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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가 같은 링에 올라 같은 적과 싸우고 있는 '코로나 시대',  각 국들의 작전과 병법이 난무한 가운데 대한민국이 택한 전략은 전 세계에서 단연 돋보였다. 이제 K-pop, K-beaty, K-drama에 이어 K-의료, K-방역이 전 세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코로나 시대를 지나며 세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대한민국의 공적 의료보험 체계였다.

코로나 시대 최전선 방호 기지의 역할을 톡톡히 해 낸 대한민국의 공적 의료보험 체계가 주목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 의료보험제도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이름은 바로 '장기려'라는 이름 세 글자이다. 

코로나 시대가 내게는 '장기려'의 이름을 소환하는 계기가 됐다. 언젠가 부산에 장기려 기념관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그동안 가 보지 않다가 이번 기회에 찾아가 보기로 했다. 한국전쟁 당시 만들어진 판자촌 동네를 부산의 역사 관광 상품으로 만들어 놓은 초량 이바구길 한편, 그곳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언덕배기에 장기려 기념관이 있었다. 굳이 알고 찾아가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을 외딴 곳에 기념관이라고 이름 붙이기 멋쩍을 정도로 작은 규모의 기념관이 있었다.
 
 부산 초량 이바구길에 있는 장기려 기념관
 부산 초량 이바구길에 있는 장기려 기념관
ⓒ 추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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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관 내부, 대부분 사진과 글로 구성돼 있어 아쉬움이 남았다
 기념관 내부, 대부분 사진과 글로 구성돼 있어 아쉬움이 남았다
ⓒ 추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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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장기려 박사님의 성품에 어울리는 소박한 기념관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안으로 들어서자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거의 인쇄된 사진들과 빽빽한 글 만이 기념관 벽면에 가득할 뿐 시선을 끌 만한 유품 하나 없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이 빽빽한 글들을 찬찬히 읽을까, 설령 이 기념관을 다녀간다고 해도 장기려라는 인물에 대해 제대로 알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쉬웠다. 
     
장기려라는 인물은 우리가, 대한민국이, 더구나 부산이, 이렇게 소홀하게 다룰 만한 인물이 아니지 않을까?

영광과 칭찬은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오직 자신이 할 바를 조용히 한 사람, 그가 그런 삶의 방식을 선택해서 살았다고 하더라도 후세들은 그런 인물을 더 인정하고 제대로 대우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내가 장기려 박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것은 2006년, 그때도 이런 생각들로 씁쓸했던 기억이 선명히 남아 있다.    

박사님이 돌아가신 지 10년이 되던 그해, 장기려 박사는 우리나라 '과학 명예의 전당'에 의사로는 최초로 이름이 올랐다. 장기려 박사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간 절제' 수술을 성공한 인물로 의학계에서 '간의 날'로 지키는 10월 20일은 바로 장기려 박사가 간 절제 수술에 성공한 날이다. 그러나 이런 대단한 업적도 그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주목을 받고 과학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그해 나는 한 해동안 박사님을 곁에서 모시고 기억하는 사람들을 전부 만나고 장기려 박사에 관련된 모든 장소를 다 방문했다.  

그의 서거 소식이 알려진 1995년 12월 25일, 그를 기억하는 한 후배는 '작은 예수'가 세상을 떠났다라고 애통해 하기도 했다. '살아있는 성자' '작은 예수'라고 불렸던 장기려 박사, 그를 가까이서 본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 호칭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2006년 당시 내가 직접 만났던 이동기씨는 장기려의 삶을 증언하는 산증인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두 다리와 한쪽 팔까지 마비돼 먹고 살 길이 없었던 그는 젊은 시절부터 길가에서 구걸하며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

찬바람이 쌩쌩 불던 어느 추운 겨울 날, 지나가던 장기려 박사가 그를 봤다. 작은 체구의 장기려 박사는 그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업어서 구호소까지 데려다 주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 정도의 은혜를 베푼 것으로 끝이었겠지만 장기려 박사는 그 후 시간이 날 때마다 이동기 씨를 찾아와 돌아보고 성경 말씀을 들려주었다. 그리고는 비슷한 처지의 여인과 중매를 해 결혼까지 시켜주었다. 

아미동 언덕배기에 이동기씨의 집까지 마련해 준 장기려 박사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이동기씨를 돌보아 주었다. 이동기씨의 아들들을 친손주까지 예뻐하면서 돌보아 주고 가끔 편지까지 보내곤 했다고 당시 이동기씨 부부는 눈물을 흘리며 장기려 박사에 대해 증언했다.

장기려 박사에 관련된 사소하지만 감동적인 일화들은 작은 지면에는 다 쓸 수 없을 만큼 넘쳐난다. 그중에서도 이 시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나라에 민간의료 보험을 최초로 만든 이가 바로 장기려 박사라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대안교육의 장을 열었던 풀무학교의 원장이자 사회사업가였던 채규철과 각별한 사이였던 장기려 박사는 1968년 함께 청십자 의료보험을 창립한다. 채규철 박사가 덴마크에 가서 공부를 하면서 심하게 아파 병원에 가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았는데 병원비를 한 푼도 받지 않는 경험을 했다. 그게 바로 그 나라의 의료보험 덕분이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우리나라에도 의료보험 조합을 만들기로 한다.

1968년 최초의 민간의료보험 창립
 
 KBS부산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화면 캡처. 1968년 청십자의료보험 창립 당시.
 KBS부산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화면 캡처. 1968년 청십자의료보험 창립 당시.
ⓒ KBS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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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보험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던 1968년, 그들은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받자'는 구호를 내세우면서 청십자 의료보험을 창립한다. 처음에는 건강할 때 돈을 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의료보험제도를 이해시켜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다행히 부산에 있는 교회들을 중심으로 회원을 모집하면서 청십자 의료보험은 자리 잡아간다. 
       
1970년대 700여 명이던 회원은 꾸준히 늘어났고 1975년에는 아예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원들을 위한 청십자 의원이 개원을 했다. 1981년에는 조합원 숫자가 3만 명을 돌파했고 1983년에는 10만 명에 이르렀다. 

1989년에는 조합원이 22만 명에 달할 정도로 성장했다. 청십자 조합원들은 전국 480곳의 병원 어느 곳에서나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민간의료보험이 이룩한 놀라운 성과였다.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은 한 해 15억 원 이상의 흑자를 내는 기관이 되었다.

그러나 1989년 청십자 의료 보험 조합으로부터 많은 제도들을 이어받은 전 국민의료보험 조합이 출범하자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은 어떠한 조건도 없이 발전적 해체를 한다. 오직 대한민국 국민들을 위한 결단이었다.
     
월급은 식구 수대로 받아갑시다
 
 KBS부산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화면 캡처. 1951년 영도 천막명원
 KBS부산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화면 캡처. 1951년 영도 천막명원
ⓒ KBS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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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4 후퇴 때 작은 아들 손만 붙잡고 부산으로 피난 온 그는 1951년 부산 제3 영도교회 창고에서 천막을 치고 무료로 가난한 이들을 돌본다. 그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다. 무료 병원이 알려지면서 하루에 환자들이 200여 명이나 몰려들었다. 미국 개혁 선교회가 그나마 지원을 하면서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월급을 받게 되었는데 장기려 박사는 월급을 식구수대로 받아갈 것을 제안한다.  
      
식구가 몇 명이냐에 따라 받아가는 월급이 다른 제도를 장기려 박사가 만든 것이다. 그 제도는 장기려 박사에게 가장 불리한 것이었다. 식구라고는 작은 아들과 자신 둘 뿐인 장기려 박사는 병원 식구 가운데 가장 적은 월급을 받아갔다. 

그 후 복음병원은 송도로 옮겨 10층 빌딩 규모의 큰 병원으로 발전을 했다. 그러나 병원이 발전하고 커질수록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사람들은 넘쳐났다. 명예와 실익이 있는 곳에 장기려 박사의 자리는 없었다. 그는 복음 병원을 떠나 작은 청십자 병원의 병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직 아픈 환자들이 있는 곳, 그 곳이 장기려 박사가 있을 곳이었다.

그 해 일년 동안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방문한 곳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장기려 박사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옥탑방이었다. 자신을 위한 집도 돈도 남기지 않았던 장기려 박사, 그는 청십자 병원을 떠날 무렵이 되자 머물 곳이 없었다.
  
후배들이 노년의 그가 머물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알아보다가 마련해 준 곳은 송도고신 복음병원 빌딩의 꼭대기 옥탑방, 한 평 남짓의 공간이었다. 그 곳은 전화 교환원들이 근무하던 공간이었다가 당시는 비어있던 그야말로 옥탑방이었다. 책상 하나와 침대 하나로 꽉 차는 보잘 것 없는 옥탑방, 그러나 그는 기쁘게 그곳으로 이사를 했다.
 
 KBS부산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화면 캡처. 장기려 박사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옥탑방
 KBS부산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화면 캡처. 장기려 박사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옥탑방
ⓒ KBS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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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취재할 당시 그 옥탑방은 장기려 박사님이 사용하시던 생전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다. 그곳은 병원 엘리베이터가 운영되는 마지막 층인 10층에서 내려 가파른 계단을 스무 계단쯤 올라가야 하는 진짜 옥탑방이었다. 노년에 몸까지 불편한 그는 기꺼이 이 좁고 불편한 곳에서 생애 마지막 몇 년을 보냈다. 이 옥탑방에 들어섰을 때 가슴 깊은 곳으로 치밀아오르는 쓸쓸함과 동시에 소름 돗는 감동을 느꼈던 기억이 선명하다.

어떻게 이렇게 철저히 희생하며 오직 남들만을 위한 삶을 살다갈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이런 인물을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대우할 수 있단 말인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베풀었던 그는 1995년 12월 25일, 자신의 장례비가 담긴 통장을 남긴 채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 옥탑방은 지금은 어떤 곳으로 사용되고 있을까? 장기려의 기념관을 만든다면 그런 공간에 만들어야 하지 않았을까? 엘리베이터도 닿지 않는 곳, 스무 계단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 책상 하나와 침대 하나가 전부인 그의 옥탑방을 관람객들이 둘러본다면 장기려의 삶에 대해 정말 깊은 감동을 받지 않을까?

장기려의 이야기가 교과서에도 소개되고 기념관까지 만들어졌지만 장기려라는 인물이 세상에 한 일이 제대로 알려졌는 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는 크리스천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며 사신 장기려 박사의 삶은 혼탁해진 종교들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지금 이 시대, 더 빛이 나는 듯하다.

두렵고도 무서웠던 코로나 시대의 어두운 터널을 힘들게 통과하며 희망의 옅은 빛이나마 마주하는 지금, 우리 모두 장기 려박사의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으면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저자의 개인블로그 '바오밥 스토리 아카데미' 및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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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방송작가 협회회원, 방송작가, (주) 바오밥 대표, 동의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바오밥 스토리 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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