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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 선생 흉상(한글회관 입구) 올해는 주시경 선생이 만든 한글학회가 창립된 지 110주년 되는 해이다. 상동교회를 주무대로  한글연구와 한글 보급운동에 혼신을 다했던 주시경 선생은 <우리말이 내리면 우리 정신과 우리 나라도 내린다>고 하였다. 항상 보따리에 국어책을 들고 다니면서 열강을 하였기에 사람들이 <주보따리>라고 불렀다.
▲ 주시경 선생 흉상(한글회관 입구) 올해는 주시경 선생이 만든 한글학회가 창립된 지 110주년 되는 해이다. 상동교회를 주무대로 한글연구와 한글 보급운동에 혼신을 다했던 주시경 선생은 <우리말이 내리면 우리 정신과 우리 나라도 내린다>고 하였다. 항상 보따리에 국어책을 들고 다니면서 열강을 하였기에 사람들이 <주보따리>라고 불렀다.
ⓒ 하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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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이후 열전과 냉전ㆍ신냉전을 차례로 치루면서도 남북에서는 함께 존중하는 근현대 인물이 있다. 주시경ㆍ홍범도ㆍ안중근ㆍ신채호가 그분들이다. 북한에서는 김두봉 등 한글운동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역할로 해방 후 한글전용을 하게 되면서 주시경이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망국조약을 계기로 많은 동지들이 체포 감금당하고, 혹은 해외로 망명하여 버리었다. 주시경 선생은 아주 고독한 사람이 되었다. 이 망국조약은 그가 요절하게 되는 직접 원인이 되었다. 이 망국조약 후 조선광문회가 설립되자, 그는 그곳에서 교정과 조선어 자전 편찬 사업을 떠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다지 용이한 일은 못되었다.

왜냐하면, 첫달부터 일본 제국주의는 일찍이 세계 역사상에 그 례를 볼 수 없는 극악한 중세기적 공포정치를 하여왔기 때문이요, 조선 민족의 일체의 권리와 자유를 박탈하고 조선 민족을 노예로 만들려 했으며(…) 주시경 선생은 이러한 역경에서 자기의 뜻을 폐지 못하고 우울과 초조 가운데서 쓸쓸한 생활을 하다가, 결국은 1914년 7월 27일에 39세를 일생으로 한 많은 세상을 버리게 되었다. (주석 2)

 
주시경 선생 주시경 선생
▲ 주시경 선생 주시경 선생
ⓒ 한글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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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동지들이 해외로 떠났다. 더 이상 국내에서는 국권회복운동을 하기 어려웠다. 신채호ㆍ박은식ㆍ이회영ㆍ이상룡ㆍ홍명희ㆍ정인보ㆍ이동휘 등이 국치를 전후하여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해외로 망명하였다. 대종교의 김교헌 등 지도부도 중국으로 교단을 옮겼다. 주시경은 망명을 결심하고 신변 정리에 나섰다. 망명지는 대종교 교단이 있는 만주 쪽이 아니었을까 추론된다.
 
그동안 열정을 바쳐온 조선어강습원에서 1912년 3월 중등과 1회에 이규영ㆍ이병기ㆍ권덕규ㆍ박승두ㆍ신명균ㆍ최현배ㆍ윤복영ㆍ송창희 등 125명을 수업시켜서 1913년 3월, 최현배ㆍ신명균ㆍ이병기ㆍ윤복영ㆍ김두봉 등 33명이 졸업하였다.

주시경은 망명을 준비하면서도 조선어강습원은 계속 운영하여 1914년 3월의 제2회 졸업식에서 21명을 배출하고 39명을 새로 입학시켰으며, 4월에 『말의 소리』를 신문관에서 간행하였다. 그리고 조선어강습원을 순우리말 '한글배곧' 으로 개칭하고, 7월에 하기강습소를 경남 동래에 개설하여 강사로 최현배, 동래군 범어사 내에 사립정명학교를 개설하여 권덕규를 각각 강사로 보내어 한글교육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러던 중 1914년 7월 27일 금요일 상오 6시, 서울 수창동 150번지 자택에서 주시경은 허로중(虛勞症)이라는 병명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39살,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은 나이이고,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죽음이었다. 그동안의 과로와 영양실조와 여기에 국치라는 정신적 타격이 겹친 사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 쉽게 눈을 감을 줄 누가 알았을까.

이 무렵을 전후해서, 선생의 동지들은 왜정이 꾸미어 낸 데라우찌 총독 암살 음모라는 소위 '105인 사건'으로 거의 옥에 갇혔거나, 왜정의 탄압을 피해 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하여 외국으로 망명하였기 때문에, 서로 뜻을 나눌 만한 동지가 없었으므로 선생도 해외 망명하기로 결심한다.

학생들의 하기 휴가 때를 이용해서 선생은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와 친척에게 망명의 길을 떠난다고 하직 인사를 하고 서울로 돌아와서 망명의 길에 오를 준비를 하던 중, 뜻밖에 급성 체증에 걸리어 수창동 자택에서 급작스레 숨을 거두고 마니 때는 7월 27일 오전 6시, 선생의 나이는 이제 겨우 서른아홉이다. (주석 3)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의 세종대왕기념관에서 찍은 주시경 묘비.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의 세종대왕기념관에서 찍은 주시경 묘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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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록에는 선생의 사인을 '허로증'이라 하고 다른 기록에는 '체증'이라 했다. 둘 다 의문이 따른다. 일제로서는 어느 민족주의자나 독립운동가 못지않게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두려운 인물이었다. 지하 비밀 단체는 자신들이 만든 법령에 따라 처벌하거나 규제하면 끝이지만 '먼 장래'에 대비하여 한글을 가르치고 민족혼을 불어넣은 인물에는 당장 대처할 방법이 따로 없었다.

한민족의 정체성이기도 하는 한글 연구에 모든 것을 걸고 우수한 청년들을 모아 가르치고, 이제 망명 준비까지 하고 있는 것이 총독부의 촉수에 걸렸을 터이고, 그래서 약물이나 다른 극단의 방법을 동원했던 것이 아닌 지 의문이 남는다. '허로증'이나 '체증'이 갑자기 죽는 병이 아니기 때문에 생기는 의문이다.


주석
2> 신구현, 「주시경 선생의 생애와 업적」, 『조선어연구』 제1권 제4호, 평양, 1949, 『주시경 학보』 제6집, 250~251쪽.
3> 『나라사랑』 제4집, 27~28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한글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선생‘]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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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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