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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1980. 9. 1.)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1980. 9. 1.)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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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만큼 본다"는 말이 있다.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 말은 한때 유행어이기도 했는데, 나는 이 말을 변용해 "아는 것만큼 쓴다"라고 말하고 싶다.

글 쓰는 이는 잘 모르는 것을 쓰면 곧장 독자에게 망신당하기 마련이다. 또한 신뢰를 잃어 독자로부터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나는 잘 아는 것만 쓴다. 특히 역사적인 것을 쓸 때는 여러 문헌을 참고하고, 가능한 현장을 답사한 뒤에 쓴다.

이번 회는 연재 순서상 '5.18광주민주화운동' 편이다. 그때 나는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당시 대부분 서울 시민들은 광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언론이 제 구실을 못했기 때문이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 한창일 때였다. 그 무렵인 5월 20일 치 한 신문의 사회면 1면 머리기사에는 '서부 낙동강에 붕어 수난'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는 '꽂이에 꿴 붕어 떼' 사진이 실렸다.

아마도 기자들은 검열관의 눈을 피하고자 광주 상무대에 안치된, 난자당한 시민들의 시체 사진 대신 낙동강 붕어 수난 기사를 '상징적'으로 실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 시절 그런 기사를 보고 지내던 내가 이제 와서 마치 그 시절을 다 아는 듯 기사를 쓸 순 없는 일이다.

고심 끝에 평소 존경하는 서중석 교수의 <한국 현대사>와 정해구 교수의 <전두환과 민주화운동> 등을 대폭 참조 인용해 이 기사를 썼음을 미리 밝힌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 도청 앞 분수대에서 열린 시민궐기대회(1980. 5.)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 도청 앞 분수대에서 열린 시민궐기대회(1980. 5.)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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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주화운동

1980년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에 대한 강력한 저항은 광주에서 일어났다. 5월 18일은 전날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에 따른 휴교령에 반발한 전남대학교 학생 200여 명이 교문 앞에 서 있는 군인들과 실랑이를 벌였다. 이로 인해 시위가 확산됐다. 한편 이날 오후 4시에 광주 금남로 일대에 출동한 특전사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을 마구 구타하면서 400여 명을 군 트럭에 실었다. 이때 8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5월 19일 오전 금남로 일대에서 분노한 시민·학생 5000여 명이 각목 등을 들고 공수부대원과 맞서 싸웠다. 그날 오후 2시 무렵 군중은 2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4시 30분경 장갑차 총구에서 총알이 날아와 고교생이 쓰러졌다.

5월 20일 공수부대원은 3400명으로 증가했다. 이날 200여 대의 차량에 탄 택시운전사들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시위를 벌였다. 그날 밤 광주시청과 광주경찰서, 서부경찰서가 시위대에 점거됐고, MBC 건물이 전소됐다. 이날 신현확 내각은 총사퇴했다.

5월 21일은 석가탄신일로 광주 시내는 시위 시민들로 '사람의 강물'을 이뤘다. 낮 1시가 지나자 총성과 함께 5~6명의 시위대가 쓰러졌다. 오후 3시쯤 공수부대의 집단사격으로 금남로 일대는 피바다가 됐다. 시민들은 나주·목포 등 각지의 무기고를 습격해 무장했다. 그날 오후 5시 공수부대는 외곽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시민들은 전남도청에 진입했다. 그날로 광주는 '해방구'가 됐다. 근대 역사 이래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광주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시민 구타 장면(1980. 5.)
 광주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시민 구타 장면(198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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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민화운동 당시 시위대의 시신들(1980. 5.)
 광주민화운동 당시 시위대의 시신들(198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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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2일, 관료·신부·목사 등으로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이들은 사태 수습 전에 계엄군을 투입하지 말고 과잉진압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계엄사령부는 학생 시위를 배후 조종했다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해 광주시민을 더욱 분노케 했다. 이날 위컴 한미연합사령관은 20사단(사단장 박준병)의 병력 이동을 승인했다.

5월 23일, 시위대가 탄 소형버스가 주남마을 앞길에서 공수부대의 사격을 받아 탑승자 18명 가운데 17명이 사망했다. 22일·23일 계속 무기를 반납했다.

5월 25일 새로 구성된 시민수습위원회는 정부의 잘못 시인 등 4개 항을 제시했다.
이날 최규하 대통령은 상무대로 내려와 담화문만 발표하고, 사태 수습은 외면한 채 서울로 돌아갔다. 5월 26일 열린 제5차 민주수호 시민궐기대회에서는 최후까지 싸울 것을 결의했다.

5월 27일, 계엄군의 광주 진압작전, 즉 '상무충정작전'은 오전 1시 정각에 개시됐다. 3·7·11공수여단, 20사단, 31향토사단 등이 참가했다. 새벽 4시 도청 앞에서 '항복' 권유 방송이 나왔다. 새벽 5시까지 도청 사수대 등과 한 시간 동안 교전이 있었다. 오전 5시 10분경 계엄군은 도청을 장악했다. 5월 26일부터 6월 18일까지 광주지방검찰청에서 확인한 사망자는 161명이었다(추후 사망자는 다소 늘어났음).
  
 광주민화운동 당시 시위대 시민들이 계엄군에게 연행되고 있다(1980. 5.)
 광주민화운동 당시 시위대 시민들이 계엄군에게 연행되고 있다(198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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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 항쟁 모습(1980. 5.)
 광주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 항쟁 모습(198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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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위' 설치

1980년 5월 18일부터 시작해 5월 27일 새벽에 이르도록 열흘 동안 펼쳐진 광주민주화운동은 계엄군의 유혈진압으로 참혹하게 끝났다. 1980년 '서울의 봄'은 신군부의 쿠데타와 이에 저항한 광주 시민들의 유혈 참사를 남긴 채 산산조각 났다. 그리하여 유신공화국은 신군부에 의한 제5공화국의 변형된 모습으로 군부독재 정권이 그대로 이어지게 됐다.

미국은 광주민주화운동에 명백한 책임이 있다. 그들은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 하에 있는 20사단의 광주 투입을 승인해줬다. 또한 신군부가 진압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오키나와에 있는 조기경보기 2대와 필리핀에 정박 중인 항공모함을 한국 근해로 출동시키는 등 신군부의 집권을 음양으로 지원했다.

광주항쟁을 진압한 신군부의 다음 목표는 정권 장악이었다. 그리하여 1980년 5월 31일 대통령자문기구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 상임위원장 전두환)를 설치했다. 이는 사실상 국무회의를 대신하는 일종의 군사평의회로, 국보위는 5.16때 국가재건최고회의처럼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현판식 후 전두환 상임위원장(왼쪽)과 박충훈 국무총리(오른쪽) 악수를 나누고 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현판식 후 전두환 상임위원장(왼쪽)과 박충훈 국무총리(오른쪽) 악수를 나누고 있다.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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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위는 '사회정화'라는 이름으로 1980년 7월 초부터 고급공무원, 정부투자기관 임직원을 숙정했다. 또한 대학교수 및 교사, 학생들을 학원 밖으로 내몰았다. 7월 31일에는 <창작과 비평> <씨ᄋᆞᆯ의 소리> 등 정기간행물 172종을 등록 취소시켰으며 11월에는 언론기관을 통폐합시켰다.

그 무렵 사회정화위원회라는 관제 단체가 각 직장마다 설치 운영됐다. 중고교 학급에 마저도 학급정화위원회가 설치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또한 각 직장에서는 국보위의 지시에 따라 무능 부패한 직원들을 '사회정화'라는 이름으로 강제 해직시켰다. 그런데 이때 일선 직장에서는 평소 바른 소리를 한 사람, 미운 털 박힌 사람을 내보내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관련 기사 : 공무원 5천명이 잘린, 혹한이 닥친 1980년 7월).
  
 제5공화국 헌법공포식(1980. 10. 22.)
 제5공화국 헌법공포식(1980.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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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공화국 출범

그 즈음 전두환은 광주민주화운동을 군화발로 짓밟은 뒤 국보위 상임위원장으로 만족하지 않고 대통령 자리까지 꿰찼다. 그해 8월 16일 최규하는 신군부의 압력에 버티지 못하고 대통령직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는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주한미군사령관 위컴은 전두환을 공공연히 지지했다.

국보위는 그해 10월에 사회악 사범 4만여 명을 검거해 대다수 군부대에서 '순화교육'을 시킨다는 명목으로 이른바 삼청교육대를 탄생시켰다. 그해 10월 22일에는 국민투표로 새 헌법안이 확정되고, 10월 27일 공포됐다.

이 헌법에 따르면 임기 7년의 대통령(중임 금지)은 5000명 이상으로 구성된 선거인단에서 선출케 했다. 대통령에게는 비상조치권과 국회해산권이 주어졌고, 사법부 및 헌법위원회도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했다. 또 국회의원 1/3은 전국구로 배정하고, 그 전국구의 2/3는 제1당이 차지하게 했다.

1981년 2월 25일,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선거인단의 투표로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재적 선거인 5277명 중 4755표 획득). 3월 25일에는 신군부가 급조한 민주정의당(민정당), 민주한국당(민한당), 한국국민당(국민당)이 참여한 가운데 제11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이른바 국회는 전두환 정부의 1중대, 2중대, 3중대로 희화화됐다. 유신공화국에 이은 제5공화국은 그런 공포 분위기 속에 출범했다.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서중석 지음 <한국현대사> / 정해구 지음 <전두환과 민주화운동> 강준식 지음 <대한민국의 대통령> / 등 수십 권의 참고자료와 그 시대 신문, 동시대에 살았던 여러 사람들의 증언으로 쓴 기사임을 밝힙니다.


태그:#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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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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