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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의 전문가인 전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장군. 
뒤의 '보안완벽' 휘호가 김 장군이 보안 전문가임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다.
▲ 김재규 장군 보안의 전문가인 전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장군. 뒤의 "보안완벽" 휘호가 김 장군이 보안 전문가임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다.
ⓒ 남산의 부장, 김충식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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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부장관의 업적과는 상관없이, 그는 장관 발령식장에서 박정희를 쏘고 자신도 자결하여 유신독재체제를 무너뜨리려 했다고 한다.

앞에서 소개한대로 긴급조치 선포, 민청학련사건 등 민주주의 기본가치와 헌정질서가 크게 훼손되고 있던 시점이다. 변호인단의 「항소이유서」중 관련 부분이다.

3군단장에서 유정회 국회의원을 거쳐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옮긴 뒤에도 역시 유신헌법은 안 되겠다는 마음이 점점 굳어져 독재체제를 내 목숨하나 바쳐 바꾸어 버릴까 하는 생각을 갖기 시작하다가 마침 1974. 9. 건설부장관으로 발령받고 발령장을 받으러 가는 때 박 대통령을 쏘고 피고인도 자결하여 독재체제를 무너뜨리려는 결의를 갖고,

국민과 어머니, 집사람, 딸 및 남동생들에게 전할 유서 다섯 통을 준비하여 자택 피고인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두고 조그마한 태극기의 네 면에 민주, 인권, 자유, 평등이라 쓴 것을 피고인의 포켓 속에 넣고 사령장을 받으러 들어갔으나 결행하지 못하고 위 유서와 태극기는 그대로 갖고 있다가,

대통령의 1975년 초도 순시 때에 똑같은 생각으로 건설부장관실에 있는 태극기의 축 늘어진 귀퉁이를 면도칼로 잘라서 그 속에 권총을 넣어 두었다가 순시하는 대통령을 피고인의 목숨과 함께 끊겠다고 결의했으나 막상 대통령과 만난 뒤 대화해보면 모진 마음이 약해져서 그 생각을 버리고 위에 말한 유서들과 태극기를 태워 버렸다는 것입니다. (주석 11)

 
박정희(중앙)와 김재규(오른쪽), 그리고 차지철(왼족)
 박정희(중앙)와 김재규(오른쪽), 그리고 차지철(왼족)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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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단의 이와 같은 「항소이유서」는 변호인들이 옥중에서 김재규와 접견한 내용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객관적인 입증자료는 없을까.

이해학 목사는 긴급조치 1호 위반혐의로 15년 징역을 선고받고 안양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우연찮게 전 『사상계』 사장 장준하와 같은 방이었다.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이 된 장준하는 광복 후 백범 김구의 비서를 거쳐 월간 『사상계』를 발행하다가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잡지를 넘기고 정계에 입문,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옥중 당선되었다. 그리고 줄곧 일본군 출신 박정희는 결코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라며 비판하고, 유신헌법 반대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가 구속된 것이다. 그렇다면 김재규와 장준하는 어떤 사이였을까. 

김재규 씨와는 어떤 관계인가를 물었다. 사모님(장준하 부인 - 필자) 말씀으로는 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장 선생이 옥중 당선이 되어 국방위원으로 활약을 하셨을 때부터라고 하셨다. 국정감사를 나가면 거의가 돈과 향응으로 처리했기에 오히려 부정을 합리화 해 주는 정치권의 모습에, 의기가 넘친 김재규 장군이 정치권에 대한 실망만이 아니라 군에 대한 절망감에 싸여있을 때에 장준하 의원을 만난 것 같다.

장 의원은 일체의 향응을 거절하고 내무반에 직접 들어가서 사병들과 같이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며 제도개선에 앞장서셨다. 김재규 씨가 희망의 눈을 떴다.

"아, 한국 정치인 중에도 썩지 않는 사람이 있구나. 그렇다면 우리도 희망이 있는 것 아니냐." 하고 그때부터 군 쇄신에 앞장설 뿐 아니라 장준하 선생이 근처에 오신다는 연락이 있으면 길을 막고 기다렸다가 대접하고 동료들과 정치이야기를 즐기는 사이였다. (주석 12)

 
광복군 출신으로 『사상계』를 창간한 장준하
 광복군 출신으로 『사상계』를 창간한 장준하
ⓒ 장준하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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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는 장준하를 만나 어떤 '언질'을 주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가 건설부장관으로 입각한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상심했다는 것이다. 다시 이해학 목사의 증언.

우리는 밤을 세우며 대화를 나누었다. 이 엄혹한 군사정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주제였다. 우리가 "시민운동이나 4ㆍ19 같은 혁명만이 길"이라고 한 데 비해서 장준하 선생은 "군밖에 없다"라고 단언하셨다.

우리가 제3세계의 군사쿠데타의 악순환을 예로 들면서 군은 새로운 악이라고 우려한 데 비해서 장 선생은 이 정부의 속성을 몰라서 그렇게밖에 생각 못하는 우리들의 감상주의를 개탄하셨다. 그리고 "군부를 청산하고 민정이양을 확실하게 할 애국군인밖에 없다"라고 단언하셨다. 나는 민주주의자인 장 선생께 대한 실망까지 하였다.

'어떻게 군을 다시 민주화의 도구로 쓸 수가 있을까?' 그러나 그분은 "정의의 편에 협력할 군인도 있다"고 하셨다.

교도소 측에서는 감옥이 정치교육장이 된 것을 눈치챘는지 우리는 전방되어 다른 방으로 가서 동료들과 합방이 되었고 장 선생은 독방을 쓰게 되었다. 그 때 장 선생의 심장병이 돋아서 병동으로 옮겨 가 버렸다. (주석 13)


장준하는 김재규를 '정의의 편에 협력할 군인'으로 인식하였던 것 같고, 이 같은 믿음에는 김재규의 어떤 '언질'에서 근원했을 것이다.


주석
11> 안동일, 앞의 책, 458쪽.
12> 이해학,「장준하 선생과 김재균 장군에 대한 나의 확신」,『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 23~24쪽,   10ㆍ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 추진위원회, 2001.
13> 앞의 책, 21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박정희를 쏘다, 김재규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재규장군평전, #김재규, #장준하, #박정희, #군사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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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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