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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회관 앞의 주시경 선생 흉상 한글회관 앞의 주시경 선생 흉상
▲ 한글회관 앞의 주시경 선생 흉상 한글회관 앞의 주시경 선생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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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이 보성중학교에 '조선어 강습원'을 열고 장안의 청년들을 불러모아 한글을 가르치고 있을 때 일제는 조선의 영구한 식민지배를 노리고 지배체제를 강화시켜 나갔다. 조선인이 옴짝달싹하지 못하도록 법제를 만들었다.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1911년 6월, 사찰령 공포, 주지 취임을 허가제로 하여 불교를 총독부 통제하에 둠.
          6월, 산림령 공포, 조선인 산림 소유권 제한, 일본인의 산림 소유권 인정.
          8월, 조선교육령 공포, 일왕에 충성하기 위한 신민양성과 일본어 보급 목적.
         10월, 사립학교 규칙 공포, 사립학교 설립ㆍ교사 채용ㆍ교과목ㆍ교과서 총독 허가.

1912년 3월, 조선민사령ㆍ형사령ㆍ감옥령ㆍ태형령 공포.
          8월, 토지조사령과 시행규칙공포, 총독부 조선 토지조사 시작.

일제는 이와 함께 1911년 1월, 이른바 신민회사건을 날조하여 민족주의 계열 인사와 기독교인 600여 명을 검거했다.

투옥자 대부분이 사상전향을 강요받았으며 지독한 고문으로 2명이 목숨을 잃었고 다수가 불구자가 되었다. 결국 1912년 5월 그중에 122명이 기소되었으며, 9월에 105명이 각각 징역 5~10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를 <105인 사건>이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105인 모두가 고등법원에 항소하여 양기탁ㆍ이승훈ㆍ윤치호 등 6명을 제외한 99명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로써 총독암살 미수사건은 조작된 것임이 입증되었다. 일제는 민족운동의 뿌리를 뽑고자 사건을 날조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신민회가 해체되고 국내의 민족운동도 큰 타격을 받았다. 주시경은 지인들의 고난을 지켜보며 망명을 결심하게 되었다.
  
 1933년 신명균이 간행한 <주시경선생유고>.
 1933년 신명균이 간행한 <주시경선생유고>.
ⓒ 윤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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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의 제자로서 조선어강습원 제1회 졸업생인 신명균이 1938년 「나의 스승을 말함」의 신문 인터뷰에서, 이 시기의 스승에 대한 회상을 밝혔다. 주요 부분을 발췌한다.

"선생이 주시경 선생의 직계 제자라시던데요?" 하고 기자가 말을 꺼내니, 신씨는 귀가 번쩍 뜨이시는 모양이다.

"선생의 학설을 이어받은 제자는 못됩니다만, 선생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고 있은 것은 아마 나일까 합니다."

"주 선생을 아신 것은 어느 때부터였습니까?"
"내가 한 이십 되었을 때니까, 주 선생이 삼십오세 때인가 합니다. 그때 선생이 전 보성학교 자리에 조선어학원이란 것을 개교하고 거기서 교수를 하고 계셨습니다. 나도 그때 그 학생의 한 사람이었지요."
 
 
금시집에 실린 외솔 최현배 선생의 친필 글씨(외솔회 소장) 주시경 선생의 제자로 상동교회 내 조선어강습원 1기 졸업생인 최현배 선생은 1914년 경성고보 4학년 재학 당시 여름방학을 맞아 부산 동래에까지 내려가 한글강습회를 여는 등 한글보급운동을 펼쳤다. <잘 다녀오라>고 격려해 준 스승 주시경은 그해 7월 급체로 38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다.(박용규 박사 제공)
▲ 금시집에 실린 외솔 최현배 선생의 친필 글씨(외솔회 소장) 주시경 선생의 제자로 상동교회 내 조선어강습원 1기 졸업생인 최현배 선생은 1914년 경성고보 4학년 재학 당시 여름방학을 맞아 부산 동래에까지 내려가 한글강습회를 여는 등 한글보급운동을 펼쳤다. <잘 다녀오라>고 격려해 준 스승 주시경은 그해 7월 급체로 38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다.(박용규 박사 제공)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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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또 누가 계셨던가요?"
"최현배 씨, 권덕규 씨, 김두봉 씨, 장지영 씨, 아니 장지영 씨는 아니군."

"박승빈 씨는 안 계셨던가요?"
"박승빈 씨는 안 계셨습니다."

"그러면, 주시경 씨와 박승빈 씨와는 학설에 관한 토론이 그전부터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주 선생이 생존하실 때는 박승빈 씨가 우리 말에 관한 연구를 하신다는 것도 몰랐으니까요. 지금 와서 박승빈 씨 설이 나왔다는 것도 주 선생은 모르실 것입니다."

"주시경 씨는 어느 분의 학설을…."
"아니지, 주 선생이야 자기가 혼자서 연구에 착수하셨지요. 지금은 다들 한글이나 우리 말이니 하지마는, 그때만 해도 우리 말을 연구한다면 특수한 사람으로 들릴 땝니다. 선생이 처음 이희종이란 어른께 한문을 배우다가 해석을 조선말로 하는 것을 들으시고, 그러면 결국 글이란 말의 기록인데 우리 말을 두고 이렇게 어려운 한자를 배울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연구에 착수하셨다니까요."

"주 선생의 성격은?"
"그저 강직했지요. 청렴하기 그지없었고, 일평생 술과 담배를 입에 안 대신 어른이십니다.   뭣이요? 아니지. 그러시면서도 일체의 살림을 혼자 도맡아 하시었지요. 한번 수창동으로 이사를 하셨는데 가보니까 몸소 기둥을 닦고 도배를 하고 마루를 훔치고 하십니다."

"주 선생에 관한 일화로 혹 지금도 생각나시는 것은 없으십니까?"
"글쎄…일화… 아, 한번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누가 작고하셨던 지는 잘 기억이 안 되나 선생이 상주가 되셨을 적에 우리가 문상을 갔더니, 조그만 종이쪽을 내보이십니다. 조선에서는 '상사말씀 무슨 말씀 하오리까'라고 하면 상주는 입속으로 어물어물할 것이 예인데, 선생은 '아버지를 여윈 내가 무엇이라 하리까'든가 하여튼 이런 것을 아주 씨 가지고 계십디다."

"식성은 어떠셨던가요?"
"원래 청렴한 분이라 생활도 검박해서 별로 어떤 것을 좋아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중국요리를 잘 잡수신 것만은 기억됩니다."

"주 선생이 언제 작고하셨던가요?"
"벌써 이십여 년이나 되지요. 천재란 단명한가 봅니다. 삼십구세에 돌아가셨으니까."

"난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말에 관한 의문이 생기면 선생이 조금만 더 사셨더라면…하고, 그런다면 지금 와서 새삼스러이…."

신씨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내가 선생은 아끼는 마음은 사제간의 정의(情誼)도 정의려니와, 우리를 선생의 완전한 계승자로 만들어 놓지 못하고 돌아가신 게 원통합니다. 선생의 그 무서운 정력(사실 주시경 선생은 천재라기보다는 정력가시지요. 그 정력이란 무서웠으니까) 만이라도 우리가 나누어 가졌어야 할 텐데…."

신씨는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씨의 얼굴에는 그 '무서운 정력'이 그대로 나타나 보였다. (주석 1)


주석
1> 『동아일보』 1938년 1월 28일자, 최철호, 「주시경에 관한 신명균의 글 역자」, 『주시경 학보』 제3집, 264~26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한글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선생‘]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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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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