보고 싶어서 찾아간 거예요. 그 와중에도 초코파이 같은 먹을 걸 사갔지 뭐예요. 부대원들 나눠먹으라고. 아들이 자던 데도 가보고, 쓰던 물건들도 봐보고. 부대 측에선 이랬다, 저랬다 아무런 말이 없었어요. 그리고 끝이에요." - 어머니 임금재씨

남은 이들의 삶은 철저히 망가졌다. 아들 이야기를 꺼낼 게 뻔했기 때문에 부부는 의도적으로 서로를 피했다. 남편은 담배 여덟 갑을 피워야만 하루를 보낼 수 있었고, 아내는 아들과 함께 살던 집이 무서워졌다. 땀 흘려 일한 대가였던 아파트 한 채를 헐값에 팔아야 했고, 운영하던 식당도 문을 닫아야 했다.

"무서워서 집엘 못 가겠는 거예요. 너무너무 무서워서... 아파트 올라가다 보면 아들이 떨어진 곳이 보여요. 분명 아무 것도 없는데 어쩌다 내려다보면 걔가 있는 거예요. 떨어져 있는 모습이. 어휴, 나중엔 주민들도 옆에서 수군수군 거리더라고요. 나중엔 (주민들이) 고사까지 지냈단 이야기를 들었는데 마음이 찢어졌죠." - 어머니 임금재씨

"정말 악착같이 벌어서 산 아파트였거든요. 아내도 좋아하고, 아들도 새 집에 간다고 좋아했죠. 근데 아들 그렇게 되고 나서 아내가 집엘 못 들어가는 거예요. 한 6개월 여관방을 전전했죠. 그러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집을 내놨어요. 복덕방도 나쁜 놈들이지, 그렇게 싸게 해치워 버리더라고요. 애가 거기서 죽은 것도 아닌데... 세상이 그렇더라고요. 다들 남의 불행을 그렇게 이용하더라고요." - 아버지 노만규씨

이들의 삶이 조금이나마 바뀐 계기는 지난해(2019년) '우연히' 찾아왔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아래 위원회)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2018년 특별법 제정으로 만들어진 위원회는 "군에서 발생한 사망사고 중 의문이 제기된 사건에 대해 진상을 명확히 규명하고 그 관련자의 피해와 명예회복, 나아가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회복과 인권증진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2012년 국방부 전공사상자처리훈령과 2015년 군인사법이 개정되면서 자살의 원인이 구타, 가혹행위 등에 따른 것이면 순직 처리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아들 죽고 난 후 친구들과도 사이가 멀어졌어요. 첨엔 친구들이 자식 청첩장 보내오면 '나한테 왜 이런 걸 보내냐' 하면서 싸웠죠. 그러다보니 친구들도 이런저런 모임에 저를 잘 안 부를 거 아닙니까. 그러면 또 저는 '왜 왕따시키냐'며 싸우는 거죠. 사람이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날도 누가 손주보러 간단 이야기를 해서 또 화를 내고 있는데 한 친구가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요새 무슨 위원회가 생겼다더라. 밑져야 본전인데 한번 알아봐라'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뉴스 채널을 틀어놓고 자막만 보고 있었죠. 거기에 군사망 무슨 위원회 안내가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전화를 걸었죠." - 아버지 노만규씨

죽음의 이유
  
군사망피해자 고 노광욱씨의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의 진상규명 결정 통지서
 군사망피해자 고 노광욱씨의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의 진상규명 결정 통지서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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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아버지는 위원회에 진정서를 넣었다. 당시를 떠올리는 아버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집사람이 지금도 우울증 약을 먹거든요. 전 사고 이후에 폐인이 돼서 집에만 있었고요. 근데 아주 나중에 이야길 들어보니, 그때 아내가 뭐라도 좀 알아보려고 서울에 혼자 갔대요. 지금은 기억도 안 나는데 무슨 기관을 찾아갔다 그래요. 근데 거기 직원이 아내에게 증거를 가져오라고 했단 거예요. 그 이야길 들으니 죽은 자식보다 마누라한데 더 미안한 거예요. 아니, 자식 잃은 엄마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그게 제 가슴 속에서 병이 됐어요. 그래서 아내에게 '남편이 뭐라도 해보려고 애쓰는 구나'라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 아버지 노만규씨

그가 썼던 손편지에도 진정서를 낼 당시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군사망피해자 고 노광욱씨의 아버지 노만규씨가 진상규명을 위해 쓴 탄원서.
 군사망피해자 고 노광욱씨의 아버지 노만규씨가 진상규명을 위해 쓴 탄원서.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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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아들이 떠난 이후) 주위에선 세월에 맡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이 한둘이 아니어서 군이란 막강한 조직은 꿈쩍도 안 할 거란 이야기도 많이 들었죠. 해봐야 더 상처만 받는다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 분위기 앞에서 (아들의 죽음에 대해 묻는 걸) 엄두도 못 냈습니다. 나라에서 불러 군대에 갔는데 100일 만에 아들을 보냈고, 아내는 가슴앓이를 하며 병이 들었습니다. 이제 저희 부부의 나이도 육십 중반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이제 와서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하지만 못난 제 아들에게 100% 책임을 묻는 것이 너무도 서운하고 섭섭합니다. 다들 갔다 온 군대도 못 이겨낸 아들이지만 바보 딱지라도 떼어주시면 조금이라도 미안함을 덜 수 있겠습니다."

1년 동안 조사를 진행한 위원회는 노 이병이 ▲ 선임병으로부터 당한 구타 및 가혹행위 ▲ 소속부대의 관리 소홀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결론지었다. 노 이병의 친구들과 부대 동기들을 찾아내 22년 만에 관련 진술을 받아낸 것이다.

"조사하시는 분이 집엘 찾아왔더라고요. 졸업앨범을 보면서 친했던 친구를 찍어달라고 그래요. 그래서 몇 명을 찍어냈더니 그 친구들을 다 찾아다닌다는 거예요. 그래서 '세월이 이렇게 지났는데 어떻게 찾아요'라고 물었더니 '다 찾는 방법이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어휴, 그렇게 노력을 해주셨어요." - 어머니 임금재씨

"조사를 막 시작할 즈음이었나. 조사관 한 분이 찾아왔어요. 젊은 분이었는데 살아 있었다면 우리 광욱이보다 훨씬 어린 분이에요. 제가 '고생시켜서 죄송하다'고 했더니, 그분이 '국가가 잘못한 거니 속에 있는 이야기 다 하시면 된다'고 그래요. 그 이야길 들으니까 용기가 났어요. 다 내 죄라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보상받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 아버지 노만규씨


지난 5월 4일 받아든 결정문에는 아들이 당한 일들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노 이병은 자대 배치 이후부터 100일 휴가 전까지 선임병들에게 따귀를 맞거나 일명 '대가리 박기'라는 가혹행위를 당했다. 엎드린 상태에서 발로 차여 도미노처럼 넘어지거나, 엉덩이나 명치를 상습적으로 폭행당하기도 했다.

또 훈련소에서 규정에 벗어난 얼차려를 받다가 왼팔을 다쳐 자대 배치 후 국군수도통합병원에 두 차례 외진을 다녀왔는데, 이 때문에 선임병들과 간부로부터 꾀병을 부린다는 의심을 받았다. 이런 과정에서 부대 적응에 어려움을 겪은 노 이병이 관심병사로 분류됐음에도 간부들은 관리에 소홀했을 뿐만 아니라 구타 및 가혹행위가 이뤄지고 있음을 인지하면서도 이를 방관했다.

위원회는 "망인은 선임병에게 지속적인 구타와 가혹행위를 당했다. 또 훈련소의 가혹한 얼차려로 부상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부대 생활에 뒤처지자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를 받아 사망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라며 "따라서 망인의 자해사망과 구타, 폭언, 가혹행위, 소송부대의 소홀한 관리는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위원회의 이 같은 결정에 따라, 국방부는 노 이병의 순직 여부를 심사하는 중이다.

'우연히'는 안 된다
  
군사망피해자 고 노광욱씨의 아버지 노만규씨가 아들 이야기 도중 생각에 잠겼다. 당시의 생각을 다시 떠올리며 눈가를 적셨다.
 군사망피해자 고 노광욱씨의 아버지 노만규씨가 아들 이야기 도중 생각에 잠겼다. 당시의 생각을 다시 떠올리며 눈가를 적셨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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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에게 두 가지 감정이 함께 찾아왔다. 비록 22년이 지났지만 비로소 아들의 사인(死因)을 밝혀냈다는 안도감, 그리고 22년 전 아들이 보낸 사인(sign)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그것이었다.

"저희 어머니, 그러니까 광욱이 할머니도 참 힘들어 하셨어요. 매일 광욱이 사진을 놔두고 늘 보고 계셔서 그러면 안 되는데 제가 버럭 화를 낸 적도 있어요. 본인 육순, 칠순, 팔순 잔치도 다 마다하셨죠. '손주 먼저 보낸 입장에서 (잔치) 여는 거 아니다'라면서요. 작년 가을부터는 몸이 안 좋으셔서 누워 계셨거든요. 5월 4일에 위원회 결과 나왔을 땐 산소마스크 끼고 계셔서 대화도 못할 때에요 그때 귀에 대고 '광욱이 소식 이렇게 왔네요'라고 말씀드렸더니 눈물을 주르륵 흘리시더라고요. 그리고 5월 25일 돌아가셨어요." - 아버지 노만규씨

부부는 100일 휴가 때 아들의 모습을 다시 한 번 곱씹었다.

"100일 휴가 때 제가 아들에게 '군 생활 어떻냐'고 물었어요. 자꾸 노래를 시키고, 하기 싫은 일 시키고 그런다면서도 매 맞았다는 말은 안 했거든요. 아, '자기 좀 다른 부대로 옮겨줄 수 있냐'고 그런 적은 있어요. 해안초소에서 근무했는데 그 주변에 무덤이 많고 그래서 무섭다면서요. 근데 저희한테 그럴 힘이 어디 있어요." - 어머니 임금재씨

"제가 줄도, 백도 없지만 설사 그럴 힘이 있다고 해도 광욱이가 다른 데로 가면 더 줄도, 백도 없는 사람의 자식이 그 힘든 자리에 갈 거 아닙니까. 그래서 아내에게 '그런 부탁 오냐오냐 들어주면 안 된다'고 단호히 이야기했었죠. 휴가 복귀 전날에도 아들한테 '씩씩하게 하고 오라'고 말했어요. 그런 지 애비한테 기가 눌려서 아들이 아무 말도 못했던 거죠. 그때 뭐라도 했었어야 했는데, 이제야 그렇게 맞았다는 이야길 들으니 내 자신이 너무도 원망스러워요. 조사 결과를 알려준 조사관님께도 제가 그랬어요. 몰랐을 땐 그냥 짐작만 했었지만 알고 나니까 너무 힘들다고요." - 아버지 노만규씨

부부는 국가의 역할을 강조했다. 자신들처럼 위원회의 존재를 우연히 알게 돼 진정에 나서는 것보다 국가가 유족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군사망피해자 고 노광욱씨의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의 진상규명 결정 통지서
 군사망피해자 고 노광욱씨의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의 진상규명 결정 통지서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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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회에 따르면 창군 이래 군에서 약 23만 명이 사망했고 이 중 약 15만 7000명이 전사자, 약 7만 4000명이 비전사자로 분류돼 있다. 비전사자 7만 4000명 중 약 3만 9000명이 현재도 '비순직자'로 남아 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변사자(약 1만 7000명), 자해사망자(약 1만 2000명), 병사자(약 3200명)다. 사고 당시엔 어려웠더라도 법이 바뀌어 지금은 순직 처분이 내려질 가능성이 높은 이들이다.

하지만 위원회가 2018년 8월 출범한 후 지난 5월 18일까지 접수된 진정은 1130건에 불과하다. 진정 접수 기한은 9월 13일까지라 세 달도 남지 않은 상황이다.
  
군사망피해자 고 노광욱씨의 부모 노만규씨와 임금재씨
 군사망피해자 고 노광욱씨의 부모 노만규씨와 임금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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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절차가 있는지도 몰랐어요. 우린 소위 말하는 옛날 세대잖아요. 군대를 상대로 쉽게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어요. 군대에서 죽었으면 그랬나보다 생각하고 살았죠. 법이 바뀌어도 저희 같이 힘없고 살기 바쁜 사람들은 알 수가 없어요. 근데 국가가 불러서 의무를 다하던 아이가 그렇게 된 거잖아요. 데려갈 때 강제로 데려갔으면 사고가 났으면 의무적으로 책임을 다 해야죠." - 부모 노만규·임금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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