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19년 12월 24일 
"당신은 언제 마지막으로 새로운 경험을 하셨나요?"


광고를 보았다. 수도 없이 많이. 아르바이트하던 실내 행사장 바로 위에 있는 전광판에선 5분을 주기로 한 문구가 흘러나왔다.

"당신은 언제 마지막으로 새로운 경험을 하셨나요?"

광고 카피이니 라이터가 대단히 힘을 주었겠으나 차 광고에 쓰인 카피인 이상 당장 나와 상관 있는 문장은 아니었다. 신경을 쓸 필요는 없겠지. 그렇다면 나오거나 말거나 일을 하면 그만 아닌가?

문제는, 전광판의 소리를 내가 직접 차단할 수는 없다는 데에 있었다.

주의를 기울이고 있든 아니면 손님을 맞고 매장을 보는 일로 바쁘든, 문구는 벌떼처럼 귀에 피가 멈추질 않을 지경으로 자꾸만 와서 박혔다.

그래서 나는 결국 일주일 만에 광고 카피에 굴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나의 지난 2~3년간의 삶은 지극히도 반복적이고 단조로워서, 전혀 놀랍지도 새롭지도 않았다고.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그동안 뭘 했지? 떠올려 보노라면 잠, 밥, 그 외 늘 하던 일 몇 가지만이 이리 돌고 저리 돌고 뱅뱅 돌았다. 아르바이트야 단기 행사 위주로 자잘하게 했을 뿐이었다.

대외 활동도 했었지만 그건 '첫 순간'이라고 부르기엔 모자란, 그저 해야만 했던 일들의 모음일 뿐이니까 새로운 경험으로 치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여행? 마지막으로 간 이색 맛집? 아니지, 그런 자잘한 분류 말고,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었고, 겪어보니 심장이 뛸 만큼 감동적이었던 순간이 있었나? 없었다.

내가 운동, 그 중에서도 러닝을 시작한 건 그런 계기에서였다. 이제부터라도 그 감동적인 순간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다. 수많은 운동 중에서도 하필 러닝을 고른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상대적으로 비용이 적게 들며,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운동은 러닝밖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020년 1월 17일 
하기 싫은 것을 한 달이나 참고 했다면


아르바이트 월급이 들어오자마자 운동화를 샀다. 인터넷을 검색해 초보자도 시키는 대로만 하면 2달 만에 30분 동안 안 쉬고 뛸 만큼 튼튼한 체력과 지구력을 키워준다는 <런데이> 을 다운받았다. 마침 집 근처에는 공원이 있어 뛸 장소는 차고도 남았다.

이제 빛이 찬란하게 빛나며 희망찬 음악과 함께 감동을 한 시청자들이 손뼉를 칠 일만 남았다.

그랬어야만 했는데.

막상 뛰어 보니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운동을 해본 적이 없는 내 체력으로는 30초를 쉬지 않고 달리는 것도 벅찬 게 아닌가.

 
1월 17일 첫 달리기 기록
 1월 17일 첫 달리기 기록
ⓒ 서울잡스

관련사진보기

 

힘들면 좀 더 천천히 가되 절대 걷지는 말라는 어플리케이션 속 보이스 트레이너의 말에 꾸역꾸역 1분, 2분을 채웠지만 뛰는 속도는 걷는 것보다 느렸다. 내가 달리던 트랙은 늘 한결같이 넓어 보였고 진전은 없어 보였다.

그 상태로 꾸역꾸역 한 달을 채우자 나오긴 나오는데 너무나도 달리기가 싫어 뛰면서도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이렇게 체력이 없는데 대체 어떻게 30분을 달리게 될 수 있을까? 과장 광고가 아닐까? 의심이 피어나기도 하고, 힘들어 그만 달리고 싶은데도 좀처럼 쉬라고 하질 않는 보이스 코치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내가 거기서 포기하지 않은 것은, 또한 그 보이스 코치 덕분이었다.

그래, 힘들면 안 뛰면 되지! 야심 차게 선언하고 손을 털고 운동화를 도로 신발장에 집어넣은 날, 그리고 그 다음날, 다다음 날, 일주일이 훌쩍 지나던 날, 늘 뛰러 나가던 시간이 되었을 때 내 마음은 꾸준히 어딘가 허전했다.

달리기야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좀 더 간절하게 그리웠던 쪽은 보이스 코치였다. 생각해보면, 단지 내가 1~2분 뛴 것을 가지고 잘하셨다고 칭찬해주고, 더는 뛰지 못할 것 같을 때 혼자 달리더라도 제가 곁에 있다며 격려해주는 그런 친절한 사람은 보이스 코치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유치하지만 뛸 때마다 하루하루 어플리케이션에 코스 완료 도장을 찍는 재미도 있었다. 처음엔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한 달쯤 지나니 제법 그럴싸하게 모인 코스들을 보고 있자니 소소하지만 소중한 만족감이 드는 게 아닌가.

그래, 내가 하기 싫은 것을 한 달이나 참고서 꼬박꼬박 안 빼먹고 했다면, 세상 다른 모든 일들도 이처럼 이겨내어 좀 더 커다란 성취를 할 수 있을 테다.

운동화를 다시 신기까지는 일주일하고도 반이 채 못 미치게 걸렸다.
 
3월 26일, 잠실 철교 위
 3월 26일, 잠실 철교 위
ⓒ 서울잡스

관련사진보기

 
2020년 3월 26일
자꾸만 더 멀리 가보고 싶어


지겹도록 똑같은 트랙을 쳇바퀴 굴리듯 감흥 없이 돌았던 것이 의욕 저하의 원인이 되었겠구나 싶어 나는 강을 따라 풍경을 보면서 뛰기로 했다. 그 한 달 동안 내가 얼마나 운동을 열심히 했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달려보기로 했다. 결과는 제법 놀라웠다. 

내가 평소에 산책으로 최대한 멀리 걸었던 코스를 훌쩍 뛰어넘어 내가 지금껏 가보지도 않았던 거리까지 발이 닿는 게 아닌가. 같은 동네에서 20여 년이 넘게 살았지만, 강변 산책길을 그만큼 멀리 가본 것은 처음이었다.

맞은편 강둑에선 차나 지하철에서만 보던 익숙한 건물들이 스쳐지나갔고 내가 저기까지 갔다 오리라곤 상상도 못 해본 지형지물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가까워졌다.

결과도 없이 힘들게 체력 낭비만 한다고 생각했던 건 순전히 내 착각이었다.

 
3월 26일 달리기 기록
 3월 26일 달리기 기록
ⓒ 서울잡스

관련사진보기


다시 열정적으로 달리게 된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 무렵,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딘가 몸 선이 아주아주 조금은 달라진 것도 같았다. 사소하지만, 내가 무언가를 드디어 해냈다는 즐거움이 밀려왔다. 오늘은 저기까지 뛰고, 내일은 반대 방향으로 거기까지 뛰고. 처음 가보는 곳은 점점 더 많아졌다.

그 넓은 한강을 뛰어서 건너 반대편 강둑에 발 도장을 찍고 다시 돌아오던 날, 하늘은 흐리고 공기는 안 좋았지만, 이때껏 살면서 이렇게 벅차오른 날은 많지 않았다. 이걸 이렇게 해냈으니 다음에 다른 분야에 도전하게 되면 이것보다 더 잘할 것이라는 자신감은 여느 때보다도 더 불타올랐다.

2020년 05월 1일
몇 년 만인지 모를 자신감과 기대감


비교적 최근에, 이번에도 한 달 하고 그만둬버릴까 봐 못 사고 있었던 러닝용 레깅스를 샀다. 이 정도는 나에게 투자해도 결괏값이 좋으리라는 밝은 전망에 통풍이 잘 되는 운동용 윗옷을 사고 달릴 때 마주치는 사람들이 입고 다니던 얇은 재킷도 샀다.

나 자신에게 투자하는 재미를 느껴본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자신감과 기대감과 미래에 대한 희망.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아무리 먼 길을 가더라도 오늘 몫의 작은 짐만 짊어지면 그게 쌓여서 모르는 사이에 큰 진전으로 보답받게 된다는 깨달음이었다.

비록 지금 당장은 코로나19라는 재난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어 목표를 정하는 순간부터 각종 제한이 붙고 나중에도 거듭 수정해야만 하겠지만, 그럼에도 크고 작게 쌓아 올린 자신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할 수 있는 만큼씩 일을 해나간다면 어떨까.

덧붙이는 글 | 서울잡스 플랫폼에 게재된 글입니다.


태그:#코로나, #청년, #취준생, #서울잡스
댓글

일을 고민하는 청년들을 연결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코로나19, 난 건강해졌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