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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5.18 힌츠페터 스토리> 스틸 이미지
 영화 <5.18 힌츠페터 스토리> 스틸 이미지
ⓒ 한국방송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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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40주년을 맞이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영향을 미친 결정적 사건으로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서울역 회군' 사건을 꼽는다. '서울역 회군'은 1980년 5월 15일 서울 지역 대학생들이 서울역에서 계엄 해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 학생회 결의로 자진 해산한 사건을 일컫는다.

그런데 5·18과 관련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 있다. 바로 전주에서 일어났던 '신흥 5·27 민주화운동'이다. 이것은 1980년 5월 광주를 제외한 전국에서 유일하게 고등학생이 광주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시위했던 사건이다.

알려지기로는 당시 학교 정문 앞에 탱크가 와 있었고 학생들이 학교 밖으로 나올 경우 발포 명령까지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광주의 학살이 전주까지도 이어질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전주신흥고 교사들의 만류로 이어지진 않았다.

당시 시위를 자세히 듣고 싶어서 당시 전주신흥고 3학년이었던 이우봉씨를 지난 19일 서울 솔밭공원역 근처 커피숍에서 만났다. 다음은 이씨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했다.

'전두환 물러가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 18일이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일이었잖아요. 선생님이 5·18에 직접 참여한 건 아니지만 전주에서 고등학교 시절 당시 고립된 광주 투쟁을 전주, 전북을 거쳐 전국으로 확산하려 하셨잖아요. 감회가 새로울 것 같은데.
"40주년 되니까 오래됐다는 생각이 드는데 특별히 40주년이 39주년이나 41주년과 큰 차이 없다고 봐요. 꼭 40주년이어서가 아니라 5월이 되면 5·18과 우리가 시위했던 5·27 이런 게 새롭게 와닿고 그때 생각이 나고 그래서 지금 이때가 개인적으론 1년에서 가장 의미 있는 한 달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요."

- 점점 잊히니 아쉽지 않으세요?
"1년 내내 사람들이 5·18을 생각하며 살 수는 없다고 봐요. 5·18뿐 아니라 근현대사에서 동학농민혁명, 제주4·3항쟁, 4·19 등 이런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평소엔 일상생활에 열중하며 살아가죠. 그래서 정부나 해당 단체에서 과거의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고 선배들의 정신을 이어가고자 많은 노력을 하고 있잖아요.

5·18도 기념식이나 다양한 행사를 하면서 5·18 정신을 계승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봐요. 시간이 오래 지날수록 사람들의 기억에서 5·18이 잊혀 가기 때문에 안타까운 건 아니고 '일상생활에서 5·18을 기억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욕심이라고 봐요."

- 2010년 전주신흥고에서 학교 자체적으로 '5·27 신흥민주화운동'이라고 공식화하였잖아요? 1980년 당시 고등학생 시위로는 광주를 제외하고 전국에서 전주신흥고가 유일하다고 들었어요. 당시 기억나시는 게 있으신가요?
"80년 5월 27일 당일 기억을 더듬어보면 저는 당시 주동 학생이 아니고 그냥 일반 참여 학생이었어요. 전날인 26일에 다음 날 뭔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다음 날 아침에 '오늘 뭔일이 있을까' 생각하며 등교했고, 등교하니까 반 분위기가 긴장된 상태였어요.

저희 학교는 미션스쿨이라 아침에 예배를 드리고 수업을 시작하는데 1교시 시작종이 안 울려요. 그리고 반장과 종교부장이 안 보여요. 그때 당시에 학교에서는 반장과 종교부장을 모아놓고 시위하지 말라고 설득하고 있었다고 해요. 우리는 교실에서 대기하고 있었고요. 학교 설득이 안 되고 그 자리에서 친구들이 나가기로 결정했다고 해요."

- 그거 듣고 처음에 어떠셨어요?
"뭔가 긴장되고 뛰쳐 나가야 된다는 그런 분위기였어요. 반장과 종교부장들이 교실로 들어와서 나가자고 그래서 운동장으로 뛰쳐나갔죠. 3학년이 1~2학년 동원을 맡았어요. 저희 반은 1학년 동원을 맡았어요. 1학년 교실마다 가서 전부 운동장으로 나가라고 후배들을 몰아냈죠. 그래서 1500명 전교생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 스크럼을 짜고 '전두환 물러가라', '비상계엄 해제하라'고 외치며 돌았죠."

- 그럼 광주 이야기는 언제 아셨어요?
"광주 얘기는 그 전부터 간간이 들었어요. 그때 당시 전주신흥고에는 광주 전남에서 온 친구들이 많았어요. 전주에서 광주는 1시간밖에 안 걸려서 거의 매주 집에 다녀오곤 했었는데 5월 18일 이후에는 광주에 계신 부모님들이 하숙집으로 전화해서 '내려 오지 마라. 사람들이 많이 죽거나 다친다'라며 집에 못 오게 말렸대요. 그리고 신흥고생 대부분 교회를 다녔어요. 교회 가면 대학 선배들이 있잖아요. 대학교 선배들한테 광주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계기가 다른 학교 학생들보다 많았던 거죠."

"위압적이고 공포스런 분위기... 겁도 났었죠"
 
 ‘신흥 5·27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이우봉씨
 ‘신흥 5·27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이우봉씨
ⓒ 이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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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이야기 처음 들었을 때 어떠셨어요?
"이런 질문은 애매해요. 지나고 나서야 전체 상황을 얘기하고 느낌을 얘기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조금씩 들으면서 쌓여가는 상황이었거든요. 광주 상황을 들으면서 '살벌하네. 전두환 나쁜 놈이네' '어떻게 정권을 잡기 위해 자기 국민을 죽일 수 있나?'라는 인식의 혼란과 울분 이런 거가 컸던 거 같아요.

80년 5·27 당시 저희가 주로 외쳤던 게 '계엄 철폐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였거든요. 그 당시에는 한 번에 전체적인 상황을 들은 게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들으면서 광주가 굉장히 살벌하고 전두환 일당이 아주 나쁜 놈이란 생각들이 차츰 자리 잡아갔던 거 같아요."

- 당시 전주 시내 몇 개 고등학교가 같이 모의했는데 신흥고만 시위했다던데.
"지나서 든 생각인데 전주신흥고에서만 시위가 가능했던 것은 첫째는 우리 학교에서는 투쟁을 준비했던 친구들이 많았어요. 근데 다른 학교는 한두 명으로 많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어요. 혼자서는 전교생을 조직 못 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것도 집에서 눈치를 챈다든지 그러면 움직이지를 못 하는 거죠. 그러나 신흥고는 다른 학교와 다르게 다수가 준비했었다는 점이 시위가 가능했던 가장 큰 요인이 아닌가 해요.

그리고 또 하나는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대부분 학생이 교회에 다니면서 광주 소식들을 다른 학교 학생들보다 많이 접할 수 있었고, 울분이나 정의감 같은 공감대가 많이 형성되어 있었지 않았나 해요. 이런 요인과 더불어 5·27 당일까지 준비했던 친구들이 살아남았어요. 경찰, 계엄군 쪽에서 사전에 정보를 입수해서 우리한테 유인물을 넘겨주거나 관계했던 선배들은 사전에 다 잡혀갔어요. 그런데 시위를 준비했던 우리 학교 친구들은 안 잡혔어요. 그래서 5월 27일 시위가 가능했었다고 봐요."

- 80년 5월 27일 아침으로 가보죠. 당시 학교 앞에는 탱크가 있고 하늘엔 헬기가 떠 있었다고 들었어요. 그날 분위기는 어땠어요?
"1500명이 운동장에 쏟아져나와 '계엄 해제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외치며 스크럼을 짜고 도는데 바로 머리 위에서 헬기가 우다다다 굉음을 내며 '여러분은 불법 시위를 하고 있다. 즉각  해산하라'는 방송을 하고 전단을 뿌려대면서 상당히 위압적인 분위기를 만들었죠.

그리고 학교 정문 밖에는 군인들이 무장해서 총을 들고 서 있었고 다리 위에는 장갑차 같은 게 있는 거예요. 스크럼을 짜고 구호 외치며 운동장을 돌다가 정문을 나가려고 하니 위압적이고 공포스런 분위기 때문에 솔직히 겁도 났었죠."

- 선생님들은 막았다던데.
"선생님과 목사님들은 '너희 나가면 죽어. 이놈들아 나가지 마'라고 하시며 온몸으로 막았죠. 저는 선두, 즉 지도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만약에 선두가 그 선생님들 뚫고 정문을 넘었으면 아마 전교생이 계엄군과 부딪혔겠죠. 그런데 대오를 앞에서 지휘할 지휘부가 없었어요. 그래서 대오 선두가 정문 앞에서 돌아서 다시 운동장으로 모이게 되었죠."

"후회는 한 번도 안 했어요"

- 아무래도 무서움이 컸겠죠?
"그런 분위기에서 겁이 안 나면 거짓이죠. 계엄군이 학교를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걸 돌파할 정도까지 우리가 단련이 안 되었고, 역량도 안 되었었죠. 전교생이 시위하는 것도 처음이고, 당시 상황을 정확히 판단해서 지휘할 지도부도 부족한 조건이었음에도 엄혹한 상황을 뚫고 시위를 감행한 것만 해도 대단한 행동이었다고 봐요."

- 선생님들이 원망스럽진 않았어요?
"그런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선생님들은 당연히 학생을 보호하려고 못 나가게 막는 거죠. 나가면 제자들이 죽는데 나가라고 할 순 없는 거잖아요. 나중에 얘기 들어보니 만약에 신흥고에서 정문을 뚫고 나오면 발포 명령까지 내렸다는 거예요. 5월 27일은 광주가 진압되는 날이었잖아요. 계엄군 입장에서는 27일 광주 진압하는데 이놈들이 나와서 이게 커지면 안 되니까 뚫고 못 나오게 하고, 정문을 뚫고 나오면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하더라고요."

- 나가서 발포됐다면 이게 번졌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거기서 그냥 깨지고 박살 나고 끝날 수도 있고 모르는 거죠. 왜냐면 일어난 사건이 아니잖아요. 다만 저희는 광주 투쟁을 전국으로 확산하자는 취지로 한 건데 학내 시위로만 그친 거죠."

- 선생님은 징계받아 퇴학당하셨던데.
"전 5·27 시위로 징계받은 게 아니고 시위 끝나고 전주 시내 고등학교 연합시위를 다시 조직하고 시민궐기 조직하려고 '전주 시내 고등학생이여 총궐기하자', '전주시민이여 총궐기하자'고 유인물 배포하다 체포되어 구속된 거고 그래서 퇴학당한 거죠."

- 5·27 이후 광주가 끝났다는 걸 몰랐나요?
"알았죠. 그러나 광주 투쟁이 끝났다고 해서 싸움이 끝나는 건 아니잖아요? 전 지금도 광주에서 200여 명이 죽은 게 아니라 2000여 명이 죽었다라고 생각해요. 왜냐면 행불자 숫자가 너무 많아요. 시신을 암매장한 게 지금도 드러나고 있잖아요?

그 당시에 전두환이 정권을 잡으려고 광주시민 2000여 명을 학살했다는 거에 분노가 치솟잖아요. 전두환 살인마를 그냥 둘 순 없다는 울분이 있었기 때문에 광주가 진압됐다 하더라도 다시 전주에서 시작을 해서 전국으로 확산하자는 생각을 했던 거죠."

- 그거로 선생님은 졸업도 못 했는데 후회한 적 있지 않나요?
"후회는 한 번도 안 했어요. 당시에 했던 게 의미가 있다는 거죠. 민주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의미 있는 일을 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학교 잘렸다고 해서 학교를 원망하진 않아요.

계엄령 하에서 총칼을 쥔 군사정권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학교에서도 내가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되었으니 퇴학 처분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후회는 없고 다만 학교에서 5·27 문제를 제대로 세워냈으면 하는 바람은 있죠."

"'신흥 5·27 민주화운동' 전국에서 인정받았으면"

- 학교에선 2010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했는데.
"30주년 때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5월 27일을 '신흥 5·27 민주화운동의 날'이라고 한 거죠. 당시엔 좀 늦은 감이 있었죠. 왜냐면 정부에서도 5월 18일을 '5·18 민주화운동기념일'로 정하고 기념식도 해왔잖아요. 그러나 신흥고는 몇 년이 지나서 한 거죠.

그렇지만 굉장히 의미가 있고 좋아요. 매년 5·27 신흥 민주화운동을 기념하고 이어져 나가면 좋겠어요. 그래서 신흥학교 역사 속에서 신흥학교에 들어오는 모든 후배 학생들에게 80년 그 엄혹한 상황에서도 선배들은 이렇게 싸웠다는 정신을 이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최근까지도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왜곡 폄훼가 계속 나오는데 그런 거 접할 때 어때요?
"80년 당시에도 전두환 정권은 5·18을 폭동이라고 몰아붙였죠. 왜곡된 정보를 듣고 왜곡된 교육 받은 사람들이 왜곡된 사고와 행동을 해요. 그래서 왜곡된 인식을 극복하고 역사를 바로 세워내고자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하였고, 아직도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이에 동의하지 않는 부류가 5·18에 대한 왜곡된 정보를 가지고 5·18민주화운동을 부정하면서 세력화하려는 움직임이 끊임없이 나타나죠. 이런 자들은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봐요. 왜냐면 이런 사람들의 주장은 이제 국민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니까요."

- 앞으로 과제가 있다면 뭘까요?
"앞으로 과제라면 국민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 복지의 수순을 더 높여 나가는 것, 차별을 아예 없애가는 것, 이런 것들이 사회를 민주화시켜나가는 과정이라고 봐요. 이런 것이 우리 역사에서 5·18 정신을 계승하는 거죠.

신흥 5·27과 관련해서는 '신흥 5·27 민주화운동'이 전주 신흥학교만이 아니라 전주, 전북지역 더 나아가 전국에서 인정받았으면 해요. 80년 당시 광주를 제외한 고등학생 시위로는 전국 최초잖아요. 전두환 군사정권의 살인적인 폭압에 맞서 시위를 감행했던 신흥고 학생들의 용기와 정의감이 인정받는 것도 역사 바로 세우기의 하나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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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의 궁금증을 속시원하게 풀어주는 '이영광의 거침없이 묻는 인너뷰'를 연재히고 있는 이영광 시민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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