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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선거에서 무효표가 가장 많이 나온 선거가 있다. 무소속 조봉암과 자유당 이승만이 격돌한 1956년 제3대 대선 때다. 이때는 총 투표수 906만 7063표 중 185만 6818표가 무효 처리됐다. 20.5%가 무효표였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사건이 한국 정치뿐 아니라 대중음악과도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이 사건은 그해 5월 5일의 변고로부터 시작됐다. 이 변고가 20.5%라는 무효표를 낳았음은 물론이고 대중음악에도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역대선거정보시스템의 통계 수치를 근거로 할 때, 대통령 직선제가 시행된 1987년 제13대 대선 때는 무효표가 2.0%, 1992년 제14대 대선 때는 1.3%, 1997년 제15대 때는 1.5%, 2002년 제16대 때는 0.9%, 2007년 제17대 때는 0.5%, 2012년 제18대 때는 0.4%, 그리고 3년 전의 제19대 때는 0.4%였다.

직선제가 시행된 또 다른 기간인 1952~1971년에는 무효표 비율이 오늘날보다 높았다. 1952년 제2대 때는 3.5%, 위에서 언급한 1956년에는 20.5%, 1960년 제4대 때는 11.3%. 1963년 제5대 때는 8.7%, 1967년 제6대 때는 5.0%였다. 독재정권 하의 직선제 대선에서 무효표가 대거 등장했던 것이다.

독재정권 여하를 떠나 간선제 대선에서는 무효표가 대체로 적었다. 1948년 제1대 때는 0.5%, 1972년 제8대 때는 0.1%, 1978년 제9대 때는 0.04%, 1979년 제10대 때는 3.3%, 1980년 제11대 때는 0.04%, 1981년 제12대 때는 0.02%였다. 간선제 하에서 무효표가 가장 많았던 제10대 대선은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최규하 총리가 뽑힌 선거였다.

이런 통계에서 드러나듯이,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 하의 직선제 대선에서는 무효표가 상당히 많이 나왔다. 그중에서도 한국전쟁 휴전 3년 뒤인 1956년 제3대 때가 역대 최고였다. 다섯 표 중 1표가 무효 처리된 선거였다.

1956년 당시의 국민들이 투표하는 법을 몰라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니다. 정치의식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열흘 전만 해도 후보였던 인물에 대한 지지 표시인 동시에, 이승만에 대한 반대 표시이자 조봉암에 대한 거부감 표시라는 복합적 의미를 띠는 일이었다.

투표 열흘 전만 해도 야당인 민주당은 후보를 갖고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을 역임하고 대한민국정부 수립 뒤 국회의장을 지낸 신익희 후보가 바로 그였다. 신익희는 이승만 독재에 대한 국민적 거부감을 배경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했다. 그래서 그는 이승만의 당선 가도에 걸림돌이 됐다. 조봉암 역시 이승만에게 위협이 됐음은 물론이다. 

신익희 없는 선거, 신익희를 찍은 사람들
 
 제3대 대선 때 후보로 등록한 조봉암·신익희·이승만. 충북 청주시 문의면의 청남대에서 찍은 사진.
 제3대 대선 때 후보로 등록한 조봉암·신익희·이승만. 충북 청주시 문의면의 청남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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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투표 열흘 전, 신익희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호남 가는 열차 안에서였다. 그해 5월 6일자 <동아일보> 기사 '대통령후보 신익희 선생 급서'는 이렇게 보도했다.

"전주에서 정견을 발표하고자 4일 하오 10시 서울역을 출발한 신익희 민주당 대통령후보는 5일 상오 4시 15분 강경-논산간 동(同)열차 속에서 돌연 심장마비를 일으켜 동 5시 30분 이리역(지금의 전북 익산) 도착 즉시로 하차하여 호남병원에 입원·가료하였으나 동 5시 45분 애석하게도 서거하였다."

심장마비사로 발표됐지만, 대중은 믿지 않았다. 국민들은 이승만에게 의혹의 시선을 보냈다. 이런 분위기는 신익희에 대한 국민적 애도로 연결됐다.

싸늘하게 변해버린 그의 유해가 특별열차(당시 표현은 특별기동차)에 실려 서울로 향하는 동안, 억수처럼 쏟아지는 비를 무릅쓰고 수많은 국민들이 기차역은 물론이고 기찻길에까지 나와 통곡을 하며 애도를 표시했다. 라디오도 많지 않았던 시절에 수많은 국민들이 신익희 서거 소식을 신속히 전해듣고 기찻길을 지켰던 것이다.

유해가 도착한 서울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역도 인산인해였다. 그해 5월 6일자 <경향신문> 기사 '신익희 선생 유해 안착'은 이렇게 보도했다.

"고 신익희 씨의 유해가 말없이 환도하는 이날 오후 2시부터 서울역은 마중나온 군중들로 차서 혼잡을 이루기 시작하여, 동(同) 3시에 가까워오자 서울역 프랱홈은 발 디딜 곳조차 없이 인파를 이루고, 간단없이 흘러나오는 곡성과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아우성은 서울역 밖까지 들려나왔고, 프랱홈으로 들어가려던 군중은 서로 밀리어 2등 대합실 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유리창을 파괴하고 홈 안으로 쇄도하였다."

신익희에 대한 추모와 이승만에 대한 분노였다. 이것은 5월 15일 투표 당일에 유권자들이 특이한 방식으로 저항하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투표 용지에는 신익희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았는데, 신익희 란에 기표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역대 대선 사상 최고의 무효표는 이렇게 해서 나왔다.

무효표 속출은 언론과 민주당의 홍보에도 상당 부분 기인했다. 언론과 민주당은 이 선거를 신익희에 대한 '추모 투표'로 바꾸고자 했다. 그해 5월 13일 자 <경향신문> 기사 '추모투표는?'은 "신씨에게 한 표를 던지면 어떻게 될까요?"라는 독자 최아무개의 질문에 대해 "결국에 가서는 무효가 되고 기권한 것이나 다름없는 결과가 되지만, 자기의 (의사)표시는 되는 것이지요"라며 무효표를 은근히 부추겼다.

갑작스레 후보를 잃은 민주당은 이 분위기를 이승만에 대한 공격 수단뿐 아니라 진보주의자 조봉암에 대한 공격 무기로도 활용했다. 신익희 서거로 조봉암과 이승만만 남은 상황에서 민주당은 '우리는 지지하는 후보가 없다'며 '무효표도 일종의 정치적 의사표시'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민주당은 진보 성향 유권자들이 조봉암 대신 '신익희'를 찍도록 유도했다. 진보주의자 조봉암 앞에서만큼은 민주당도 자유당과 한편이었던 것이다. 이승만 입장에서는 조봉암한테 표가 가느니 차라리 무효표가 많이 나오는 편이 유리한 측면도 있었다. 제3대 대선의 무효표 현상은 이승만에 대한 항의 표시라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조봉암에 대한 견제라는 점에서는 또 다른 측면을 띨 수 있었다.

'비 내리는 호남선' 때문에 경찰 조사 받은 두 사람
 
 해공 신익희 동상. 서울시 강동구의 강동역 근처에서 찍은 사진.
 해공 신익희 동상. 서울시 강동구의 강동역 근처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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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신익희 서거로 무효표 운동이 전개되는 이 상황은, 두 명의 예술가가 경찰 조사를 받는 원인이 됐다. 작사가 손로원과 작곡가 박춘석이 호된 조사를 받게 됐던 것이다.

이들이 조사를 받게 된 것은, 출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두 사람의 노래가 5월 5일 서울역발 논산행 열차에서 울려퍼진 것을 계기로 삽시간에 전국을 강타했기 때문이다. 1992년 5월 9일자 <동아일보> 기사 '가요 100년 그 노래 그 사연 (40) 비 내리는 호남선'은 이렇게 설명한다.

"서울역에 그의 유해가 도착하던 날, 많은 국민들이 하늘까지 원망하며 울었다. 이때 군에 입대하는 청년들을 가득 실은 서울역발 논산행 열차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노래가 흘러퍼졌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랑이란 이런가요 비 내리는 호남선에/ 헤어지던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다.'"

호남행 열차에서 변고를 당한 신익희를 추모하고자 입영열차를 탄 청년들이 '비 내리는 호남선'을 열창했던 것이다. 며칠도 안 가서 이 노래는 작사가 손로원의 노래가 아닌 김순이 여사의 작품으로 뒤바뀌었다. '자유당의 암살로 남편을 잃은 슬픈 마음에 노래를 지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래서 경찰이 진위를 확인코자 손로원을 소환했던 것이다. 위 <동아일보> 기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수사관은 다짜고짜 손로원의 뺨부터 한 대 후려쳤다. 흰 고무신에 낡은 잠바 차림의 손로원은 당시 일류 작사가라기보다 부둣가 노무자 같았다. 그는 '누가 대신 써줬느냐'는 말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 절필을 할 만큼 민족정신이 강한 고집쟁이였다."

손로원에 이어 박춘석을 조사한 뒤에야 경찰은 의심을 풀었다. 이 노래가 1956년 5월이 아닌 그해 2월에 만들어졌다는 증거가 박춘석한테서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노래는 선거 바람을 타고 음반이 날개 돋친 듯 팔리며 히트했다"고 위 기사는 말한다.

1956년 대선 때 무효표가 대거 속출하는 동시에 '비 내리는 호남선'이 초대박을 친 것은, 신익희 서거를 계기로 이승만 독재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의식이 팽창한 데 다른 결과다. 이렇게 정권 안보에 금이 쩍쩍 가고 있었는데도 이승만 정권은 위험 신호를 감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4년 뒤 4·19 혁명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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