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국수를 삶아 열무 비빔국수를 할 참이었다. 몇 달 전 시댁에서 가져온 중면을 꺼냈다. 어머님 댁에 선물로 들어온 것이라 했다. 예전엔 국수도 귀한 선물이었다는데. 슈퍼에 흔한 비닐 포장이 아니라 종이로 국수를 한번 말고 얇은 비닐로 감싸져 있었다. 지역 이름이 붙은 국수의 종이 포장에는 생산자의 이름과 사진까지 있어 더 믿음이 갔다.

우리 집은 국수를 자주 해먹지 않는다. 그건 전적으로 나의 영향일 것이다. 국수 삶는 일은 늘 번거롭게 느껴졌고 국수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엄마가 김치를 썰어 넣어 해주시던 비빔 국수는 가끔 생각난다. 엄마가 국수 삶던 기억과 함께. 엄마는 국수를 삶을 때면 끓고 있는 국수를 한 가닥 건져내어 찬물에 휘휘 흔들고 입으로 쏙 빨아들이곤 했다. "아, 맛있다!"라면서.

냄비에 물을 넉넉히 부어 끓였다. 엄마는 국수 삶을 때 물이 넉넉해야 된다고 했다. 끓는 물에 국수를 넣고 국수가 끓어오르면 찬물을 부어 다시 끓이는 것을 세 번 하라고 일렀다. 끓어오르면 찬물 한 컵 붓고 다시 끓어오르면 찬물 한 컵 붓기를 꼭 세 번. 그래야 국수가 탄력 있게 삶아진다고 했다. 

큰 이모 댁에 외가 식구들이 많이 모였던 날이다. 큰 외삼촌은 지방에 사시기도 했고 거동도 편치 않아 서울 나들이를 자주 하지 않으셨는데 갑자기 일을 보러 오셨다가 큰 이모 댁에 들른 것이다. 서울 사는 나머지 형제들은 큰 외삼촌을 뵈려고 자식들까지 대동하여 큰 이모의 작은 아파트에 모였다. 방과 거실까지 사람들이 그득했다.

엄마는 여덟 남매 중에서 넷째였고 큰 딸이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엄마나 엄마의 형제들에게는 큰 외삼촌이 부모나 마찬가지였을 것이었다. 엄마는 모처럼 서울 오신 큰 외삼촌을 우리집에 모시고 싶어 했다. 우리 집도 큰 이모 댁에서 멀지 않았지만 우리는 형편이 안 좋아 그나마 있던 작은 아파트를 팔고 이모 댁 보다 더 작은 전셋집에 살고 있었다. 엄마는 큰 외삼촌을 우리 집에 모시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큰 외삼촌네는 얼른 한 끼 드시고 집으로 돌아가셔야 한다고 했다. 급하게 오신 탓에 음식 장만을 따로 하지 못한 이모들은 총출동한 대식구에게 쉽고 빠르게 국수를 대접하기로 했다. 비좁은 부엌에 이모들과 외숙모들이 분주했다.

큰 들통에 물을 끓여 한 바구니 삶아서 건져내고 또 삶기를 몇 번. 나는 그릇에 담긴 국수를 나르느라 부지런히 주방과 방을 왔다 갔다 하며 그분들의 모습을 보았다. 외숙모들과 이모들은 국수를 삶을 때 찬물을 세 번 넣을지 두 번 넣을지 의견이 분분했다. 세 번 넣으면 너무 분다고, 두 번 넣으면 국수가 덜 익는다고. 서로 자신이 옳다며 옥신각신하던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정겨워 보였다.

끓어오르는 국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그날이 기억났다. 큰 이모 댁에서의 그날은 둘째 외삼촌의 집들이로 엄마의 형제들이 모두 모인 날보다 훨씬 따뜻하게 남아 있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음식이 아니라도, 넓고 편안한 집이 아니어도, 부모님 대신으로 생각하던 큰 외삼촌을 위해 맛있는 국수 한 그릇을 대접하려고 들뜬 얼굴을 했던 이모가, 엄마가 떠올랐다.

그날 엄마와 이모가 큰 외삼촌에게 대접했던 국수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예로부터 국수는 잔칫날에 먹는 음식이라고 했다. 생일에는 장수를, 결혼식에는 좋은 인연을 기원하는 뜻이라고. 잔칫날은 아니지만 큰 외삼촌의 건강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담아 국수를 차려낸 것은 아니었을까.

엄마네 여덟 남매 중 엄마를 제외한 형제들은 모두 건강하게 살고 계신다. 그분들 중 누가 그날의 국수 삶기를 기억할까? 아마 모를 것이다. 엄마가 부모님께 손수 한 끼 식사를 대접하듯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는 것을.

친정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일곱 번 째 어버이날이다. 이제는 어버이날이 와도 어느 정도는 무덤덤하게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시부모님 댁에 갈 때면 나는 이제 갈 곳이 없구나, 불쑥 슬퍼지기도 하지만.

오늘은 엄마가 삶은 것만큼 국수가 잘 삶아졌다. 새콤한 열무김치를 넣고 참기름과 깨소금과 설탕 약간. 손으로 슬슬 무쳐서 그릇에 담는다. 엄마에게 대접하지 못한 국수 한 그릇을 내 아이들과 맛있게 먹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나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글을 씁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