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6 21:04최종 업데이트 20.06.16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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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큰 매력 하나를 꼽는다면, 늦은 밤까지 안전하게 쇼핑하며 술 한잔 하면서 돌아다닐 수 있는 국제 도시라는 점이다. 그런데 관광객이나 시민들이 즐기는 그 밤 속에, 서울의 술은 존재하는가? 낮의 음료는 커피이고, 밤의 음료는 술인데, 천만 명이 모여 사는 서울에 서울의 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술이 있는가? 서울의 장수막걸리는 수입쌀로 만들고, 소주 참이슬과 처음처럼은 외국 농산물로 만든 주정에 물을 타고, 매출 1위 맥주 회사는 외국 자본에 넘어간 지도 20년이 넘었다.

술의 소속을 따질 때 첫 번째로 꼽는 요소가, 어느 지역에서 재배된 원료를 사용하고 있냐는 점이다. 진정한 서울의 술이라면, 서울의 농산물로 빚어야 하고, 한발 물러나 서울은 한국을 대표하니 한국에서 재배된 농산물로 빚어야 한다. 누가 어떻게 재배했는지도 모르는 재료로 빚는 술을 서울의 술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서울에 농토를 찾아보기 어려우니 어쩔 수 없는 일일까? 신통하게도 서울의 양조장 중에서 두 군데가 서울의 농산물을 일부분이나마 사용하고 있다. 서울 성동구의 작은 양조장 한강주조에서 경복궁쌀을 사용하고 있다.

경복궁쌀은 공항과 그린벨트로 개발이 제한된 강서구의 86만평 절대 농지에서 재배되고 있다. 2001년부터 경복궁쌀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상표화되어 연간 1400톤이 생산되고 있다.

또 하나는 매실주와 매실증류주를 생산하는 서울 은평구에 제조장을 둔 더한주류다. 더한주류는 개발제한구역인 방이동에 매실밭 2천평이 있어서, 그 매실로 술을 빚어 지역특산주 면허를 받았다. 바탕이 되는 증류주는 수입산 럼주여서 순수한 서울내기는 아니지만, 맛과 향을 지배하는 주재료로 서울 매실을 사용하니, 그래도 서울에 턱을 걸치고 있는 셈이다.
 

고잉메리점에 전시 판매되고 있는 서울의 밤. ⓒ 막걸리학교

 
서울의 농산물에 서울의 이름까지 담은 술 얘기를 듣기 위해서, 더한주류의 한정희 대표를 을지로4가의 고잉메리 상점에서 만났다. 고잉메리는 스테디셀러 만화 <원피스>의 해적들이 타고 다니는 배 이름이고, 소매점과 음식점을 겸하고 있는 공간 이름이다. 마치 해적선의 필수 상품과 간편 조리 식품들을 판매하려는 의도로 기획된 상점처럼 보이는 고잉메리는 종각점과 인사동점에 이어 을지로4가에 문을 열었다.

고잉메리 을지로4가점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상품이 투명 병에 하얀 상표를 붙인 술 '서울의밤'이었다. 온도가 7℃로 맞춰진 냉장 쇼케이스에 더한주류에서 만든 '서울의밤'과 '매실원주'와 '명랑스컬' 제품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요즘 알뜰한 젊은이들의 흔한 소비 행동 하나는, 매장에서 신상품을 확인하면 곧바로 핸드폰으로 가격 비교에 들어간다는 점이다.

그래서 상품을 안내하는 판매원들은 소비자를 두고 핸드폰과 경쟁하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서울의밤'은 지역 특산주라 핸드폰으로 주문이 가능하다. 인터넷 가격은 1병에 7,200원이고 택배비가 3천원이다. 고잉메리에서 파는 '서울의밤' 가격은 5,900원이다. 그렇다면 이 소매점을 찾은 보람이 크다.

소매점 가격이 인터넷 가격보다 더 싸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득템하듯 한 병을 샀다. 술을 사서 계산대에 올려놓으니, 종업원이 '잔을 드릴까요?'라고 묻는다. 고잉메리 매장은 식당을 함께 운영하기에, 구매한 술을 추가 요금없이 바로 마실 수 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한정희 대표는 말한다. 메뉴판에 올라 있는 '서울의밤' 칵테일을 주문해서 마시는 것이 훨씬 더 시원하고 특별하고 저렴하기 때문이란다.
 

고잉메리 소매점에 딸린 음식 공간, 영상 공간. ⓒ 막걸리학교

 
'낮술 요괴'라고 명명한 메뉴판을 보니 서울마티니 칵테일이 3,900원이고, 매실원주 잔술 150㎖가 2,900원이었다. 서울마티니는 이 매장의 매니저가 '명랑스컬' 80㎖에 드라이진 30㎖을 얼음과 함께 섞어 만든 칵테일이다.

'명랑스컬'은 해적선의 명랑한 해골(skull)이라는 뜻이고, 고잉메리 매장의 브랜드 이름이자, 고잉메리와 더한주류가 공동기획한 술 이름이다. '명랑스컬'은 '서울의밤'과 제조법이 동일한데, 알코올 도수가 17%로 '서울의밤' 25%보다 8%가 낮다.

한 대표에게 이곳에 입점하게 된 동기를 물었다.

"고잉메리 상점을 기획한 옥토끼 프로젝트팀들이 초창기에 함께 하자고 제안했지만, '서울의밤'을 시중에 막 내놓은 상태라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서울의밤'이 일반 소주와 다르고, 젊은이들에게 반응이 좋다며 콜라보 상품인 '명랑스컬'을 만들자고 제안하면서, 샵인샵의 형태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술을 어떻게 보여주고 체험하게 할 것인가?라는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는 매장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고잉메리 매장 안에는 수십대의 동영상 광고모니터가 현란하게 반짝거리고 있고, 더한주류 술 광고 화면도 수시로 펼쳐졌다. 이 매장에 매출보다는 홍보 효과를 누리려고 들어온 것인지 한 대표에게 물어보았다.

"요즘은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자의 패턴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손님들이 SNS에 사연을 올릴 수 있는 매장을 찾아옵니다. '내가 여기 왔어, 나도 이런 체험을 해봤어', 그 마음과 순간을 타인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오프라인 매장은 구매보다는 체험이 더 중요해졌고, 온라인에서는 최저가를 찾아 구매로 이어지죠. 어쩌면 여기는 상품을 직접 체험하는 가게인 셈입니다. 지역 특산주는 온라인으로 구매할 수 있으니, 실제 시음하고 맛볼 수 있는 가벼운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저희 의도가 고잉메리와 맞아떨어진 거죠. 그리고 이곳에서도 술을 꽤 팝니다. 매장 관리는 저희가 하지 않아도 되고요."
 

서울에서 ‘서울의밤’을 만드는 한정희 대표. ⓒ 막걸리학교

 
술 이름을 '서울의밤'으로 짓게 된 이유도 궁금했다.

"지인들과 술을 마시다가, 서울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술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양조장이 서울에 있으니까 만들겠다고 했죠. 그런데 새로 쌀 발효주를 만들기 위해 투자하기도 어렵고, 어떤 변화를 줄까 고민하다가 주력 상품인 매실원주를 증류해보기로 했죠. 매실원주를 증류했기에 소주라는 이름을 붙일 수가 없어서, 서울의밤이 되었구요. 밤은 예거마이스터 칵테일인 예거밤과 중첩된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밤(bomb)은 폭탄을 의미하며, 젊은층들에게 에너지 음료로 통하는 증류주 칵테일에 붙는 용어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보상 심리에서 술을 격하게 마시고 소주를 각 1병 이상씩을 마시는데 이는 잘못된 문화라고 봅니다. 부어라 마셔라가 아니라 술을 즐기는 문화가 형성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평범하지 않은, 좀 독특해도 좋을 것 같은 술을 만들어서 '서울의밤'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한 대표는 술을 빚는 양조인에 머물지 않고, 술을 경영하는 경영인으로 자기 색깔을 분명히 하고 있다. 술을 기획하고, 디자인하고, 홍보하고, 유통하는데 많은 열정을 들이고 있다. 한 대표는 술의 상표도 직접 디자인한다.

처음에는 큰 돈을 주고 디자인을 맡겼지만, 자신의 원하는 방향과 다르게 나왔다. 그래서 다 버리고, '내 마음을 아는 자는 나다'라는 생각에서 직접 디자인을 하게 되었다. '서울의밤'에 붙은 타원형의 흰색 상표는 매실의 윤곽을 딴 것이다. 글자는 손글씨를 잘 쓰는 강병인씨에게 받았다.

현재는 '서울의밤'이 서울의 주점 3천 군데에서 팔리고 있다. 한 대표는 종합주류와 특정주류 유통상을 통해서 주점에 술을 납품하고, 영업사원을 두어 주점 홍보를 함께 진행하며 시장을 넓혀나가고 있다. 그래도 제품이 소비자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게 현실이다.

대형마트에 간신히 들어간다 하더라도 한두 줄 비좁게 늘어서 있는 게 고작이다. 편의점은 진입하기조차 어렵다. 술이 편의점에 들어가려면 그 분야 1등 브랜드가 되어야 하고, 편의점 점주들이 누구나 알아주고 홍보할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아직은 그 단계가 아니라고 했다.

어떤 주점에서 '서울의밤'이 잘 팔리냐고 물으니, 한 대표는 포장마차인데 특별하게 꾸미거나, 오이와 두부를 김에 싸서 안주로 내놓을 만큼 기발하거나, 분위기가 새롭고 젊고 낯설게 구성된 곳이 잘 판다고 했다.

한 대표의 말 속에서 '서울의밤'의 이미지도 자연스럽게 구성되고 있었다. 새롭고, 젊고, 낯설고, 기발한 이미지로. 그러고 보니 아직 '서울의밤'을 맛보지 못했다. 그 맛이 어떠한지 서울 은평구에 있는 제조장을 찾아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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