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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책이 나왔습니다'는 저자가 된 시민기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저자가 된 시민기자라면 누구나 출간 후기를 쓸 수 있습니다.[편집자말]
"작가님! 다음 주면 책 나오는데 보러 오실래요?"

지난 4월 말. 출판사 담당 편집자의 메시지 한 통에 나는 2달 반 만에 서울행 KTX에 몸을 실었다. 코로나19 여파로 장거리 이동을 하는 게 영 찜찜하긴 했지만, 내 생애 첫 책의 실물을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마스크를 쓰고 손 소독젤을 가방에 챙겨 용감하게 기차를 탔다. 몇 주 후면 출판사에서 대구인 집으로 보내줄 터였지만, 도무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홀로 KTX를 타고 창 밖을 응시하자 책이 나오기까지의 여정이 그림처럼 스쳐 지나갔다. 시작은 2017년이었다. 당시 캐나다에 머물던 나는 여성주의 집단상담 워크숍에 참여했고, 이를 통해 나의 삶을 새롭게 보게 됐다.

이후 나는 한국형 가부장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썼고 이 과정을 '나의 독박 돌봄노동 탈출기'라는 제목으로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다. 2019년엔 결혼 후 잃어버렸던 나의 정체감을 찾아간 이야기를 <엄마의 이름을 찾아서>에 담아냈다. 두 연재를 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의 응원에 감동을 받기도 했고, 악플들을 통해 처참한 현실을 재경험하며 마음 아파하기도 했다.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으며 연재를 하고 있던 지난해 여름, 몇 군데 출판사에서 두 연재를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보자는 제의를 받았다. 출간 제의는 당시 지쳐 있던 내게 글쓰기를 계속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결과물을 확인하러 가는 길이었다. 분명 무척이나 감격스러울 것이라 상상하며 말이다.

기쁨 아닌 두려움
 
<엄마로 태어난 여자는 없다> 송주연 지음, 스몰빅에듀, 2020
 <엄마로 태어난 여자는 없다> 송주연 지음, 스몰빅에듀, 2020
ⓒ 송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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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 도착하자마자 쌓여 있는 책들 속에서 나는 한눈에 내 책을 알아볼 수 있었다.

 '<엄마로 태어난 여자는 없다> 송주연 지음'

표지에 박힌 내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상했다. 기쁨의 눈물이 터질 것이라 예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낯설고 어색할 뿐이었다. 분명 내가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고, 3번 넘게 읽으며 오탈자를 잡아내면서 거의 외우다시피 한 그 글들이 맞았다. 그런데 진짜 '책'으로 내 글을 만나니 영 내가 쓴 글 같지가 않았다. 동시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내가 실명으로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책으로 낸 게 과연 잘한 것일까? 출간을 축하해주긴 했지만, 남편이나 시가 식구들이 이 책을 읽으면 어떤 생각이 들까?'

책 <엄마로 태어난 여자는 없다>는 앞서 이야기한 두 연재물을 바탕으로 내가 경험한 한국의 가부장제, 그리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써왔던 일들을 담았다.

'시가 중심 가부장제'가 내게 준 영향들을 에피소드 위주로 풀어가면서 우리 사회의 구조와 마음 깊이 새겨진 가부장적 사고방식들이 어떻게 여성들의 삶을 옥죄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아직 완전하진 않지만, 나 자신을 다시 찾아온 여정을 들려주고 싶었다. 나와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많은 한국의 여성들이 용기 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그런데 막상 책을 받아보니, 집필하는 동안 염두에 두지 않았던 나의 가족들이 보였다. 남편과 시가의 '치부'일 수도 있는 에피소드들이 꽤 있는데 가족들이 어떻게 읽을지 두려움이 엄습했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 부디 이 책이 시가와 남편에 대한 비난이 아닌 사회시스템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임을, 그런 가운데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드라마 <외출>을 만나다
 
드라마 <외출>의 한장면. 가부장적 폭력이 여성의 삶을 어떻게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매우 잘 그려냈다.
 드라마 <외출>의 한장면. 가부장적 폭력이 여성의 삶을 어떻게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매우 잘 그려냈다.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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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tvN에서 가정의 달 특집으로 마련한 드라마 <외출>을 봤다. <외출>은 친정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직장생활을 하는 정은(한혜진)과 친정엄마 순옥(김미경)의 갈등을 주축으로 워킹맘들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다.

첫 장면. 늦게까지 아이를 봐주는 친정엄마에게 미안해하며 회식을 하던 정은은 남편 우철(김태훈)에게 전화를 걸어 "왜 나만 종종거리는 거 같지?"라고 따져 묻는다. 그 순간 나는 이 드라마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렇게 시작된 드라마는 딸 유나(정서연)가 베란다에서 추락해 사망하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으로 이어진다. 이에 정은과 순옥은 죄책감으로 피폐해져 간다. 하지만, 아빠인 우철은 힘들지언정 죄책감에 몸부림치진 않는다.

모든 게 자신의 책임인 양 삶을 포기하려는 순옥과 엄마에 대한 원망과 죄책감 사이에서 괴로운 정은의 모습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갇힌 듯 살아가는 한국 여성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러던 정은은 유나가 사망한 날 순옥이 가정폭력의 가해자였던 아빠의 전화 때문에 외출했던 사실을 알아낸다. 돈을 요구하는 남편으로부터 딸을 보호하기 위해 순옥은 잠시 외출을 했고, 그 사이 홀로 있던 유나가 추락한 것이다. 정은은 비로소 깨닫는다. 유나의 사망은 자신도, 엄마도 아닌 '가부장적 폭력'의 화신인 아버지 때문이었음을! 정은은 마침내 아버지를 불러내 분명히 말한다.

"내 새끼 죽인 건 당신이야. 당신에게 벗어나서 행복하게 살려고 우리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정은의 이 대사는 가부장 사회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고 있는 많은 여성들을 떠올리게 했다. 내가 책에 담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런 것이었다.

엄마가 되고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던 죄책감들, 나를 잃어가며 느꼈던 우울과 불안. 나는 한동안 이 모든 힘든 감정들의 원인이 '나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었다. 때문에 더 좋은 엄마, 좋은 아내, 좋은 며느리가 되고자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우울해졌고 '나 자신'은 사라져갔다.

이런 악순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한국 사회를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되면서였다. 한 걸음 떨어져 우리 사회를 바라보자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나의 죄책감과 불안, 우울이 나 때문이 아니라 '가부장적인 문화'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이다. 

이후 난 나의 일상과 마음 속 깊이 자리하고 있는 가부장적 고정관념들에서 벗어 나고자 애써왔다. 그리고 나 자신은 물론, 가족들과 화해하며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드라마 속 정은도 그랬다. 자신의 행복을 앗아간 것이 '가부장의 폭력'임을 깨달은 후, 정은의 분노는 올바른 곳을 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친정엄마와 화해하며 슬픔 속에서도 다시 살아갈 용기를 낸다. 드라마 말미 정은은 아픈 친정엄마를 돌보기 위해 휴직을 한다. 그리고 이를 무책임하다고 비난하는 남자 직원들에게 이렇게 항변한다.

"왜 엄마들은 항상 죄인이 되는 걸까요? 몰랐다고 하지 마세요. 그것도 죄예요. 그리고 모르지 않으셨잖아요!"

속이 다 후련해졌다. 내가 책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을 드라마 속 인물을 통해 다시 들으니 이처럼 통쾌할 수가 없었다. 문득, 책을 쓰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의 정은이 내 마음을 대변했듯 내 책이 누군가에게 마음의 언어를 찾아줄 수도 있을 것 같아서다.

이 책이 가부장 문화의 폐해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해 왔던 사람들에게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싶었다. 우리 가족에게도 더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리고 실제 그런 일이 벌어졌다. 며칠 전, 남편이 내게 이런 쪽지를 남겼다.

'책 다 읽었어. 읽으면서 내가 했던 말들을 글로 보니 너무 아프게 와닿더라. 어떤 것들이 불평등한 건지, 거기에 내가 어떤 기여를 했는지 알게 해줘서 고마워. 주변에 이 책을 많이 알려야겠어. 많은 사람들이 이런 걸 알았음 좋겠어.'

뭉클했다. 두려움이 줄어들었다. 책을 통해 소통하고 연대하고픈 마음이 솟았다. 드라마 속 정은의 말처럼 "몰라서 그랬다"는 것 역시 죄이다. 심지어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다. 세상에 '엄마로 태어난 여자는 없다'는 것을. 단지 익숙하니까, 갈등하면 서로 불편하니까 모르는 척 했을 뿐이다. 

이젠 더 이상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 부부가 함께 책을 읽으며 일상에 스며든 가부장제의 폐해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으면 좋겠다. 여성들은 세뇌된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기를, 남성들은 나의 남편이 알아챈 것들에 공감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각자의 방식으로 조금 더 평등한 일상을 만들어갔으면 좋겠다. 

그럴 때 성별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가 보다 온전한 한 사람으로 '나답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책을 세상에 내 놓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serenity153)에도 실립니다.


엄마로 태어난 여자는 없다 - 무엇이 여자의 온전한 삶을 가로막는가

송주연 (지은이), 스몰빅에듀(2020)


태그:#엄마, #여자 , #가부장제 , #페미니즘, #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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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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