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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초기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으나, 청나라로부터는 모략당했고, 조선으로부터는 추방당했으며, 본국 정부로부터는 해임당했다. 어느 날 일본의 호젓한 산길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의인 조지 포크에 대한 이야기이다.[편집자말]
* 이 기사는 구한말 조선에 머문 미 해군 중위 조지 클레이턴 포크의 이야기를 사료와 학술 논문 등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이전 기사 : "며리계!" 조상들이 처음 미국인 보고 외친 말의 뜻]

독자들은 나 조지 포크의 입을 통해 부산 앞바다에 표류한 미국인들을 만나 보았고, 또 동해안 마을(조선측 기록에 의하면 강원도 통천)에서 한 달 가까이 보살핌을 받았던 미국인들을 또한 만나 보았습니다. 각각 1853, 1855년의 일로서 역사에 묻혀버린 사건들입니다. 그 의의를 다시금 곱씹어 보기로 합시다.

참고로, 나 조지 포크는 사후의 일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영혼은 시공의 제약을 받기 않기 때문이지요. 또한 나는 중국어와 한자, 일본어를 잘 알았습니다. 나아가 조선 언어문자를 익혔고 문헌을 읽었으며 조선인들과 소통하며 지냈습니다. 때문에 내가 한중일의 문서를 인용하고 한자를 사용하거나, 조선 사정에 대하여 잘 안다고 하더라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1855년 조난당한 미국 선원들의 조선 체험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52년 미국의 역사학자 Earl Swisher(콜로라도 대 교수)에 의해서였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하나의 각주이다(THIS IS A footnote to history).….. 예전의 역사서에 의하면 미국과 한국이 최초로 접촉한 것은 1866년의 일이다. 그 해 6월 24일 미국의 서프라이즈 호가 한국 동해안에 좌초되었다. 선장과 선원들은 모두 한국 관리들에 의하여 우호적으로 받아들여졌고 만주를 거쳐 중국의 미국 관리들에게 넘겨 졌다.

1866년 8월 또 한 척의 미국 상선 제네럴 셔먼호가 통상을 시도하며 침입하였는데 분개한 한국인들에 의하여 승무원 전원이 살해되었다. 1882년 미국과 Korea의 관계가 조약에 의하여 정식으로 수립되기에 이르렀고 '은둔 왕국Hermit Kingdom'은 마침내 빗장을 풀고 문명세계에 발을 디뎠다. 하지만 여기 난파 선원 이야기는 미국의 최초 공식 접촉보다 11년 전, 최초의 수교 조약보다 27년 먼저, 그리고 미국 외교관이 북경에 부임하기 4년 전의 일이다."
- Earl Swisher, <The Adventure of Four Americans in Korea and Peking in 1855>, Pacific Historical Review Vol. 21, No. 3 (1952. 8월)

4명의 미국 선원은 6월 중순 서울로 호송되었습니다. 조정에서는 그들에게 새 옷과 음식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도대체 이 괴상하고 가련한 오랑캐들은 어떤 나라에서 흘러 온 것인가?  

조정에서는 당시 서양 문헌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두 사람(윤협 , 이종원)을 불러 조사를 명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이방인에게 서양 풍속도인 <근세해도환기近世海圖寰紀>라는 책을 보여주었습니다. 눈을 빛내며 책을 들춰본 이방인들의 시선이 '화기국花旗國' 면에 꽂히고 환호성이 터졌습니다.

전번에 말한 것처럼 중국인들은 당시 미국을 '화기국'이라 불렀습니다. 당시 조선에 들어온 서양서적은 모두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그들이 화기국에서 온 것이 드디어 밝혀졌습니다. 두 조선인은 역사적인 순간임을 직감했고 초상화가에게 의뢰하여 이방인들을 그리게 했습니다. 조선인이 그린 최초의 미국인 상입니다. 
  
1855년 6월 서울 조선인이 그린 미국인. 박천홍 지음 '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 내용 중에서 재촬영.
 1855년 6월 서울 조선인이 그린 미국인. 박천홍 지음 "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 내용 중에서 재촬영.
ⓒ 현실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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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것은 이들을 '미리견(米利堅)'이라고 명명했다는 사실입니다.  'American아메리컨'이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그 발음을 따서 지은 이름이겠지요. 그리하여  2년 반 전(1853년 1월), 부산 해안에서는 아메리카AMERICA가 '며리계'가 되었고 이제 서울에서 아메리컨American 은 '미리견'이 된 셈입니다.  

조선인들은 '미리견'의 언어문자에도 강한 호기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그 나라 문자를 쓰고 발음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26개의 알파벳 모양을 베끼고 각각 그 발음을 적어 놓았습니다. 나아가 몇 개의 영어단어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1855년 6월 서울 조선인이 그린 미국인. 박천홍 지음 '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 내용 중에서 재촬영.
 1855년 6월 서울 조선인이 그린 미국인. 박천홍 지음 "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 내용 중에서 재촬영.
ⓒ 현실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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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왼쪽 라인의 단어를 봅니다. 조선 땅에서 최초로 쓰여진 아홉 개의 영어단어입니다. 난필이지만 위에서부터 차례로 Sun(쎤: 日), Sky(쓰개: 天), Earth(엣: 地), Man(맨, 人), Hand(해안두: 手), Sun(중복), Ink(엉큼: 墨), Brush(부라시: 筆), Fan(밴: 扇) 등입니다(한글 표기는 현대식으로 하였음).

발음표기를 보면, 조선인들이 귀를 곤두세워 들으면서 그 소리를 애써 옮기고 있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손짓 발짓으로 조선인이 하늘을 가리키며 '이건 뭐라고 하는가?'라고 묻는 시늉을 하면 '미리견'이 스카이! 라고 답을 합니다.

그러면 조선인이, 한 번 써 보아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작업이 이루어졌겠지요. 단어 품목을 보면, 천지인天地人을 다 넣었고 문방사우文房四友의 일부(붓筆과 먹墨)도 넣었습니다. 천지자연과 인문을 중시 여긴 문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제 오른쪽을 봅니다. 유심히 보면 알파벳 하나하나를 그려 놓고 발음을 한글로 적어 놓았습니다.  A애, B뷔, C싀, D디, E의, F압픠, G디, H에추……….이런 식으로 Z까지. 가장 재미있는 글자는 R과 Z가 아닌가 합니다. R은 백성 民, Z는 '乙'자를 본 떠 쓴 게 분명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실종된 역사의 한 갈피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이제 다시 우리 미국 해군 사관들의 귀국 여행으로 돌아갑니다. 원주항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한 것은 1882년 6월 10일이었습니다. 도중에 또 다시 엄청난 새떼, 여러 마리의 고래와 물고기 떼를 보았습니다.

이튿날 오후 3시 블라디보스토크 항 앞에 닻을 내렸지요. 러시아 사람들이 보트를 타고와 우리 배에 오르더군요. 그들은 화물을 검색하고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검역을 실시했습니다. 일인 승객들은 검역의가 착륙허가를 할 때까지 모두 선상에 유치되었습니다. 

우리는 중국인이 노를 저어 온 배를 타고 해안에 내렸습니다. 사람들이 우루르 몰려들더군요. 짐꾼들인데 중국인이 제일 많고 그 다음 만주인, 그리고 조선인 순이었습니다.

조선인들은 눈빛과 체형으로 어느 정도 분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조선인을 포함하여 여러 명의 짐꾼을 샀습니다. 밀려드는 군중 사이를 뚫고 우리는 호텔로 이동하였습니다. 외국인 전용의 우리 호텔은 이름이 '고치나차 졸로토이 로그Gostinnitsa Zolotoi Rog'(Golden Horn Hotel 골든 혼 호텔)였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기항지, 시베리아에서는 제일 가는 양항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태평양의 러시아 소유 해안선에서 가장 남쪽 지역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얼음이 어는 겨울 기간이 매우 길고 여름에는 짙은 안개가 깔려 있어  태평양 함대의 기지로서 결함이 많다는 것을 러시아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만일 동양에서 장기전을 치를 경우에도 그곳은 군사기지로서 적합치 않았습니다. 러시아가 조선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 까닭입니다.

러시아는 원산이나 부산 혹은 쓰시마 섬 중의 한 곳을 확보하고자 하였습니다. 러시아 함대는 조선 해안을 빈번히 탐사하였습니다. 일찍이 1859년 러시아는 쓰시마에 거점을 확보하였습니다. 해안 한 귀퉁이에 러시아 수군들을 위한 건물이 들어섰고 작은 식민지가 건설되었습니다.

후에 쓰시마 섬을 방문한 영국의 부제독 제임스 호프 사령관이 러시아 거점을 발견함으로써 문제가 되자 폐기된 바 있었습니다. 중국은 러시아의 조선 진출을 막기 위하여 미국을 끌여들였습니다. 그 결과 미국과 조선의 수교가 이루어질 수 있었지요.

블라디보스토크의 인구는 약 6천명 정도였습니다. 군인을 위시한 여러 부류의 러시아인, 만주인, 중국인(대부분 산동성 출신), 조선인 그리고 수백명에 이르는 일본인들이 혼거하고 있었습니다. 러이사인 이외의 유럽인들은 아주 적습니다. 주로 독일인들이고 몇 명의 영국인과 한 명의 미국인이 있었습니다. 

선착장 부근에는 시장이 있는데 두 줄로 허술한 건물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추레한 만주인, 중국인, 조선인, 하층 러시아인이 잡화를 팔고 있었습니다. 술집과 여인숙이 많았구요. 길거리에는 술취한 사람들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습니다.

전체적으로 군인 냄새가 물씬 나더군요. 밤에는 순찰이 행인들을 임검합니다. 하층계급을 형성하고 있는 조선인과 중국인은 주로 우마차를 끄는 일, 땅을 파는 일 등의 육체 노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무는 동안 어떤 러시아 지식인으로부터 조선인에 대해 흥미로운 논평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조선 북쪽 지방 사람들과 상당기간 거주하면서 조선어와 조선 풍습을 익혔다고 하면서, 조선인들과의 폭넓은 경험을 통하여 내린 결론을 들려 주었습니다.

즉, 조선인들은 일반적으로 성격이 변덕스럽고 불안정한(fickle and unstable) 면이 있다. 하지만 조선이 일단 외부 세계에 문호를 열고나면 일본인들보다 더욱 빨리 문명개화를 받아들일 것으로 믿는다는 것이었습니다. 

-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태그:#조지 포크, #영어,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인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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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만남이길 바래 봅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제2의 코리아 여행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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