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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걸음 거리에서도 사람이 있는 것만 알겠고 누가 누구인지는 분간하지 못한다."(세종실록 21년 6월 21일)

"봄부터 어두침침한 곳에서는 지팡이가 아니고는 걷기 어려웠다."(세종실록 23년 4월 4일)

"내가 눈병을 얻은 지 이제 4, 5년이나 되었다. 올해 1, 2월에는 왼쪽 눈이 거의 실명하다시피 하였다."(세종실록 23년 4월 9일)

"눈동자가 뿌옇게 흐려지고 막으로 덮였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더욱 눈이 보이지 않으니 이것은 내가 죽을 때까지 고칠 수 없는 병이다."(세종실록 25년 8월 29일)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고, 한쪽 눈은 실명에 가깝다고 말하는 그는 누구일까요? 바로 '조선의 제4대 임금인 세종'입니다. 그는 나이 마흔 무렵부터 겪은 저시력 증상이 점점 심각해지면서 중도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세종은 이러한 가운데에도 세계사·과학사·문명사적으로 인정받는 선진 문물의 발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해시계 겸 별시계인 일성정시의 제작(세종 19년), 하천 수위 측정기인 수표 제작(세종 23년), 달력 및 해설서인 <칠정산> 편찬(세종 24년), <훈민정음> 창제(세종 25년), 천문학서 <제가역상집> 편찬(세종 27년), 의학사전 <의방유취> 편찬(세종 27년), 무기 제조·사용 설명서인 <총통등록> 편찬(세종 30년) 등의 업무를 지휘합니다.

"눈병이 더욱 심해지고, 이로 인해 여러 병세가 번갈아 괴롭히므로 정치에 부지런할 수가 없다."(세종실록 24년 6월 16일)

치료 효과가 있다는 초수리(청주 초정리)의 약수를 마시고 온천욕도 해보지만, 증상은 조금 호전되는 것 같다가도 그때뿐이었습니다. 병증은 그를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괴롭힙니다. 아무리 성군이라 평가받는 세종이지만, 안질환과 합병증으로 인한 능률 저하는 어쩔 수 없다고 토로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능이나 무가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관습도감사(음악을 다루는 관청의 관리) 박연이 글을 올렸다.

"옛날의 제왕은 모두 맹인으로 악사를 삼아서, 거문고를 타며 시를 읊는 직무를 맡겼습니다. 그들은 보지 못해도 소리를 잘 들으며, 또한 세상에 버릴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세종실록 13년 12월 25일)

위와 같이, 장애가 있건 없건 모든 인간은 각자의 존재 이유를 지닌다는 인식이 전통시대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에서도 장애인에 대한 복지 정책이 있었습니다. 독질인·잔질인·폐질인 등과 같은 중증 장애인은 조세와 병역을 면제하고, 국가에서 식량을 지급해주기도 했습니다. '시정'이라 하여 장애·불치병으로 경제력을 상실한 부모의 부양을 위해 아들에게 군역을 면제시켜주는 제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장애인을 시혜의 대상으로 여긴 것은 아닙니다. 조선이 지금보다 직업군의 수가 적은 시대였으므로 제약적이기는 하나 장애인 고용 정책이 실시되었습니다. 우선, 국가 차원의 기우제나 민간인의 질병치료 등을 위해 시각장애인이 경전을 읽어주는 '맹인독경'이라는 직업군이 있었습니다. 정부에서는 이들이 모이는 '명통사'를 관리하였고요. 음악을 다루는 관청인 '관습도감'에 소속되어 궁중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관현맹', 천문을 관장하는 관청인 '서운관'의 소속으로 점술을 다루는 '과명맹' 등은 시각장애인을 위해 국가에서 마련한 관직입니다.

세종시대에 시각장애인 점술사 지화와 이신 등은 궁중의 음식을 담당하는 관청인 '사옹원'에서 일을 하였고요. 허조는 태종 및 세종을 보좌한 인물로, 좌의정이라는 고위직 관리까지 역임했는데, 어깨와 등이 굽어 '송골매 재상'으로 불린 척추장애인입니다.
 
1930년, 독경하는 맹인
 1930년, 독경하는 맹인
ⓒ 서울역사박물관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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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에 발표된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의 2018년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장애인구는 258만 5876명으로 전체 인구의 5.0%를 차지하며, 장애인구는 점차 증가세를 보입니다. 장애인구의 연령대를 보면 15~64세 이상은 51.3%, 65세 이상이 46.7%로, 장애인의 대부분이 중도장애를 입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19일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중앙부처의 장애인 고용률은 2018년 기준 3.43%밖에 되지 않습니다. 같은 날 보도된 연합뉴스 기사를 보더라도, 2019년 기준으로 대기업의 장애인 고용률이 2.5%로 중소기업보다 낮습니다.

장애인이 안정적으로 근무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정부와 기업의 역할 아닐까요? 그리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 가까이에서 직접 볼 수 있어야 공감력 높은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로, 장애 학생과 비장애 학생이 한데 어우러져 공부하는 통합 학급을 운영하고 있지만, 이제 걸음마 단계입니다. 게다가 코로나19 정국에서 장애인은 채용과 교육에서 비장애인보다 더욱 소외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2018년 기준 장애인의 연령대 비율
 2018년 기준 장애인의 연령대 비율
ⓒ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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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20일은 마흔 번째 장애인의 날이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포용국가'로 나아가려면 장애인을 돌봄이나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갈 존재로 바라보아야 함을 종종 주장합니다. 그러나 실제 인식이 어느 수준까지 와 있는지 저 자신부터 돌아보게 됩니다.

앞서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 통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장애인구의 대다 수가 중도장애인입니다. 이는 바로 나도 장애인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장애인과 함께하는 일은 곧 나를 위한 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담화를 통해 '장애인이 걷기 편한 길은 비장애인도 편하게 걸을 수 있다'고, 그래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훈민정음 창제에 몰두했던 세종은 시각 장애를 겪으며, 한자 '까막눈' 백성들의 처지에 깊이 공감했으리라 추측해봅니다. 글을 앞에 두고도 읽지 못하는 괴로움을 함께 겪은 백성들과 세종은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었고, 이로 인해 600년 후의 우리도 한글의 시혜를 입고 있습니다. 선조들처럼 우리도 장애와 비장애의 공감을 통해 미래 가치를 만들어갈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

태그:#실록읽어주는여자, #세종이야기꾼, #장애인의날, #조선왕조실록, #세종시대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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