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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진주시에서 열린 어린이날 가족 한마당 행사
 2019년 진주시에서 열린 어린이날 가족 한마당 행사
ⓒ 진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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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 원장님이셨다. 퇴근하고 늦어도 좋으니 꼭 우리 집에 와서 상담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이렇게까지 신경 써서 상담을 해주시는구나 감사한 마음에 칼퇴근, 한걸음에 달려 집으로 갔다. 감사하게도 마침 나의 퇴근시간에 맞춰 아이를 데리고 오셨다.

"어머니 일하시면서 어떻게 아이를 이리도 잘 챙겨주시나요. 아침마다 따뜻한 도시락에 늘 깨끗한 내복에."
"아... 엄마라면 다들 그렇게 하지 않나요?"
"아뇨, 이렇게까지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정말 대단하세요."

'어린이집 상담은 이렇게 엄마 칭찬을 해주러 오시는 건가? 아, 내가 잘하고 있는 거란 말이지?'

그랬다. 첫아이 생후 15개월. 모유 수유가 끝난 후 바로 회사에 복귀했다. 출산과 모유수유. 이제 겨우 1년 남짓 사회생활을 쉰 것인데도 10년은 다른 세상에 있다가 나온 것처럼 낯설고 두려웠다. 아이 낳기 3일 전까지 출근하고 퇴사했기에 일에는 미련도 없었고 아이를 낳고 나면 구체적으로 일할 계획도 없었다.

그런데 참 신데렐라 팔자인지 이것도 복인지 모유 수유가 끝날 무렵 아는 분께 경력자가 필요하다는 면접 연락이 왔다.

'아이를 키우면서 어떻게 일을 하지? 누가 아이를 봐주지? 그냥 하면 다 되나?'

결혼할 때도 무지했지만 육아는 더 무지한 초보 주부는 덜컥 면접을 보러 갔고 출근을 하게 되었다.

아이를 어린이집 종일반에 보내고 원장님을 믿으며 그렇게 나는 맞벌이를 시작했다. 아이는 나와 출퇴근을 같이 해야 했기에 아침 8시에 등원해 저녁 7시 반에 하원했다. 원장님과 함께 문을 열었고 우리 아이가 집에 가는 시간이 원장님 퇴근시간이 되었다.

일도 잘하면서 아이도 잘 키우고 싶은 마음이었고 출근시간에 늦지 않으려 아침마다 깨지 않은 아이를 싸매고 뛰었다. 아침을 못 먹여 보내니 늘 보온도시락에 따뜻한 국과 밥을 싸서 보냈다. 퇴근하면 천근만근인 몸을 이끌고 아이의 밥을 해서 먹이고 빨래를 하고 못다 한 집안일을 했다. 그러면 밤 10시를 훌쩍 넘은 시간. 아이를 씻기고 재웠다.

 나의 육아를 부정당하다

아이가 만 세 살이 되었을 무렵이다. 퇴근 후 아이를 데리러 가면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더 놀고 싶다고 떼를 쓰는 일이 많아졌다. 안 그래도 제일 늦게 하원해서 원장님께 눈치도 보이고 집에 가서 할 일도 많은데 연일 계속되는 떼를 맞춰 주기는 힘들었다.

그저 육아서에서 봐왔던 0.4춘기, 자기주장이 강해지는 그 때가 왔나보다 생각했다. '그래, 그래. 이러다 말겠지' 하며 구슬리기를 여러 날. 끝이 보이지 않는 떼는 내 인내심의 한계를 넘겼고 원에서 웃으며 달래다 집에 와서 혼내기를 반복하던 그 때. 원장님이 방문 상담을 오신 것이다.

"어머니, 아이가 너무 외로워 보여요."

엄마 칭찬을 마친 원장님께서 말씀하셨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자기가 뭔데 아이가 외롭네 마네. 본인이 엄마야? 엄마는 나라고!'

내일 당장 다른 어린이집을 알아보고 빨리 여기를 그만두리라 생각을 굳히며 최대한 진정하고 차분한 말투로 물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얼마나 최선을 다하는데요!)"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우리 00이가, 아무것도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00이가 너무 외로워 보여요. 왜 그럴까요?"

숨긴다고 숨겼지만 나의 격앙된 감정은 오롯이 전달되었고 말을 잠깐 멈추신 원장님은 차분하게 이어서 말씀하셨다.

"퇴근하면 집안일 잠깐 10분만 미루시고 우리 00이와 눈 맞추고 이야기 나누어 주세요."

잠시 멍했다.

'내가 우리 아이와 눈을 안 맞췄다고? 얘기를 안 한다고? 부모가 있는데 외롭다니, 이게 무슨 말이야!'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지금도 힘든데 아이가 뭐 어쨌다고? 그럼 여태껏 내가 아이를 잘 못 키웠다는 거야?'

말없이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고 원장님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하지만 단호하게 위로하고 서둘러 돌아가셨다.

"이런 말이 통할 것 같은 어머님이라 말씀드려요. 조금만, 아주 조금만 바뀌면 좋겠는데 너무 안타까워서요."

그렇게 오랜 시간, 종일 원에서 보냈는데도 엄마가 데리러 왔을 때 반가움에 달려들지 않고 더 놀다 가겠다는 아이. 내가 먼저 알아봤어야 했다. 집에 돌아온 아이가 왜 그렇게 시큰둥했는지. 샤워 시간 욕실에서 잠시 왜 웃음꽃이 피었는지. 책을 읽기 시작하면 잠을 자지 않고 왜 계속 책을 뽑아 왔는지. 나는 눈치 챘어야 했다.

 나의 육아를 돌아보다

일하면서도 먹이고, 입히는 것에 소홀하지 않는 엄마. 이거 보라고 나는 하루도 거르는 일 없이 도시락을 챙기고, 매일 내복을 삶아 누구보다 깨끗하게 입히고, 매일 밤 책 육아도 하는 우주최강 엄마라고.

아침마다 새 밥을 하고 세 가지 반찬에 국을 싸서 어린이집에 보냈다. 동네 아이 친구네 시어머님이 '00이는 내복을 어떻게 빨기에 아이 옷이 저리도 깨끗하냐'고 물어 오실 정도로 아이 청결에 신경을 썼다. 아이가 피곤해 보이는 날에도 정해놓은 책은 읽고 잤다. 그래야 잘 자라는 줄 알았다. 주위의 아이 친구 엄마들도 4살인데 말도 잘하고 똑 부러진다고. 더더욱 내 방식 맞았고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이것이 누구를 위한 육아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한숨도 자지 못하고 원장님의 말들을 곱씹었다. 다음날 퉁퉁 부은 눈으로 출근을 했고 어린이집은 옮기지 않았다. 원장님과 함께 아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나의 양육방식을 조금씩 자연스럽게, 느리게, 편안하게 바꾸어 가기로 했다.

나는 아이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함께 시선을 두기 시작했다. 아침은 볶음밥이나 죽 같은 한 그릇 음식으로 바꾸었고, 신생아도 아닌 아이의 내복을 삶는 횟수는 눈에 띄게 줄였다(아예 안 삶지는 못했다.....^^;).

목욕은 여전히 즐거웠고 시간은 늘어났다. 책은 한 권도 좋았다. 수 십 권도 좋았다. 둘이 즐겁기만 하다면. 그 시간을 아이가 원하기만 한다면. 밥보다 급한 것은 엄마 냄새, 엄마 눈동자, 엄마의 목소리, 엄마 그 자체였다. 아이는 오래 걸리지 않아 퇴근한 나를 버선발로 뛰어 나와 맞아 주었다.

이듬해 유치원에 입학한 아이. 아이의 웃는 모습을 예뻐해 주시던 담임 선생님께서 '세계적인내츄럴스마일'이라는 별명을 지어 주셨고. 몇 해 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도 모두가 혀를 내두르는 장난꾸러기 반 친구에게 '넌 참 재미있는 친구'라는 편지를 건넬 정도로 타인의 눈높이를 바라 볼 수 있는 아이가 되었다.

올해 중학생이 된 딸아이는 지금도 잘 웃고 친구의 생일을 잘 챙긴다. 틴트가 필수품이고 엄마보다는 친구가 더 좋은 나이이지만 가끔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와 나에게 슬며시 건네며, 다섯 살 어린 동생과 그 누구보다 신나게 놀아준다.

그 때 상한 맘으로 그 분의 말을 묵살하고 나의 육아를 돌아보지 않았다면 지금 나와 나의 아이는 어디에 있을까.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호러도 이런 호러가 없다. 모든 육아에 정답은 없고 같은 방법이라도 받아들이는 건 아이마다, 상황마다 다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내가 너의 곁에 있으니 너를 믿고, 엄마를 믿고 세상으로 한 발짝 나와도 된다는 그 애틋한 바라봄이다. 우리의 응시는 존재를 조각한다.

덧붙이는 글 | 작성자 개인 블로그에도 올린 글입니다.


태그:#어린이날가장큰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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