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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 대통령, 재임 당시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있다(1980. 5. 25.).
 최규하 대통령, 재임 당시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있다(1980.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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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 유고' 호외

나는 올해 초부터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 연재를 진행하고 있다.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현재 19대 문재인 대통령 시대까지 살아오면서 이런저런 기억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즈음 나는 그 기억들을 되새김질하면서 여러 문헌을 들춰 연재기사를 쓰고 있다.

나는 평생 국어교사로 살아왔다. 그 바탕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운 데 있다. 우리말의 절반 이상은 한자말이기에 한자를 안다는 것은 우리말 공부에 그 만큼 유리하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정치에 관심이 많아 늘 신문을 보셨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한자나 한자어가 많았던 종이신문을 별 불편없이 읽으면서 살아왔다. 1950년대 후반 이후는 그 어떤 사건도 직·간접적으로 체험했기에 그런 바탕으로 이 연재를 이어가고 있다.

1979년 10월 27일, 아침 출근길이었다. 그 무렵 나는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 살았다. 매일 아침 근무지 이대부고로 출근하자면 경복궁 옆 적선동 버스정류장에서 금화터널을 지나가는 205번, 543번 버스를 갈아 타야 했다. 그날 아침 적선동 대로에는 조락한 노란 은행잎과 함께 여러 신문사에서 뿌린 호외들이 나뒹굴었다.

그때 주워본 호외의 헤드라인은 '박 대통령 유고'였다. "1979년 10월 26일 밤 박대통령의 유고로 인하여 긴급히 소집된 임시국무회의는 27일 상오 4시를 기해 전국 일원(제주도 제외)에 비상계엄을 선포키로 의결했다"라는 발표문이었다.
 
최규하 대통령이 국보위 상임위원장 전두환에게 육군대장 계급장을 달아준 뒤 악수하고 있다(1980. 8.).
 최규하 대통령이 국보위 상임위원장 전두환에게 육군대장 계급장을 달아준 뒤 악수하고 있다(198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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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 미국 대사관의 철야근무

나는 그날 학교 신문철에서 이런 기사와 함께 "새벽 4시 공공시설 계엄군 경비"라는 기사를 읽었다.
 
"… 한편 서울 중구 태평로 미대사관 7층 건물은 이날(26일) 자정부터 (27일) 새벽까지 대부분 환하게 불을 밝힌 채 이례적으로 철야근무하고 있었다. 이 같은 미 대사관의 철야는 드물게 보는 일이다." - <한국일보> 1면, 1979. 10. 27.
 
기사 출처의 기억이 가물가물하던 중, 엊그제 원주시립도서관에서 대출한 <전두환 타서전>이란 책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도, 그 이후에도 나는 이 짧은 기사가 시사하는 바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다. 이 보도는 당시 미국이 한국 지도자에 대한 관심과 동정에 촉각을 세우며 사태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으로 보였다.

이미 그 이전, 미 정보국(CIA)가 청와대를 도청한 사실까지 드러났다. 이는 그들이 당시 한국 대통령의 동정이나 행동반경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반도 남쪽에 수만 명의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는 미국의 처지로서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링 밖의 복싱 코치처럼 또는 체스게임을 하듯이 한국의 정국을 좌지우지하면서 나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너희들이 제 아무리 발버둥쳐도 우리에게는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라는 것처럼. 

주권국가로 무척 자존심이 상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12. 12. 사태 당시 군인들이 중앙청 일대를 점거하고 있다.
 12. 12. 사태 당시 군인들이 중앙청 일대를 점거하고 있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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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사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유고로, 최규하는 이튿날 새벽 임시국무회의에서 헌법 제84조에 따라 대통령권한대행이 됐다. 그해 12월 6일 서울장충체육관에서 치러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최규하는 단독으로 대통령에 출마했다. 재적 대의원 2560명 중 2549명이 참석한 가운데 2465표(무효 84표)를 얻어 제10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공화당 의장이었던 박준규는 후일 한 인터뷰(<월간조선> 1997년 10월호)에서 그때 최규하가 제10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박 대통령이 사망했을 당시, 나는 집권여당인 공화당 의장이었기 때문에 정계에 조금의 영향력은 갖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고 박 대통령의 뒤를 이을 대통령은 생활화된 민주주의자여야 하고, 절대 권력에 관심이 없는 사람, 국제적 배경이 있는 사람, 비 경상도 출신이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뜻을 같이 하는 정치인들과 함께 당·군·내각을 지휘할 지도자로 최규하 권한대행을 추대했습니다. …." - 권영민 지음 <자네 출세했네> 52~53쪽
 
그런 이유로 최규하는 과도기의 적임 인물로 발탁된 것으로 보인다. 최규하의 임무는 유신헌법 철폐와 민주적 헌법 제정 그리고 그에 따른 새 정부 출범을 이루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대통령에 취임한 지 6일 뒤인 1979년 12월 12일 밤. 전두환·노태우 등 군 내부 '하나회'를 주축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약 6000명의 군인들을 동원해 군사반란을 일으킨 뒤,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했다.

박 대통령 시해사건을 수사 중이던 전두환 합수부장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이미 체포한 뒤, 최 대통령에게 그의 체포를 재가해 달라고 요구했다. 박 대통령이 시해되던 그 순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현장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이유였다. 그러자 최규하 대통령은 '국방장관 의견을 듣고 처리하겠다'고 버텼다. 이튿날 새벽에 나타난 노재현 국방장관은 자신이 이미 서명한 보고서를 내놓으면서 건의했다.

"각하께서 재가해 주시는 것만이 이 사태를 수습하는 길입니다."

최 대통령은 그 말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9시간 남짓 만에 재가해 버렸다. 그때 그 재가의 결과가 어떤 결과를 낳은지에 대한 증언은 후일 끝내 거부했다.

시민들은 그런 영문도 모른 채 '서울의 봄'이라고 하면서, 새로운 민주정부 탄생에 잔뜩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링 밖의 코치들이나 체스판을 즐기는 이들은 한국민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연막을 피웠다.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청와대를 떠나는 최규하 대통령을 악수로 환송하고 있다(1980. 8.).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청와대를 떠나는 최규하 대통령을 악수로 환송하고 있다(198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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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은 유력한 대통령 후보이지만, 그중 어느 누구도 이상적인 선택 같지는 않다. 김영삼은 능력이 부족하고(less than capable), 김대중은 너무나 급진적이고(regarded as too radical), 김종필은 너무 때묻었다'고 한 노련한 외교관이 말하였다. …"
 
이는 1980년 4월 12일 자 <동아일보> 횡설수설의 한 대목으로 1980년 4월 7일 자 <뉴스위크>의 보도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링 밖의 그들에게 한국의 3김 지도자는 눈밖의 인물이었음이 잘 드러난다. 그 얼마 뒤 주한미군사령관 위컴은 아래와 같은 발언을 했다고 한다.
 
"'민주주의를 떠들어대고 있는 학생녀석들은 버릇없이 자란 망나니들이다'(spoiled brats)라고 한 것은 당시의 주한 미국대사 워커의 발언이었고, 한국인이란 '이게 너희들의 지도자'라고 누군가가 목에다 방울이라도 달아주면 '무조건 따라가는 들쥐(lemmings)들이나 다름이 없다'..." <한겨레>  2009. 8. 30. 갑자기 온 '서울의 봄'... 미국의 '어깃장'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을 발표하고 있다(1980. 8. 16.).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을 발표하고 있다(1980.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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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총을 쏘겠는가

이런 시국에 최규하 대통령은 자신의 생명과 자리만 지키던 허수아비였다. 당시 청와대부속실 비서관 권영민은 저서에서 최규하의 처지를 단 한 문장으로 설명했다. 

"나 같은 사람에게 누가 총을 쏘겠는가?"

평소 최 대통령은 경호받는 것을 무척 불편해할 만큼 존재감이 없이 지냈다. 그렇게 8개월 남짓 자리를 지키다가 그마저도 전두환 세력에 밀려 1980년 8월 16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재임 8개월 동안 일어난 사건들이다.

▲ 전두환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장 겸임(4. 14.) ▲ 비상계엄 전국 확대(5. 17.) ▲ 광주민주화운동 시작(5. 18.) ▲ 신현확 내각 총사퇴(5. 20.) ▲ 워컴 한미연합군사령관 광주항쟁 진압동의(5. 23.) ▲ 김재규 교수형 집행(5. 24.) ▲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신설(5. 31.) ▲ 계엄사 김대중 등 37명 내란 음모수사 발표(7. 4.) ▲ 국보위, '사회정화작업 일환으로 5천여 공무원 숙정(7. 9.) ▲ 계엄사, 내란음모사건 관련자로 김대중 등 계엄보통군법회의에 기소(7. 31.) 등등.

8개월동안 한국 현대사를 뒤흔든 사건들이 숨가쁘게 일어났다. 하지만 최규하는 미리 준비된 담화문을 읽는 모습만 보여줬을 뿐, 유감스럽게도 이 나라 대통령으로서 특단의 대책 같은 건 내놓지 않았다. 
  
모교인 원주초등학교에 있는 최규하 대통령 기념관인 '현석관'
 모교인 원주초등학교에 있는 최규하 대통령 기념관인 "현석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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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골똘히 연구한 작가 강준식은 다음과 같이 촌평했다. 나 또한 그를 유심히 지켜본 사람으로, 강 작가의 평가에 더 덧붙이고 뺄 것이 없다.
 
"그는 대통령이었다. 어떻게든 유혈의 비극은 막아야 할 지도자였다. 힘이 부쳐 막지 못했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런 시도는 보여줬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적극적인 노력이나 지도력을 발휘했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자신을 권좌에서 밀어낸 5공 내내 국정자문회의 의장으로 남아 있었던 대목이 암시하듯이, 최규하는 그저 현실을 수용하고 , 소극적으로 자기 것만 챙기는 일종의 본능적인 보수주의자였을까? 그는 고급 관리, 또는 행정가 수준의 그릇이었던 듯싶다. 그런 그가 운명의 장난으로 보다 큰 리더십을 요구하는 최고지도자의 자리에까지 올라갔던 데에 역사적 비극이 있었다." - 강준식 지음 <대한민국 대통령들> 233쪽

(* 다음 회부터는 전두환 대통령 편입니다.)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강준식 <대한민국의 대통령> / 권영민 지음 <자네 출세했네> / 강만길 엮음 <연표 한국사> 등 수십 권의 참고자료와 동시대에 살았던 여러 사람들의 증언, 신문기사 등을 참고하여 쓴 기사임을 밝힙니다.


태그:#최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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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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