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서른여섯에 막내 남동생을 낳았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크게 늦은 것은 아니지만, 1980년대로써는 꽤나 늦은 출산이었다. 장녀인 나를 낳은 후 내리 세 명의 딸을 낳은 후에야 힘들게 얻은 아들이었으니, 그간의 고생이 짐작되고도 남는다.

엄마가 셋째 여동생을 출산한 날, 해산을 도우러 오셨던 할머니는 서늘한 한숨과 함께 집을 나섰고, 그 장면은 어렸던 나의 기억 속에 깊게 남아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까지도 그분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할머니는 아들을 낳지 못하던 며느리가 서운했고 우리 세 자매가 반가울 리 없었다. 하지만, 우리 집안에 아들이 온 후로 할머니의 노여움은 누그러졌고, 부모님에 대한 서운함도 조금은 거둬졌다.

완고한 집안의 장남이던 아버지는 그제야 가문에 대한 부담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났을 것이고, 젊은 날을 객지에서 보내던 이전 세대의 장남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막내 남동생의 출생은 가족 안의 긴장을 한순간 풀어냈다. 장녀인 내게 이런 일련의 사건은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그 후로의 내 삶에 끝없이 영향을 미쳤다. 

동시대를 살아 온 다섯 남매의 이야기
 
 영화 <이장> 스틸컷

영화 <이장> 스틸컷 ⓒ 인디스토리

 
내가 오늘 소개하고 싶은 영화 <이장>(2020)은 대를 이어 전해질 수밖에 없었던, 동시대를 살아낸 아이들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다. 자칫 심각해질 수 있는 주제였음에도, 코로나19로 세 달 만에 문을 연 독립영화관에서 만난 작품이, 놀랍게 유쾌했다는 것도 행운이었다.

영화는 혜영네 다섯 남매의 사정을 친절하게 설명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국 사회를 살아오며 우리네 모든 자식들이 함께 견뎌낸 시간을 통해, 남매의 사정을 알아채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성인이 된 다섯 명의 아이들은 저마다의 사정으로 각자의 삶을 견뎌내어야 했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로는 그들 간의 거리도 점점 멀어진다.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를 옮겨야 하는 상황이 없었다면, 이들은 꽤나 오랫동안 만나지 않고 지냈을 수도 있었다. 

주말 가족 드라마에서는 여전히, 커다란 밥상에서 시시콜콜한 일상들을 나누며 밥을 같이 먹는 것이 가족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중학교를 졸업하며 집을 떠나야 했던 '가출'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기껏해야 명절을 구실로 일 년에 한두 번 모이던 형제들도, 각자의 가정을 갖게 되면서는 그마저도 쉽지 않은 게 현실이고 말이다. 주말 드라마에서 보이는 대가족의 모습은, 이제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아틀란티스의 모습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 <이장>에서 보여준 현실적인 가족의 모습은 무척이나 반가웠다. 
 
 영화 <이장> 스틸컷

영화 <이장> 스틸컷 ⓒ 인디스토리

 
영화의 등장인물 중 가장 어른이신 큰아버지네 부부의 삶을 상상해 보자. 1940년대 중/후반쯤 태어나 전쟁을 겪었고, 보릿고개를 견뎠고, 산업화와 함께 나이를 먹어갔을 것이다. 그 사이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이 결혼을 했고 자신의 집 근처에 살림을 차리도록 거처를 마련해 주었을 것이다. 엄해야 했던 남편과 순종을 강요받는 아내를 짐작할 수 있지만, 당시로써는 '평범한 가족'의 모습이었을 테고 아이들도 계속 태어났을 것이다. 큰 딸 혜영이 왔을 때는, 아쉬움은 있었겠지만 큰딸은 살림 밑천이라며 동생을 위로했을 것이고, 큰어머니는 고생한 동서에게 정성스럽게 끓여낸 미역국을 먹였을 것이다.

그런데, 연이어 얻은 두 명의 자식들이 아들이 아니었을 때는, 나의 할머니가 그러셨듯, 동생 부부가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렇게 막내딸인 혜연이 태어났던 날의 실망감은, 집안의 아들인 성락이 태어날 때까지 이어졌을 것이고, 아들의 탄생으로만 해결할 수 있던 깊이였을 것이다. 이렇게 세상에 나온 다섯 명의 아이들은 각자의 상처를 지닌 채 성장한다.

집안에서 그들의 위치가 전해주는 부담감을 그대로 표현한 배우들의 연기는, 무척이나 훌륭하다. 특히, 전혀 닮지 않아 보이는 네 명의 자매가 보여주는 앙상블에 놀라서, 영화를 보는 내내 몇 번이나 큰 소리로 웃었는지 모른다.

"장남 없이 어떻게 파묘를 한다는 말이야. 얼른 가서 장남 찾아와!" (큰아버지)

대한민국의 1인당 GDP가 3천 불에서 3만 불로 가파르게 상승하는 동안, 큰아버지가 살아왔던 시대의 규칙은 생각보다 빨리 가치를 잃었다. 아이들은 아버지들이 살았던 세상의 규칙을 끝없이 거부하며 성장했고, 그런 아이들이 많아질수록 세상의 갈등은 날카로워졌다.

'버릇없는 요즘 것들'에 대한 한탄은 이제 채 한 세대를 넘기지 못할 만큼 가속도가 붙었지만, 아이들에게 태어날 때부터 씌워진 규범의 굴레를 벗겨낼 정도의 힘은 없었다. 가계에 짓눌린 장남은 장남대로, 일상화된 성차별에 상처를 입는 집안의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그들의 역할을 견디기 힘들다.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해 줍시다." (큰어머니)

앞으로 또 한세대가 지나간 대한민국을 상상해본다. 영화 속 다섯 남매의 다음 세대에게도 구시대의 규범이 무거운 굴레가 될까? 힘들 것이다. 큰아버지의 세대가 아이들의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했음에도 변해버린 세상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듯, 아버지 세대가 지키려 했던 것들이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목격한다.

집안의 남자들만을 위한 밥상을 따로 차려내야 했던 나의 어머니는, 어느덧 손주들과 함께하는 식사를 즐길 만큼의 나이가 되셨다.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논쟁 이전에, 우리는 생활을 통해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아버지 세대는 아이들이 원하는 것들을 선택하며 2020년의 세상을 만들어 왔다. 아마, 나의 조카들도 계속 '버릇없는 요즘 것들'의 비난을 받으며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씌워진 가족 규범의 굴레는, 훨씬 가벼울 것이다. 

"이제는 너희들뿐이여. 어머니, 아버지 기일에는 너희들끼리 모여서 같이 밥이라도 먹어." (큰어머니)

'장녀다움'을 포기하기로 했다

우리 집 네 명의 아이들도 여기저기 흩어져서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자주 모여서 시시콜콜한 삶의 이야기들을 나누지는 못하지만, 아주 멀지는 않은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몇 해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나는 아주 큰 결심을 했다. 장녀가 가져야 한다고 여겼던 '장녀다운' 엄격함을 포기하기로 한 것이다.

그 후로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했고, 큰언니라는 이유로 표현에 인색했던 가족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기로 했다. 그렇게 억지로 덧씌웠던 '장녀다움'을 포기했더니, 가족들을 대하는 것이 말할 수 없이 편안해진 것은 물론이다. 아버지가 계셨을 때에 좀 더 일찍 이랬어야 하는 후회는 있지만, 어쩌겠는가? 이제라도 알아챘음에 감사할 수밖에.

나는 내가 느낀 이런 자유를, 동생들도 느꼈으면 좋겠다. 태어나면서부터 입었을지 모르는 상처를 숨기고자, 은연중에 스스로에게 덧씌웠던 '집안에서의 역할'로 인한 구속을 벗어던진 자유를 말이다. 물론, 동시대를 힘겹게 견뎌왔을 우리의 모든 아들딸들, 영화 속의 혜영이네 오 남매에게도 응원을 건넨다. 너무나 사랑스러웠던 그들이, 벌써 그립다.
오늘날의 영화읽기 이장 가부장제 아이들의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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