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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무척 계획적인 사람이다. 공부를 할 때도,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그랬고 일상적이고 자잘한 집안 일도 계획을 세운다. 계획이 있어야 몸이 움직여진다.

여행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언제, 어디로, 어떻게, 어떤 것을 즐기고 올 것인지를 완벽하게 계획하고 준비한다. 해외여행을 할 때도 그렇지만, 두세 달, 그 이전부터 여행 준비가 시작된다. 그렇게 계획해도 여행지에서는 변수가 존재하지만 변수가 생기지 않도록 최대한 꼼꼼히 준비한다. 그래서 여행이 휴식이 아닌 고된 관광이 되는 경우가 많다.

남편은 실행력이 뛰어나다. 나름 계획을 세우는지 모르겠지만 계획을 말하거나 상의하지 않는다. 머릿속에 생각하는 것만으로 바로 실행하는 식이다. 그렇게 해도 크게 탈이 없기 때문에 몇 달을 꼼꼼히 계획한 내 계획의 변수는 남편의 몫이다.

일정이 틀어지거나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것이 있을 때 남편의 즉흥적 융통성이 발휘된다. 이때가 비로소 관광이 아닌 여행이 되는 지점이다. 둘이 서로 나름 상호보완적이다.

그렇지만 국내를 여행할 때에는 따로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그날이 그날인 삶에서 회의가 느껴질 때, 무계획에 가까운 여행을 남편이 주도한다. 일정 자체도 길어야 이삼일 정도, 주말을 끼고 어디로든 바로 출발하고 동시에 여행이 시작된다. 배낭 하나에 하루 정도 집 밖에서 생활할 수 있는 정도의 짐을 꾸리고 바로 출발한다.

지금은 5월, 코로나19로 인해 문을 닫았던 내부 관람 시설들이 다시 문을 여는 곳이 많아졌다. 국문학을 전공했고 직업이 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이었던 나를 배려해 남편은 여행 일정에 문학관을 꼭 넣는다. 꽤 많은 문인들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문학관이 존재한다는 것도 최근 몇 곳을 찾아 둘러보며 알게 된 사실이다.

박경리 문학관이나 최명희 문학관은 이전에 방문 기회가 있어서 둘러보았고,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 문학관은 최근 가 본 곳이다. 김유정 문학관은 서울에서 하루 코스로 다녀올 수 있는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어서 문학체험으로 동아리 학생들과 찾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들을 인솔하며 보는 것과 혼자서 즐기는 문학 기행은 많이 다르다.
 
이효석문학관 이효석문학관 입구
▲ 이효석문학관 이효석문학관 입구
ⓒ 장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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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들른 곳은 봉평에 위치한 이효석 문학관이다. 첫 방문이다. 소금을 뿌린 듯한 메밀밭의 풍경은 없지만 봄과 문학의 향기가 주는 느낌이 넘치는 곳이다. 전망대에 올라서 내려다보는 마을의 정경은 모든 걸 감싸 안은 듯한 포실포실한 땅이 한눈에 들어온다.

문학관이 위치한 곳과 작품의 배경이 되는 메밀꽃 풍경을 볼 수 있는 곳, 대화장이 열리는 곳은 꽤 멀다. 때문에 이곳에서는 볼 수 없지만 단장된 밭은 메밀 파종을 준비 중인 듯 나란히 정돈되어 있었다.

작가의 작품 속 세계를 오롯이 즐기려면 콩 포기, 옥수수 잎새가 달에 푸르게 젖어드는, 벼가 익고 들깨 향기가 살에까지 배어들 정도로 무르익은, 콩꼬투리가 지천으로 널려 벌어져 있는 계절이라야 가능하다. 

아쉬운 마음이 있지만, 작품 속의 풍경을 눈으로 보는 것은 다음 기회로 넘겨야 할 것 같다. 문학관 안에 메밀밭의 흐드러진 풍경을 영상으로 재현해 놓은 것을 보는 것으로 우선 만족한다.  
 
이효석 생가 문학관 내 이효석 생가 복원
▲ 이효석 생가 문학관 내 이효석 생가 복원
ⓒ 장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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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서의 아름다운 표현을 읽다 보면 계절감을 향기로, 눈으로, 청각 등 오감을 동원하게 된다. 아마도 그런 표현 때문에 이효석의 작품 세계를 문학적 표현의 아름다움 측면에서 현장에서는 교육하고 있는 것이지 싶다.
 
들에는 벼가 익을 대로 익어서 숙였고 욱신한 들깨 향기가 살에까지 배어들고 오랍뜰에는 마른 옥수수 이삭과 익은 고추 송이와 콩꼬투리가 지천으로 널려진다.(이효석, <영서의 기억>)

동리에서 제일 먼저 꽃피는 것도 그 살구나무여서 한참 제철이면 찬란한 꽃송이와 향기 속에 온통 집은 묻혀 무르녹은 꿈을 싸주는 듯도 하지만 잎이 피고 열매가 맺기 시작하면 집은 더한층 그 속에 묻혀 버려서 밖에서는 도저히 집 안을 엿볼 수 없는 형세가 되었다.(이효석, <개살구>)

짐승 같은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달의 모습은 문학관 한쪽에 연인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달의 정원을 마련해 놓고 있다. 아직 코로나19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황이 아니어서 분위기가 요란스럽지는 않지만, 해가 쨍한 날에 작품 속 세계에 몰입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죽은 듯 고요한 밤중의 달의 숨소리도 다음을 기약한다.
 
밤 대추의 과실도 제사에 쓰고도 남으리만치 뜯어 들였고 현 씨는 마을 여자들과 날마다 먼 산에 가서는 서리 맞은 머루 다래 돌배에다 동백을 몇 광주리고 따 왔다.(이효석, <산협>)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즘생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왼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혀 하얬었다.(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작가의 연보를 읽다 보니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작가의 아들이 4개 국어로 번역해서 표준 도서번호까지 받았다는 설명과 함께 <메밀꽃 필 무렵>의 번역본이 눈에 띈다. 커피와 버터를 바른 토스트를 즐겨 먹었다는, 피아노를 치던 작가의 서구적 취향만큼이나, 작가가 평양에서 살 때의 그대로를 재현해 놓았다는 푸른 집은 넓지는 않지만 지금 보기에도 세련되고 클래식하게 꾸며져 있다.
 
이효석 푸른 집 이효석 푸른 집 거실(평양에서 실제 살았던 집 재현)
▲ 이효석 푸른 집 이효석 푸른 집 거실(평양에서 실제 살았던 집 재현)
ⓒ 장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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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푸른 집 이효석 푸른 집 거실(평양에서 실제 살았던 집 재현)
▲ 이효석 푸른 집 이효석 푸른 집 거실(평양에서 실제 살았던 집 재현)
ⓒ 장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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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총독부에서 잠깐 있으며 작가가 느낀 회의와 비애를 짐작해 본다. 지식인으로서, 작가로서 식민지 조선에서의 자신의 역할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에 젊은 그의 이상은 굶주렸던 것 같다.

작가 이상이 그랬고, 김유정이 그랬고, 정지용과 구인회의 멤버 모두가 그랬을 것이다. 문학적 지향과 현실 사이의 끝없는 번뇌는, 이념과 사상을 배제한 채 자연과 그곳에 사는 삶의 모습들을 그리거나 서구의 모던한 세계를 동경하는 데에만 펜을 들도록 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들의 생이 짧게 마감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지 않았을까.

1920년대와 30년대 활동했던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그들의 천재적 재능이 안타깝다. 그들의 청춘이 아깝기도 하다. 조금 더 길게 아름답고 순수한 언어의 향연을 보여주었더라면, 빛나는 문학적 세계를 펼쳐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혹여 지극한 쓸쓸함 속에서 살아왔을 그들의 생애가, 혹여 그들의 마지막 웃음이 그립다.
 
돌배꽃 필 때면 뻐꾸기 울고 
뻐꾸기 울면 하늘이 파아랗나니 
배나무 그늘이 가슴에 푸르고 
연두색 잎새 햇볕에 손뼉 치고 
우거진 가지마다 쫙 펴진 가지마다 웃음 또 웃음.... (이효석, <소설>)

문학관을 둘러보다 보니 이효석의 다른 작품들이 눈에 띈다.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메밀꽃 필 무렵>이지만, 그가 남긴 수필도 여러 작품들이 있다. 이효석의 표현대로 '일각이 천금의 값이 나간다는 봄날 저녁'에 그를 만난 시간을 정리하며 천금의 값을 감히 헤아려 본다.  

그의 작품을 빠짐없이 다시 읽고 방문해서 그의 작품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고 싶다. 이번에 보지 못한 메밀꽃이 소금을 뿌린 듯 피어있는 달밤의 모습도, 달의 숨소리도 그때 꼭 마주할 수 있기를 기약해 본다. 
 
봉평 이효석 흔적 봉평의 이효석 흔적
▲ 봉평 이효석 흔적 봉평의 이효석 흔적
ⓒ 장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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