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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시 장목면에 있는 김영삼대통령기록전시관과 김영삼 생가.
 거제시 장목면에 있는 김영삼대통령기록전시관과 김영삼 생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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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서구로 옮기다

김영삼 의원은 이승만의 3선을 허용하는 사사오입 개헌안이 통과하자 자유당을 탈당했다. 그런 뒤 새로 창당한 민주당 청년부장 및 경남도당 부위원장이 되자 정치 보복이 뒤따랐다. 김영삼은 1958년 5월 2일에 실시된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선거구를 거제에서 부산 서구로 옮겼다.

그러자 자유당은 부산 서구 선거구 곳곳에 덫을 놓았다. 투표가 끝나고 개표가 시작될 무렵 개표장인 서구청에는 초저녁부터 새끼줄을 친 뒤 시민들의 접근을 막았다. 그런 뒤 포장 친 스리쿼터가 들락거렸다. 투표함을 바꿔치기하는 순간이었다. 김영삼 후보는 결국 투표에서는 이기고 개표에서 진 셈이었다. 
  
김영삼은 원내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좌절치 않았다. 낙선 후 유석동지회를 결성하여 조병옥 박사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다. 하지만 조 박사는 선거를 두 달 앞두고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병사했다. 1960년 3월 15일에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는 대대적인 부정선거로 4.19 시민혁명을 촉발케 했다.
  
김영삼은 4.19 시민혁명 후 1960년 7월 29일에 실시된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부산 서구에서 출마했다. 개표 결과 상대 후보의 4배 이상을 득표하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국회의원 임기도 채우지 못한 채 5.16 쿠데타를 맞았다. 군사정부로부터 공화당 창당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다. 하지만 김영삼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고 오히려 군정연장반대시위에 참여하다가 서대문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1963년 11월, 민정당 소속으로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부산 서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됐다. 김영삼은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통합된 야당 민중당에서 38세의 최연소 원내총무로 선임됐다.     
 
 젊은날의 김영삼
 젊은날의 김영삼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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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기수론'
  
김영삼은 박정희의 3선 개헌을 강도 높게 비판하다가 1969년 6월, 집 근처에서 괴한들로부터 초산 세례를 받기도 했다. 공화당 단독으로 열린 국회에서 3선 개헌안이 통과되자 김영삼은 이른바 '40대 기수론'을 주장하여 정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이에 김대중, 이철승 의원이 호응하여 40대 정치인들이 멋진 대선후보 경쟁을 벌였다. 1970년 9월 29일, 투표 결과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무효 82표였다. 김영삼이 이겼으나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여 2차 투표에 들어갔다. 그때 이철승은 자파의 표를 김대중에게 몰아줬다. 그리하여 김대중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됐다.

그때 김영삼은 으레 자신이 대통령 후보가 될 줄 알고 지명수락 연설문까지 마련해두었다. 하지만 낙선의 변에서 "김대중씨의 승리는 곧 나의 승리"라며 협조를 다짐했다. 김영삼은 그 약속을 지켰다. 1971년 4월 27일에 치러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95만 표 차이로 박정희에게 패했다.
   
 박정희 제9대 대통령 취임 청와대영빈관 만찬회(1978. 12. 28.)
 박정희 제9대 대통령 취임 청와대영빈관 만찬회(1978. 12. 28.)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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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정국

김대중에게 가까스로 승리한 박정희는 영구 집권 획책으로 1972년 10월 17일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는 한편, 각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이른바 '10월 유신'을 단행했다. 김영삼은 해외 체류 중 박정희의 유신 단행 소식을 듣고 가족들과 지인들의 만류에도 귀국했다.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가택연금이었다.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났다. 김영삼은 이를 정치테러로 규정, 진상규명 촉구에 앞장섰다. 이어 정치활동을 재개하여 1974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당 총재로 선출됐다.
  
 박정희 김영삼 청와대 영수회담(1975. 5. 21.)
 박정희 김영삼 청와대 영수회담(1975. 5. 21.)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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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그는 최연소 야당 당수가 됐다. 이후 김영삼은 김대중의 정치 활동 보장과 유신헌법 폐지를 주장하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입건되기도 했다.

1975년 5월 김영삼은 박정희와 영수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 이후 김영삼은 온건론으로 선회하는 바람에 엄청난 비난 여론과 함께 중앙정보부의 방해 공작으로 1976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는 이철승에게 패했다. 박 ․ 김 회담에 대해 김영삼은 끝까지 함구했다. 그 결과 그는 총재 자리마저 빼앗겼다.

하지만 김영삼은 다시 일어섰다. 1979년 김영삼은 총재 경선에 재도전하여 2차 투표까지 가는 어려움 속에 가까스로 이철승을 누르고 총재가 됐다. 이때 김영삼을 도와준 사람은 교도소에서 갓 풀려나 연금 상태에 있었던 김대중이었다.
  
 거제 고향 바다를 거니는 김영삼.
 거제 고향 바다를 거니는 김영삼.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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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김영삼은 다시 당권을 거머쥐자 유신정권에 맹공을 퍼부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그는 야당총재로서 통일을 위해서는 시기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북한의 책임 있는 사람과 만날 용의가 있다고 발언했다. 그러자 반공단체들이 신민당사와 김영삼의 상도동 집으로 몰려가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1979년 8월 9일 YH 무역여성 근로자 2백여 명이 신민당사를 방문했다. 그들은 회사 폐업을 반대하는 집단 농성을 벌이다가 옥상에 올라간 노동자가 추락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대의원 자격에 문제가 있다면서 총재단 직무집행정치가처분을 법원에 제출했다. 그러자 법원은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김영삼은 물러서지 않고 <뉴욕타임지>를 통해 미국의 박정희 정권지지 철회를 요구했다. 그 여파로 김영삼의 국회의원 직이 제명 처리됐다. 김영삼이 국회를 떠나면서 남긴 말이다.
 
"순교의 언덕 절두산을 바라보는 이 국회의사당에서 나의 목을 자른 공화당 정권의 폭거는 저 절두산이 준 역사의 의미를 부여할 것입니다. 나는 오늘의 수난을 민주회복을 위한 순교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중략) 나는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할 것입니다."

1979년 10월 15일 부산대 학생들이 민주선언문을 낭독한 뒤 '독재타도'을 외치면서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 항의 시위는 이웃 마산과 창원으로 확대돼 '부마사태'로 비화돼 마침내 박정희 유신 정국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김영삼 생가 안채
 김영삼 생가 안채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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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이광복 지음 <인간 김영삼> / 강준식 지음 <대한민국 대통령들> / 박영규 지음 <대한민국 대통령 실록> 손세일 엮음 <김대중과 김영삼> 등 수십 권의 참고자료와 동시대 신문, 동시대에 살았던 여러 사람들의 증언으로 쓴 기사임을 밝힙니다.


태그:#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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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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