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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직을 수락한 김종인 전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이 24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21대 국회, 어떻게 해야 하나' 토론회에 참석해 생각에 잠겨 있다.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직을 수락한 김종인 전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이 24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21대 국회, 어떻게 해야 하나" 토론회에 참석해 생각에 잠겨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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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에 영웅 난다지만, 난세라고 해서 반드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난세의 영웅이 출현하려면 집단 내에서 위기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새로운 리더십을 갈망하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할 뿐 아니라, 새로운 인물이 대중의 지지를 얻고 공적 권력으로 나아가도록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이런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는 집단은 난세의 영웅을 학수고대만 하다가 위기 앞에 굴복하기 쉽다. 난세의 영웅이 등장하려면, 영웅도 훌륭해야 하지만 사회도 훌륭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껏 인류 역사에서 수많은 집단들이 위기를 극복하기보다는 무너지는 예가 훨씬 더 많았던 것은 그런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위기의 통합당이 다시 꺼내든 카드

비상시국의 지도자로 김종인 전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이 거론되고 있는 미래통합당 역시 난세 중의 난세에 직면해 있다. 이번 21대 총선은 보수정당의 역사에서 두고두고 기억될 만한 역대급 패배였던 것이다.

국회의원 3분의 1을 대통령이 뽑은 유신체제 하의 총선을 예외로 하면, 역대 총선에서 제1당이 전체 의석의 60% 이상을 차지한 것은 1960년 5대 총선 때의 민주당 사례(69.4%)와 1963년 6대 총선 때의 민주공화당 사례(62.9%)뿐이다.

더불어민주당과 그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이 이번에 기록한 60.0%는 6대 총선 이래 처음이다. 이는 통합당의 총선 패배가 1963년 이후로 최대임을 뜻한다. 난세 중의 난세라는 표현이 결코 과하지 않은 것이다.

비록 과도기를 전제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김종인이 구원투수로 부각되는 것은 통합당한테는 참으로 안 된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김종인은 4·15 총선을 진두지휘한 사령관이다. 그냥 선거대책위원장도 아니고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이었다. 원칙대로라면, 그 역시 황교안 전 대표와 함께 4월 16일 오전 중에 성명서를 발표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그럴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4월 24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21대 국회, 어떻게 해야 하나' 토론회에 참석한 그는 현장의 기자로부터 "선거 결과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기 때문에 (김종인을) 다시 모시는 것은 안 된다는 식의 반대 입장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통합당 일각의 그런 기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이었다. 이에 대해 그는 자신의 책임의식을 여실히 드러내는 아래와 같은 답변을 던졌다.

"내가 선거에 뭘 했는데 책임이 있어? 내가 자기들 도와준 것 외에 딴 거 한 거 있어? 내가 공천을 했어, 뭘 했어?"

사퇴 압박 이어졌지만... 김종인의 '버티기'

김종인의 책임의식이 어느 정도인지는 그와 함께 민정당·민자당 생활을 함께 했던 정치인들도 뼈저리게 느낀 적이 있다. 이들은 1993년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 때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비례대표로 3선 의원이었던 당시의 김종인은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시절에 안영모 동화은행장으로부터 2억 5000만 원을 수수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1991년에 짜장면 1그릇이 2000원 정도였다. 그가 받은 뇌물의 현재 가치도 물가상승률을 감안해 추정해야 한다. 1993년 5월 28일자 <경향신문> 기사 '김종인 의원 구속 안팎'은 사건 내막을 이렇게 설명했다.

"수표 세탁은 안 행장이 자금을 마련하는 순간부터 부하 직원들에 의해 깜쪽같이 이루어졌으며, 세탁한 뒤 건네진 돈은 이를 받은 김종인 경제수석 등이 자신만의 노하우로 또다시 20여 차례에 걸쳐 세탁.

검찰은 사용된 수표의 뒷면에 기입된 숫자 중 반복되는 것, 동일한 필적의 부분을 집중 추적하고 수표를 환전할 때 기재하도록 돼 있는 장부 등과 대조 작업을 벌여 관계인이 누구인지를 밝혀냈다고."


김종인은 경제민주화를 외친 관료인 동시에 학자였다. 학자가, 그것도 경제민주화를 외치는 학자가 너무도 뜻밖의 '기술'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혐의가 드러나자 민자당 지도부가 의원직 사퇴를 종용한 이유 중 하나도 그것이었다.

민자당은 김종인의 범죄로 인해 당의 이미지가 실추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래서 사퇴를 압박했다. 그해 5월 27일자 <동아일보> 기사 '김종인-이원조씨, 의원직 사퇴 종용'에 따르면, 황명수 사무총장은 "김 의원의 구속이 결정된다면 당 이미지 훼손 등의 책임을 지고 의원직을 사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종인의 생각은 달랐던 듯하다. 지도부의 사퇴 종용에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당기위원회 소집이 검토되며 징계 논의가 나오는데도 그는 버텼다.

김종인은 혐의를 강력히 부인했다. 하지만 검찰에 출석하자마자 확 달라졌다. 그의 자금세탁 기술을 전한 위 <경향신문> 기사는 "검찰에 출두하기 전 주변 사람들에게 안 행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강력히 부인하던 김종인 민자당 의원은 검찰에 출두하자마자 1시간 만에 모든 혐의사실을 자백"했다고 보도했다. 수사망을 빠져나가기 힘들 정도로 혐의가 명료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의원직 사퇴만큼은 끝끝내 거부했다. 그해 봄부터 사퇴 요구를 받은 그가 결국 의원직을 상실한 것은 이듬해 가을 대법원 상고기각결정으로 '징역 2년 6월, 집행유예 4년, 추징금 2억 1000만 원'이라는 원심판결이 확정된 데 따른 결과였다. 1994년 9월 10일자 <매일경제> 기사 '김종인 의원 유죄 확정'은 "김종인 의원이 9일 유죄 확정판결로 의원직을 상실"했다고 보도했다. 대대적인 사퇴 압력을 받은 지 1년 4개월 만에 의원직을 빼앗겼던 것이다. 

성찰하지 않은 정치인의 현재

미래통합당의 뿌리는 1979년 12·12 쿠데타 및 1980년 5·17 쿠데타로 등장한 민주정의당(민정당)이다. 전두환의 민정당과 박정희의 민주공화당(공화당)은 정체성은 유사했지만, 민정당은 육사 11기 이후의 신군부를 기반으로 한 데 반해 공화당은 그 전의 구군부를 기반으로 했다는 점에서 서로 달랐다.

그래서 전두환 이후의 보수정당들은 기본적으로 민정당이라는 뿌리 위에 존립했다. 1990년 3당 합당과 민주자유당(민자당) 창당으로 인해 민정당이 법적·형식적 측면에서 해체되기는 했지만, 민정당 출신들이 민자당의 근간을 이루고 민정당 이념이 민자당 이념으로 계승됐다는 현실적·실질적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 민정당은 민자당과 DNA를 함께함은 물론이고, 민자당의 후신인 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과도 DNA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김종인은 비상 정부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때부터 전두환 정권과 행동을 함께했다. 그는 제5공화국을 이끈 민정당 정권의 주역 중 하나였다. 그래서 민정당으로부터 통합당에 이르는 보수정당의 계보에서 그는 '조상급' 위상을 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민정당 정권이 1987년 6월항쟁 및 1988년 13대 총선 참패를 겪었을 때,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뭔가 깊이 있는 성찰을 했어야 한다. 또 1995년에 '5공(제5공화국) 청산 열풍'이 일면서 전두환·노태우가 구속됐을 때도, 심도 깊은 자기 성찰을 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당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의 명예에 대해서도 책임의식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그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민자당 밖에서도 나왔다. 동화은행 사건이 아니더라도 그의 무책임을 비판할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1996년 1월 18일자 <한겨레> 기사 '묻어둘 수 없는 과거 이젠 청산을' 2편은 "(광주) 학살의 주검을 딛고 선 신군부가 정권을 찬탈하고 유지하는 동안 머리로, 글로 힘을 보탠 교수들은 줄잡아 50여 명에 이른다"면서 "이들의 생각은 부실한 통치이념의 보완에, 그들의 글은 쿠데타 정권의 이미지 개선에 두루 쓰였다"고 한 뒤 '50여 명에서 중 20여 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신군부의 손을 들어주는 일에 먼저 발 벗고 나선 학자들은 5·17 쿠데타로 헌정질서를 무너뜨리고 80년 5월 31일 발족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와 같은 해 10월 29일 만들어진 국가보위입법회의(입법회의)에 참여한 20여 명의 교수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김종인 서강대 교수(경제학)는 그 뒤 정계와 관계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전두환 정권의 제도적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전두환 정권에 복무한 지식인이 위 기사 속에서 '50여 명'에서 '20여 명'으로 줄다가 결국 '김종인 1인'으로 귀결되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종인이 그 정도로 핵심 인물이었던 것이다.

위 기사는 끝 부분에서 김종인 등을 국가의 필요가 아니라 전두환 사당(私黨)의 필요에 복무한 학자들이라고 규정했다. 그들이 그 같은 역사의 죄를 저질러놓고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사실에 대해 위 기사는 분개했다. "반성의 말 한마디, 참회의 글 한줄 내놓는 일 없이 여전히 공직을 지키고 있거나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기사는 꼬집었다.

김종인 전 총괄선대위원장은 이처럼 이미 과거에도 무책임한 정치인 겸 지식인이란 비판을 받았다. 그는 2020년 현재도 "내가 뭘 했어?"라며 동일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이런 인물이 미래통합당의 비상시국을 잠재울 '난세의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다. 통합당의 현재 역량은 물론이고 미래까지 예측케 하는 유력한 징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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