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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개신교('천주교'와 구분하기 위해 '기독교'라는 말 대신 '개신교'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가 전래된 것은 언제일까? 19세기부터 여러 접점이 있었지만 대다수 개신교회는 1884년 9월 북장로회 미국인 선교사 호러스 알렌(Horace Newton Allen)의 조선 입국을 공식 전래 시점으로 보고 있다. 알렌 이후 북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 북감로회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부부, 스크랜턴(W. B Scranton)이 차례로 입국했다.

개신교보다 먼저 전래된 천주교는 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로 8천여 명의 신자가 처형당했다. 전래 당시 큰 '박해'를 당한 천주교와 달리, 개신교는 '환대'를 받았다.

개신교가 환대를 받은 계기는 2가지였다. 1884년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선교사 알렌이 치료해서 완쾌시킨 것과 1885년 을미사변 때 독살을 우려한 고종의 식사와 호위를 여러 선교사가 맡은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조선 왕실과 미국인 선교사의 우호 관계 속에 배재·이화·정신·경신 같은 개신교 계열 사립학교가 연이어 문을 열었다. 1910년 당시 인가된 학교의 35%가 '미션스쿨'이었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교육'과 '의료'를 중심으로 선교를 펼친 개신교의 전략은 주효했다.

개신교 전래의 역사 
 
러시아군을 공격하는 일본군 러일전쟁은 1904년 2월 8일 일본이 뤼순항을 기습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1905년 9월 5일 강화 때까지 러일전쟁은 1년 7개월 이어졌다. 러시아가 승리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일본이 승리했다. 러일전쟁의 승전국이 되면서 일본은 조선을 확보하고, 만주와 대륙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패배한 러시아는 혁명 정국으로 빨려 들어갔다.
▲ 러시아군을 공격하는 일본군 러일전쟁은 1904년 2월 8일 일본이 뤼순항을 기습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1905년 9월 5일 강화 때까지 러일전쟁은 1년 7개월 이어졌다. 러시아가 승리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일본이 승리했다. 러일전쟁의 승전국이 되면서 일본은 조선을 확보하고, 만주와 대륙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패배한 러시아는 혁명 정국으로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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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청일전쟁 이후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개신교는 급속히 퍼져나갔다. 국가가 제 역할을 못하면서 교회 공동체에 기대는 사람이 그만큼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 조선에서 종교는 '대폭발'했다. 개신교뿐 아니라 동학, 증산교, 대종교, 원불교 같은 종교가 교세를 크게 확장했다.

사회 혼란과 불안이 이어지자, 많은 조선인은 개신교에서 '대안'을 찾았다. 실제로 서북지방의 개신교도는 1904년부터 1905년까지 러일전쟁 시기에 크게 늘었다. 미국 선교사가 운영하는 교회는 미국 영토로 취급받았기 때문에 일본군이 침범하기 어려웠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교회로 갔다. 평양 개신교회는 '제국 속의 제국', 치외법권 공간으로 취급받았다.

1907년 1월 14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대부흥운동을 통해 개신교 신도 수는 3배 이상 늘었다. 예로부터 '색향'(色鄕)이라 불리며 '한국의 소돔'으로 인식된 평양은 개신교 부흥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평양은 한국을 넘어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평양을 중심으로 서북지방의 개신교회 성장은 눈부셨다. 1885년부터 1910년까지 한국에 설립된 683개 교회 중 평안도와 황해도에 설립된 교회가 362개로 53%를 차지했다. 1898년 북장로회 평양 선교 보고서에 의하면, 전체 장로교인 7500명 중 평안도와 황해도 교인이 5250명이었다. 조선 장로교 신자의 70%가 평안도와 황해도에 몰려 있었다.

한홍구 교수는 개신교가 평안도에서 급성장한 이유를 ▲ 국경에서 가까워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기 쉬웠고 ▲ 풍부한 물산과 경제력으로 교육 수준이 높았지만 차별을 받았고 ▲ 전쟁이 터지면서 종교의 보호막으로 피신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전래 초기 개신교 신도는 교회 마룻바닥에 남녀가 따로 앉아 예배를 봤다. 남녀 사이에는 휘장을 쳐서 공간을 구분했다. 1910년대부터는 휘장도 치웠다. 여성은 남성과 같은 공간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 '남녀평등'을 느꼈다고 한다. 신복룡 교수는 개신교가 한국 사회에 가장 크게 공헌한 부분이 민권 의식을 높이는 데 기여한 점을 들었다. 개신교 전래와 함께 약탈혼, 축첩(蓄妾), 씨받이, 학대 같은 악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건축물은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이다. 벧엘예배당에는 남쪽과 북쪽에 출입구가 하나씩 있다. 배재학당이 있던 남쪽 출입구로는 남성이, 이화학당이 있던 북쪽 출입구로는 여성이 드나들었다. 남녀의 구분이 엄격했던 시절의 풍경이 교회 건축물에 남아있는 사례다.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은 서양식 결혼식이 처음 열린 곳이기도 하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학생 두 쌍이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정동제일교회는 해방 정국에 주요 정치 지도자가 드나든 공간이기도 했다. 1903년 가을 개신교 신자가 된 백범 김구는 해방 후 귀국한 첫 주일 정동제일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이승만은 정동제일교회 장로였다.

한국 개신교의 빛과 그늘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 1985년 공사를 시작, 1897년 완공된 벧엘예배당은 최초의 서양식 개신교회이자 건축물로 꼽힌다. 대한제국 건축가 심의석이 참여한 걸로 알려져 있다.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가 건립을 주도했다. 정동제일교회에 아펜젤러의 흉상이 있는 건 이 때문이다. 한국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도 이곳에 설치되었다(1918년). 대한민국 사적 256호로 지정되었다.
▲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 1985년 공사를 시작, 1897년 완공된 벧엘예배당은 최초의 서양식 개신교회이자 건축물로 꼽힌다. 대한제국 건축가 심의석이 참여한 걸로 알려져 있다.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가 건립을 주도했다. 정동제일교회에 아펜젤러의 흉상이 있는 건 이 때문이다. 한국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도 이곳에 설치되었다(1918년). 대한민국 사적 256호로 지정되었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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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성서공회(BFBS) 한국지부는 1896년부터 1940년까지 총 2천62만여 권의 성서(聖書)를 발행했다. 미국성서공회(ABS) 한국지부는 1901년부터 1919년까지 266만 권의 성서를 펴냈다. 서점과 도서관이 변변치 않았던 그 시절 성경은 어떻게 보급되었을까?

성경을 짊어지고 전국을 누비며 성경의 판매와 보급을 맡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권서'(勸書)라고 한다. 영국성서공회 성경의 85%, 미국성서공회 성경의 98%가 권서의 활약 덕분에 보급되었다. 권서는 걸어 다니는 '도서관'이자 '서점' 역할을 했다.

성경이 보급되자 이를 읽기 위해 국문, 즉 한글 공부 운동이 일어났다. '예수 믿고 국문 깨쳤다'는 말이 나온 건 이 때문이다. 성경을 공부하는 '사경회'(査經會)도 활발했다.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의 대부흥운동도 사경회를 통해 촉발되었다. 성경이 한글로 번역·보급되면서, 성경 전파는 한글 대중화에 기여했다. 개신교 차원에서 한글 연구도 활발했다. 주시경, 이윤재, 최현배, 김윤경, 김선기 같은 한글학자가 개신교도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일제의 국권 침탈 과정에서 개신교도의 활약도 눈에 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스티븐스를 저격한 장인환, 박영효 궁내부 대신 축하연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려 한 정재홍, 안중근 거사에 함께 참여한 우연준, 매국노 이완용을 명동성당에서 습격한 이재명이 모두 개신교도였다.

1919년 3.1 운동에는 천도교와 함께 개신교 세력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개신교 신자가 16명이었다. 개신교에 이어 천도교가 15명, 불교가 2명이었다. 천주교와 유림은 단 한 명도 민족대표로 참여하지 않았다. 3.1 운동 투옥자 1만9525명 중 17%인 3373명이 개신교도였다. 개신교가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자, 일제는 경기도 화성 제암리 교회 학살을 비롯해 개신교를 탄압했다.

한편, 일제강점기인 1920~1930년대 조선 유학생의 3/4이 서북지방 출신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개신교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유학을 통해 조선의 엘리트가 된 이들은 훗날 친미적 성향의 개신교도로 성장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일제는 '신사 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평양 숭실전문학교, 숭실중학교, 숭의여학교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운영하던 학교를 자진해서 폐교했다. 주기철 목사와 윤산온(George Shannon McCune) 같은 이는 신사 참배를 '우상 숭배'라는 이유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반면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같은 개신교단의 상당수가 신사 참배를 받아들였다. 1938년 9월 조선 개신교 최대 종파인 장로교는 총회를 통해 신사 참배에 대한 '지지'를 공식 표명했다. 개신교의 신사 참배 수용은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는 십계명의 제1계를 위반한 것이라는 갈등과 비판을 불러왔다.

신사 참배만이 아니라 개신교의 '친일 행위'도 문제였다. 상당수 개신교단은 신사 참배 수용에서 나아가, 전쟁 참여를 종용하거나 전투기를 헌납했다. 일제는 조선 장로교회의 헌금으로 마련한 비행기에 '조선 장로호'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오긍선과 양주삼 목사는 "학도여 성전(聖戰)에 나서라"라고 외쳤다.

장로교회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시기 무운장구 기도회를 8953회, 일본 찬양 시국강연회 1355회, 전승 축하회 604회, 군부대 위문 행사를 183회 가졌다. 중일전쟁 때인 1939년 YMCA 총무였던 신흥우가 친일잡지 <동양지광>에 쓴 글을 보자.
 
"우리의 위대한 구주 예수도 무엇보다 먼저 '나라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의 국가는 대일본제국이다. 그리고 우리 조선 기독교인도 대일본제국의 신민(臣民)이다. 지금의 우리는 종교인이고 조선인이기 이전에 무엇보다 일본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천황 폐하의 충성한 적자(赤字)로서 일본을 사랑하라. 이것이 우리들 조선 기독교도에게 부여된 신의 사명이다. 나는 감히 이렇게 확신한다."

일제강점기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 살 것을 강조한 신흥우 일파에 대해 해방 후 폭로가 이어졌다. 교회 재산을 불법적으로 처분하고, 교권을 남용했을 뿐 아니라 일제의 '밀정' 역할까지 했다는 것이다.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한 정춘수 목사는 흥업구락부 사건 이후 '친일'의 길을 걸었다. 그는 국민총력연맹, 조선임전보국단 같은 전쟁 협력단체에서 간부로 일했다. 친일 행적에도 불구하고 정춘수 목사는 1980년 충북 청주에 3.1공원이 조성될 때 '독립운동가'로 동상이 건립되었다. 시민사회의 문제 제기로 1996년 2월 8일 정춘수 동상은 '철거'되었지만, 우리 사회에서 개신교 지도자의 친일 문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묻혀'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사례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적발한 반민족 행위 피의자 657명을 종교별로 나눠보면, 개신교가 38명, 불교 5명, 천도교 3명, 유교 2명, 신도 2명, 기타 2명이다. 반민족 행위자 중 개신교인 수가 유난히 많았다. 일제강점기 개신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제 통치에 더 '협력'했음을 알 수 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저항에 앞장섰던 개신교의 놀라운 '변신'이다.

세계 선교사의 기적, 대한민국
 
영락교회 영락교회는 한국 최초의 대형교회로 꼽히는 곳이다. 영락교회를 일군 한경직 목사는 “나는 자손들에게 남길 유산은 하나도 없다”로 시작하는 유언을 남겼다. ‘청빈’과 ‘겸손’의 상징으로 한국 개신교단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 중 하나다. 한경직 목사는 개신교 각 교파의 기자 125명을 대상으로 하는 설문조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로 꼽혔다. 1992년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꼽히는 존 템플턴 상(John Templeton Prize)를 받았다. ‘흠 없는 것이 흠’이라는 평을 들었지만, 1992년 6월 18일 존 템플턴 상 수상 축하 예배 자리에서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했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 영락교회 영락교회는 한국 최초의 대형교회로 꼽히는 곳이다. 영락교회를 일군 한경직 목사는 “나는 자손들에게 남길 유산은 하나도 없다”로 시작하는 유언을 남겼다. ‘청빈’과 ‘겸손’의 상징으로 한국 개신교단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 중 하나다. 한경직 목사는 개신교 각 교파의 기자 125명을 대상으로 하는 설문조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로 꼽혔다. 1992년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꼽히는 존 템플턴 상(John Templeton Prize)를 받았다. ‘흠 없는 것이 흠’이라는 평을 들었지만, 1992년 6월 18일 존 템플턴 상 수상 축하 예배 자리에서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했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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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는 130여 년이라는 짧은 전래 기간에도 불구하고 신자 수가 대한민국 인구의 30%를 넘나들 만큼 '급성장'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교회 수뿐 아니라 해외 파견 선교사 수에서도 미국에 이어 세계 2위(1만 2천여 명)를 차지할 정도로 '선교 대국'이 되었다. 공격적인 해외 선교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2007년 분당샘물교회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 개신교인 23명이 탈레반에 붙잡혀, 2명이 죽고 21명은 43일 만에 풀려났다.

필리핀을 제외하면 아시아에서 한국의 개신교도 비율이 가장 높다. 짧은 선교 역사를 고려하면 더욱 대단한 수치다.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이라 할 수 있는 중국과 일본의 개신교도 비율이 한자리 수에 머무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일본은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를 모두 합해도 전체 인구의 1%를 넘지 않는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의 개신교 성장사는 '세계 선교사의 기적'으로 불릴만하다.

개신교는 어떻게 한국에서 기적 같은 성장을 했을까? 그 이유는 대체 뭘까? 김동춘 교수는 그 이유로 '전쟁'과 '분단'을 지목했다. 한국전쟁과 남북 분단을 통해 북한은 유래 없는 '반미 공산국가'로, 남한은 '반공 개신교국가'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해방 직후 남한의 이념 성향은 77% 가까운 사람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선호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을 점령한 미군정은 개신교도를 집중적으로 발탁했다. 미군정 부처장 19명 중 11명이 개신교도였다. 한국인 행정 고문의 54.5%, 초대 한국인 국장.차장.처장의 46.4%, 민주의원의 35.7%, 입법의원의 23.3%가 개신교 신자였다.

미군정은 일제의 '적산'(敵産)을 불하하는 과정에서 개신교에 많은 특혜를 제공했다. 미군정에서 적산 처리를 담당하는 부처의 책임자가 대부분 개신교도였다. 미군정은 1946년 5월부터 12월까지 적산관리처장에 개신교인이자 평양신학교 교수인 남궁혁을 임명했다.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H. Underwood)는 장로교 선교회 재산관리관으로 위촉되었고, 적산관리과에서 일하는 실무자도 영락교회에 다니는 김병훈이었다. 미군정은 병원·농장·대지·가옥 같은 상당수 적산을 개신교에 불하했다. 개신교가 특혜를 '독차지한' 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경직 목사가 세운 영락교회(옛 베다니교회), 송창근 목사의 성남교회(옛 바울교회), 김재준 목사의 경동교회(옛 야고보교회)는 일본 텐리교(天理教) 건물이 있던 곳에 자리 잡았다. 텐리교 건물과 재산은 조선 텐리교인들이 합법적으로 양도받았으나 영어에 능통한 한경직과 김재준은 미군정 담당자와 '교섭'해 텐리교 재산을 손에 넣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Thou shalt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마태복음의 구절이다. 십계명에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와 "도둑질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다. 개신교인에게 조선 텐리교인은 '이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텐리교 건물을 '차지'한 영락교회와 성남교회, 경동교회는 1945년 12월 2일 같은 날 동시에 창립예배를 가졌다. 이른바 '월남자 교회'를 무대로 남한으로 내려온 청년들이 서북청년단 같은 극우 테러조직을 만들어 활개치기도 했다.

일제가 남긴 자산을 개신교가 많이 '차지'한 것은 개신교가 독립운동에 가장 '앞장'섰기 때문이 아니다. 해방 후 남한을 점령한 미군정의 '정책' 때문이다. 종교 중에는 천도교가 일제에 가장 저항했으나 해방과 분단국가 수립 과정에서 천도교는 급속히 교세가 줄어들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속에서 개신교도는 남한 내 '파트너'로 선택받았다. 해방 이후 남한의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종교 분야에서 개신교가 급속히 세력을 불린 것은 이 때문이다. 이 과정을 통해 남한은 '반공 개신교국가'로 개조되었다.

동아시아 최초 개신교 국가의 출현
 
경동교회 1945년 김재준 목사가 장충동 1가 26-1번지 일본 텐리교 건물을 인수한 것이 경동교회의 시작이다. 당시 조선신학교 교장이었던 김재준은 30여 명의 신도와 함께 교회를 시작했다. 성야고보 전도교회였던 교회 이름을 1947년 ‘경동교회’로 바꿨다. 김재준 목사가 은퇴한 후 강원용 목사가 뒤를 이었다. 경동교회는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교회 건물이며, 마산 양덕성당, 불광동성당과 더불어 김수근의 3대 종교건축물로 꼽힌다.
▲ 경동교회 1945년 김재준 목사가 장충동 1가 26-1번지 일본 텐리교 건물을 인수한 것이 경동교회의 시작이다. 당시 조선신학교 교장이었던 김재준은 30여 명의 신도와 함께 교회를 시작했다. 성야고보 전도교회였던 교회 이름을 1947년 ‘경동교회’로 바꿨다. 김재준 목사가 은퇴한 후 강원용 목사가 뒤를 이었다. 경동교회는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교회 건물이며, 마산 양덕성당, 불광동성당과 더불어 김수근의 3대 종교건축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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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시점에 북한 개신교 신자 수는 20~30만 명 수준이었고, 남한은 10만 명 정도였다. 신자 수를 비교하면 남한보다 북한이 2~3배 많았다.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처럼 사회주의는 종교에 대해 비판적이다.

해방 후 북한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북한 개신교인은 대거 38선 이남으로 이주했다. 북한의 개신교세는 줄고, 남한에서 개신교 신자 수는 크게 늘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먹고살기 힘들 때 교회가 최소한의 '안전망' 역할을 했다는 점, 교회를 다니면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되는 점도 개신교 신도 증가에 일조했다.

북한에서 권력을 잡은 김일성의 어머니는 강반석이다. '반석'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그녀는 독실한 개신교도였다. 강반석뿐 아니라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도 개신교도였다. 김일성 역시 개신교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남과 북에서 처음 정권을 잡은 권력자가 모두 개신교와 무관치 않다는 점도 눈에 띈다.

남한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한국의 모세이자 예수'라고 자처한 이승만은 1919년 4월 7일 미국 연합통신사(UPI)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향후 조선을 동양 사상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

이승만은 청년 시절부터 개신교를 바탕으로 나라를 세우려는 꿈을 여러 차례 피력했다. 이런 '다짐'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그가 대통령이 되면서 즉각 실행에 옮겨졌다. 제헌국회도 식순에 없던 '기도'로 시작했고, 대통령 취임식도 개신교식으로 거행했다. 국기에 대한 경례가 '배례'(머리 숙여 절하기)에서 '주목례'(가슴에 손을 얹고 바라보기)로 바뀐 것도,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정한 것도 모두 이승만 시절이다.

이승만 초대 내각의 42.9%, 이승만이 집권한 12년 동안 장관과 차관의 37%가 개신교인이었다. 당시 한국의 개신교 신자 수는 전체 인구의 1%였다. 이승만 정부가 개신교도를 얼마나 집중적으로 '발탁'했는지 알 수 있다. 개신교 전도를 위한 지상파 방송(CBS)도 이승만 집권 때인 1954년 허가됐다. 천주교의 평화방송과 불교방송이 35년 뒤인 1989년에 허가받은 것과 대조적이다.

이승만의 개신교 중시 정책은 다른 종교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이승만은 자신이 집권한 12년 동안 불교 신자를 단 한 명도 장관으로 발탁하지 않았다. 그는 불교뿐 아니라 같은 기독교인 천주교까지 탄압했다. 천주교 신자인 공무원은 좌천시키거나 해고했다. 천주교가 운영하던 일간지 <경향신문>도 폐간시켰다. 행정부뿐 아니라 국민을 대표하는 입법부도 개신교 비율이 높았다. 역대 국회의원 중 개신교도 비율은 20%가 넘는다.

장로였던 이승만이 대통령, 권사였던 이기붕이 부통령이었던 시절을 거치며, 개신교는 교세 확장의 시기를 맞았다. 강성호는 4.19 혁명의 원인이 된 3.15 부정선거에 대해 이런 평가를 했다.

"1960년 3.15 선거는 '장로' 대통령과 '권사' 부통령을 세우기 위해 최인규 '집사'(내무부장관)와 전성천 '목사'(공보실장)가 주도한 부정선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 엘리트의 '일제'(日帝) 추종은 해방 후 '미제'(美製) 선호로 바뀌었다. '미제' 선호는 제품과 문화 영역에 그치지 않고 종교 분야까지 이어졌다. 가장 미국적인 종교로 대중에게 인식되면서, 개신교는 '낯선' 종교에서 '선호' 종교로 자리 잡았다.

교회 안에서도 미국식 예배와 집회를 따라 하며, 미국식 복음송(CCM, 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이 유행했다. 한국 개신교의 삼위일체는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이 아니라 '돈, 미국, 장로'라는 말이 이로부터 나왔는지 모른다. 

개신교의 '지나친' 미국 사랑은 신자뿐 아니라 시민까지 황당하게 만들었다. 2003년 1월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는 수만 명이 모인 서울 시청광장 친미 집회에서 '영어'로 설교했다. 신도조차 언제 "아멘"을 외쳐야 할지 당황했다는 후문이 있다. 

'장로 대통령'의 출현
 
소망교회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초대형교회. 등록 교인이 8만여 명, 출석 교인은 4만여 명으로 알려져 있다. 1977년 곽선희 목사가 신도 11명과 함께 시작했고,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상가를 거쳐 지금의 위치에 자리잡았다. 곽선희 목사에 이어, 김지철 목사, 김경진 목사가 뒤를 이었다. 이명박 정부 때 소망교회 출신 여럿이 정부 고위직에 임명되면서 ‘고소영’ 정권이라는 논란을 일으켰다.
▲ 소망교회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초대형교회. 등록 교인이 8만여 명, 출석 교인은 4만여 명으로 알려져 있다. 1977년 곽선희 목사가 신도 11명과 함께 시작했고,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상가를 거쳐 지금의 위치에 자리잡았다. 곽선희 목사에 이어, 김지철 목사, 김경진 목사가 뒤를 이었다. 이명박 정부 때 소망교회 출신 여럿이 정부 고위직에 임명되면서 ‘고소영’ 정권이라는 논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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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순복음교회는 부자가 되고(물질), 건강해지며(치유), 영적(영)으로 구원받는 것이 하나라는 '3박자 구원론'을 내세웠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믿으면 잘 된다'는 뜻이다. "화평케 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라는 성경 구절은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로 바뀌어 퍼져 나갔다. 언론인 이세영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사가 대한민국 성장의 축소판이었음을 지적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재정 규모는 1972년부터 1981년까지 연평균 9.3%의 성장률을 기록했는데, 같은 기간 한국의 평균 경제성장률이 9.2%였다. 조용기가 서울 변두리 대조동에서 천막교회를 하다가 도심인 서대문으로 진출해 본격적인 도약의 기반을 마련한 해가 5.16 군사반란이 일어난 1961년이란 사실도 흥미롭다."

1958년 5명의 신도로 출발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963년 3천 명, 1973년 1만 8천 명, 1981년 20만 명, 1990년 59만 명, 1999년 72만 명을 거쳐, 85만 명의 신도를 자랑하는 세계 최대 교회로 급성장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신도 수 2위부터 10위까지 교회를 합한 것보다 2배 가까이 신도가 많다. 1958년 서대문구 대조동(지금의 은평구) 달동네 천막교회로 출발한 순복음교회의 기적 같은 성장사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은사 받은 여성을 '구역장'으로 삼는 구역장 제도를 기반으로 급속한 성장을 이뤘다. 김진호가 지적한 것처럼 '기도원'을 교회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조엘 오스틴(Joel Osteen) 목사가 이끄는 미국 최대 교회 레이크우드(Lakewood Church)의 주말 출석 교인 수가 5만 명이라는 걸 생각하면,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한국 개신교는 성직주의, 성장주의, 승리주의를 지향해왔다. 이를 상징하는 교회가 바로 여의도순복음교회다. 신도의 헌금 편의를 위해 여의도순복음교회는 교회 안에 '현금인출기'를 설치하기도 했다. 헌금에 대해 조용기 목사는 이런 말을 했다.

"누가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는 누가 더 헌금을 많이 했는가를 비교해보면 안다."

"십일조 안 하면 암 걸린다"라고 말한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 수준은 아니지만, 대형교회 목회자의 '헌금'과 '현금' 사랑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순복음교회 신도 대다수가 믿어서 잘 되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신도의 믿음으로 조용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잘 된 건 확실하다.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고 인구 증가세가 뚜렷해지면서 강남에도 교회가 크게 늘었다. 강남에 어찌나 교회가 많은지 1982년 2월 17일 <동아일보>는 "강남구는 '교회구'"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사랑의교회를 비롯한 대형교회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강남 뿐 아니라 수도권 개발과 함께 신도시를 기반으로 삼은 대형교회가 속속 생겨났다.

한국 사회는 초·중·고등학교와 대학에서 '미션스쿨'의 비율이 높다. 미션스쿨 중 상당수는 학생의 종교와 상관없이 채플 수업을 '강요'한다. 이런 교육기관에 취업할 때는 개신교도임을 '증명'하는 서류(세례증명서, 담임목사 추천서)를 내도록 요구한다.

1966년 베트남 파병 당시 한국군은 김성은 국방장관을 비롯, 육군참모총장 김계원, 해군참모총장 김영관, 공군참모총장 장지량, 해병대사령관 강기천,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이 모두 개신교도였다. 군대에 '군목'(軍牧)을 두고, 훈련소에서부터 떡을 나눠주며 군인을 신자화하는 운동이 벌어졌다. 한국은 비기독교 국가 중 처음으로 '군종 제도'를 도입한 국가다. 개신교는 '황금어장'이라 불린 군대에 군목을 두고 '어장관리'하며 신자를 급속히 늘렸다.

교육과 취업, 군대를 통해 개신교도가 '재생산'되는 사회적 구조가 정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특정 종교를 '국교'(國敎)로 인정하지 않지만, 개신교는 사실상 '국교'로 기능해온 게 아닐까. 이승만 이후 '장로 대통령'은 1992년 김영삼, 2002년 이명박까지 연이어 출현했다.

소망교회 장로였던 이명박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고려대학교, 소망교회, 영남 출신 인사를 선호해서 '고소영' 정부라 불렸다. 박근혜 정부는 사랑의교회, 미래를경영하는모임 인사를 중용해서 '사미자' 정부라 불리기도 했다. 장로 대통령의 출현과 함께 고무된 개신교는 북방 선교에 열을 올렸다. 개신교회는 '사회주의 국가에 태극기와 함께 십자가를 꽂겠다'며 선교사 파송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박노자의 지적처럼 '저신뢰 연줄형 사회'인 한국에서 특정 교회를 다닌다는 '교연'(敎緣)은 혈연·지연·학연과 함께 '제4의 연줄'로 자리 잡았다. '연줄'을 넘어서 특정 교회를 다니는 것이 '신분'을 상징하기도 했다.

해방 전 37만 명이었던 개신교인 수는 1950년 남한에서만 60만 명을 넘어섰다. 이승만이 하야한 1960년에는 160만 명을 돌파했다. 15년 만에 신도 수가 4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북한 지역에 있던 개신교인의 대규모 월남, 전후 교회를 중심으로 한 원조 물자의 배포, 정치권과 결탁을 통해 개신교는 남한에서 유래 없는 성장을 했다.

여기에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기복(祈福) 신앙으로 개신교가 자리 잡으면서, 세계 50대 교회 중 23개가 한국 교회로 채워지는 '기적'을 일군 것이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전략적인 선택과 적극적인 비호 속에 개신교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개신교 성장은 박정희 시대에 들어서도 멈추지 않았다. 1960년 5011개였던 교회는 1970년 1만 2천866개, 1980년 2만 1243개, 1990년에는 3만 5869개로 30년 만에 7배 늘어났다. 신자 수도 1960년 60만 명 수준에서 1970년 300만 명을 거쳐, 1977년 500만 명, 1980년 700만 명, 1990년에는 1200만 명으로 늘어났다. 

정치집회가 철저히 불허되던 이 시절, 수십만에서 수백만 명이 운집한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목사의 집회는 허용되었다. 1973년 6월 3일 빌리 그레이엄의 마지막 집회 때는 무려 110만 명이 여의도 광장에 모였다.

당시 박정희는 빌리 그레이엄과 따로 면담을 하기도 했다.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1974년 한국대학생선교회(CCC)가 주최한 엑스폴로 74 전도대회(655만 명), 80복음화대성회(1700만 명)가 허용된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조물주'를 위한 '건물주' 경쟁
 
사랑의교회 1978년 옥한흠 목사가 개척한 교회. ‘강남은평교회’로 출발하여 1981년 ‘사랑의교회’로 이름을 바꿨다. 2003년부터 오정현 목사가 이끌고 있다. 2013년 지금의 거대한 건물을 지었고, 기네스북에 세계에서 가장 큰 지하 예배당을 가진 건물로 등재됐다. 사랑의교회는 공공도로 점용 사건으로 10년 동안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대법원은 사랑의교회 도로점용 사건을 ‘불법’으로 최종 판결했다.
▲ 사랑의교회 1978년 옥한흠 목사가 개척한 교회. ‘강남은평교회’로 출발하여 1981년 ‘사랑의교회’로 이름을 바꿨다. 2003년부터 오정현 목사가 이끌고 있다. 2013년 지금의 거대한 건물을 지었고, 기네스북에 세계에서 가장 큰 지하 예배당을 가진 건물로 등재됐다. 사랑의교회는 공공도로 점용 사건으로 10년 동안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대법원은 사랑의교회 도로점용 사건을 ‘불법’으로 최종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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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는 신자 수 늘리기 뿐 아니라 교회의 외형 확대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교회 지출의 40%를 교회 건물에 사용하면서, 빚을 내서라도 대형교회를 짓는 데 골몰했다. 누구나 '건물주'를 꿈꾸는 시대, 교회 역시 대열의 선두에 섰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자랑하는 순복음교회는 여의도로 이전하면서 수많은 신도가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초대형교회를 지었다. 설교자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될 수 있도록 원형극장에, 복층 관람석 구조로 교회를 지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평면이 다른 교회와 달리 네모가 아닌 원형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

목회자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한국 교회의 구조는 한국 교회 건축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통제와 효율을 자랑하는 판옵티콘(panopticon) 구조다. 평면이 원형이다 보니, 지붕도 원형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지붕에는 국회의사당처럼 '돔'이 얹혔다. 지름이 자그마치 53미터에 달한다.

국회의사당의 돔이 기능적 필요성이 아니라 '뽀대'를 위해 얹힌 것과 달리,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돔은 권력과 시선 집중이라는 기능상 필요로 얹혔다. 씁쓸함을 남긴다는 점에서 두 돔은 비슷하지만 말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설계자는 건축가 조행우다.

'건물주'로서 '조물주'를 모셔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라 생각한 걸까? 바벨탑의 교훈이 무색하게 개신교 대형교회는 높디높은 교회 건물 짓기 경쟁에 몰두해왔다. 이쯤에서 "낮은 곳에 임하소서"라는 성경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온라인 시대가 되면서 개신교 신자는 인터넷을 통해 어디서든 예배를 볼 수 있다. '일상이 성소이자 예배'인 시대에 신자를 하나의 공간에 끌어모으기 위해 대형건물을 짓는 것은 뒤떨어진 발상 아닐까. 함석헌은 1956년 교회당 짓기에 집착하는 개신교를 향해 이런 글을 남겼다.

 
"교회당 탑이 삼대같이 자꾸만 일어서는 것은 반드시 좋은 현상이 아니다. (중략) 예수가 오늘 오신다면 그 성당 예배당을 보고 '이 교회를 헐라'하지 않을까. 본래 어느 종교나 전당을 짓는 것은 그 역사의 마지막 계단이다."

교회가 걸어가는 길이 성경의 말씀과 거리가 있을 때 우리는 교회를 중심(church-centered)에 둬야 할까, 성경(scripture-centered)이나 그리스도에 중심(Christ-centered)을 둬야 할까.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는 어디에 있는 걸까.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성경 구절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가 머무는 곳'(church stay)이 아니라 '하나님이 머무는 자리'(God stay)에 있을 것이다. 이미(already) 왔지만 아직(not yet) 완전히 구현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갈구가 신앙인이 추구하는 삶이라면, 교회도 이런 관점으로 지어야 하지 않을까.

교회 건물 공사비가 일반 건물에 비해 더 많이 든다는 말도 들린다. 하나님의 성전을 '공들여' 짓기 때문일까? 교회당 건축 과정에서 브로커가 판을 치고, 설계와 건축 과정에서 불법이 자행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현대건설 대표 시절 회사 돈으로 소망교회를 무상으로 지어주고, 대한생명이 온누리교회를 지어준 것은 순수한 신심(信心) 때문이었을까?

교회 건물을 무상으로 지어주면서 기업인이 탈세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례도 있다고 하니,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라'고 말하는 목회자가 회개할 짓을 일삼는다면, '목회자'의 탈을 쓴 '범죄자'가 아닐까.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는 예수의 말씀을 상기한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하지 않는 자는 그가 목회자라 해도 더 이상 우리의 형제, 자매, 가족이 아니다. 마가복음의 다음 구절은 목회자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그때가 언제 올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어라."

양희송은 영국 더럼대학(Durham University)의 피트 워드(Pete Ward) 교수의 '액체교회'와 '고체교회'론을 소개한 바 있다. 고체교회(solid church)는 움직이지 않는 교회 건물에서,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예배를 하는 교회를 지칭한다. 반면 액체교회(liquid church)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진실한 소통으로 감동과 자극을 주는 교회를 말한다. 오늘날 대한민국 교회는 고체교회일까, 액체교회일까. 몇몇 교회는 이미 죽은 '시체교회'가 아닐까.

'정경유착'을 넘어 '정교유착' 사회로
 
함석헌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함석헌은 평양고보를 다니다가 정주 오산고보를 졸업했다. 오산 시절 기독교를 접했다. 도쿄고등사범학교(지금의 츠쿠바대학교) 유학 때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문하에서 ‘무교회주의’를 접했다. 김교신과 함께 <성서조선>에 참여했다. 해방 후 <사상계> 주필로 활동하며 <한국 기독교에 할 말이 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사상계> 폐간 후 <씨알의 소리>를 펴냈다.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을, 해방 후에는 반독재 투쟁을 벌였다
▲ 함석헌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함석헌은 평양고보를 다니다가 정주 오산고보를 졸업했다. 오산 시절 기독교를 접했다. 도쿄고등사범학교(지금의 츠쿠바대학교) 유학 때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문하에서 ‘무교회주의’를 접했다. 김교신과 함께 <성서조선>에 참여했다. 해방 후 <사상계> 주필로 활동하며 <한국 기독교에 할 말이 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사상계> 폐간 후 <씨알의 소리>를 펴냈다.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을, 해방 후에는 반독재 투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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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단은 이승만 시대에 이어 친미 반공주의를 고수하면서 한국전쟁 때 휴전협정을 반대하고, 박정희 정권의 베트남 전쟁 파병을 지지했다. 이만열 교수의 표현처럼 우리 교회는 '십자가'의 길이 아닌 '십자군'의 길을 걸어왔다. 

한국 개신교의 전쟁 지지는 이뿐만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부터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최근의 이라크전쟁에 이르기까지 개신교 주류는 전쟁 지지에 앞장섰다. 함석헌은 평화를 외면하는 개신교에 대해 "이때껏 남의 나라의 침략 속에 살면서 평화운동 하나 일으킨 것이 없다"는 비판을 남긴 바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20조 2항은 정치와 종교의 구분을 명시하고 있다.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

헌법 조항과 달리 한국의 개신교는 정치와 종교의 '결탁' 과정에서 급성장했다. 대한민국은 '정경유착' 사회일 뿐 아니라 '정교유착' 사회였던 것이다. '정교분리'(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는 헌법으로만 존재하는 사문화된 조항이었다.

개신교가 한국 사회에서 보수적인 행태만 이어온 건 아니다. 1970년대 노동운동 현장에서 '산선'이라 불린 도시산업선교회는 큰 역할을 했다. 도시산업선교회는 한국카톨릭노동청년회(JOC)와 함께 민주노조 운동의 씨앗을 뿌린 단체였다.

동일방직, 반도상사(지금의 LG상사), 원풍모방, 콘트롤데이타에 노동조합이 생긴 것은 두 단체 활동 덕분이다. 반도상사의 민주노조 설립을 도운 사람은 인천산업선교회에서 일한 김근태와 인재근 부부, 최영희다.

"도산(도시산업선교회) 들어오면 회사 도산한다."

이런 말이 돌 정도로 당시 산업선교회는 노동현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한교협 NCCK)는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3선 개헌 추진에 반대하며 맞서기도 했다. 1924년 9월 24일 출범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를 모태로 한 한교협은 1974년 인권위원회를 발족시켜 인권과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 1970년대와 1980년대 개신교는 민주화 운동의 한 주체로 참여했다.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개신교의 기여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주류의 기본 입장은 사회의 낮은 곳에 있는 노동자의 편이라기보다 자본가의 편이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는 사도 바울이 전한 메시지는 말뿐인 것일까. 우리 교회가 자본가와 노동자, 부자와 빈자를 하나로 아우르는 공간이었는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말씀에 귀 기울인 곳이었는지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 '명성교회 도서관'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명성교회 도서관'을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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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bookhunter72@gmail.com

사람사이에 조용히 부는 따스한 봄바람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 동물, 책을 좋아하는 고양이 집사입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가 지금은 소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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