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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미디어 시대라지만 TV 프로그램의 힘에 놀랄 때가 있다. 4일 방송된 JTBC <차이나는 클라스> 김누리 교수의 '새로운 나라를 만든 독일의 교육' 편이 그랬다. 평균 시청률이 4%. 2020년 그 방송 최고 시청률 기록이다. 분당 최고 시청률은 5.7%였다(닐슨코리아 조사 결과).

후폭풍도 컸다. SNS, 블로그, 맘카페 등에서 그 강의에 대한 영상짤과 감상평들이 확산되고 '김누리 교수'가 각종 포털의 실검 1위에 오르는가 하면 특히 학부모들, 교사들 사이에서 입소문도 돌았다. 해당 프로 자체를 알지 못했던 나까지 유료 결제해 다시보기를 하게 할 정도였다. 시청 소감은, '이 분은 꼭 만나야 해!'.

"한국의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반(反)교육이다"라거나 "대학입시를 폐지해야 한다", "교육혁명이 사회혁명을 이끌 수 있다" 라니. TV방송에서 이렇게까지 과감하게 교육에 대해 말하는 이는 본 적이 없었다. 궁금했다. 그는 대체 왜 이렇게도 용감(?)하게 교육에 대해 강한 주장들을 펴는 것인지, 그의 주장의 끝은 어디를 향하고 있으며 그 지향점이 과연 실현가능한 것인지 등이.

그래서 지난 6일 중앙대학교 김 교수의 연구실에서 직접 만나 관련한 얘기들을 나눠보았다. 다음은 김 교수와의 1문1답이다. 
 
4일 방송된 JTBC <차이나는 클라스> ‘새로운 나라를 만든 독일의 교육’ 편에서 김누리 교수는, 독일교육엔 없고 우리교육엔 있는 경쟁교육을 강하게 비판했다. 또 나아가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한 경쟁 문화에 대해서도 이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이지 그것이 정의라거나 반드시 필요한 무엇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4일 방송된 JTBC <차이나는 클라스> ‘새로운 나라를 만든 독일의 교육’ 편에서 김누리 교수는, 독일교육엔 없고 우리교육엔 있는 경쟁교육을 강하게 비판했다. 또 나아가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한 경쟁 문화에 대해서도 이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이지 그것이 정의라거나 반드시 필요한 무엇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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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우리 교육의 현주소를 진단하면?

대한민국이 1919년 임시정부에서 시작됐다고 할 때 올해는 새로운 100년이 시작되는 해다. 지난 100년간 우리 교육은 어떤 교육이었나. 내가 보기에 그것은 교육이 아니다. 오히려 '반(反)교육'에 가깝다.

우리 교육의 목적은 약 30년간 '황국 신민 양성', 그 후 40년간의 민간독재‧군사독재 하에선 '반공투사 내지 산업역군의 양성'이었다. 그리고 민주정부가 들어선 30년간 우리가 키우고자 한 것은 '인적 자원'이었다. 민주정부에서조차도 존엄한 인간, 성숙한 민주주의자를 키우는 교육을 한 적이 없다. 한국 교육은 단 한 번도 '인간'을 키우는 교육을 해본 적이 없는 거다.

대단히 역설적인 상황이다. 우리처럼 교육에 관심 많은 국민도 없는데 실제 우리가 한 것은 반(反)교육이었다니 이런 역설이 어디 있나. 향후 새로운 100년은 새로운 교육을 만드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새로운 교육의 방향은 분명하다. 지금까지가 반(反)교육이었으니 이제부터는 진정한 교육을 해야 한다. 존엄한 인간, 성숙한 민주주의자를 기르는 교육을 해야 한다.

87년 이후의 민주정부에서조차 진정한 교육이 없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모든 교육개혁 논의는 입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만 집중되어 왔다. 입시정책이 교육정책일 수는 없는데 말이다. 그러다 보니 강한 자아를 가지고 스스로를 존귀한 존재로 여기며 타인을 존중‧배려하고, 불의에 맞설 용기를 가진 이들을 보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사회를 요즘 젊은이들이 말하는 '헬조선'으로 만들어온 듯하다. 근본적으로 교육을 바꿔야 한다. 이제 그럴 때가 됐다.

- 방송 등에서 우리 교육의 문제와 함께 독일 교육 얘기를 많이 했다. 이에 대해 속된말로 '독일뽕 맞았다'며 독일교육은 무조건 좋고 우리교육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냐는 비아냥거림도 있는데?

독일헌법 제1조엔 '인간존엄은 불가침하다'고 쓰여 있다. 독일교육은 그에 굉장히 충실하려 노력하고 실제 그것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당연히 독일교육이 유토피아는 아니다. 다만 독일교육과 우리교육을 비교해보면, 우리와 원칙 자체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영감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은 분명하다. 지난 방송에서 독일이 우리의 '일그러진 거울'이 될 수 있다고 한 것도 바로 이런 취지에서다.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김 교수는, 독일 교육에 우리 교육을 비춰보면 지금까지 우리가 당연시해온 경쟁교육 등을 낯설게 볼 수 있다며 독일이 우리에게 '일그러진 거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 기자주)

독일교육이 가장 이상적인 모델은 아니래도 한국교육에 가장 대비되는 교육임은 분명하다. 독일은 극단적으로 경쟁시키지 않으려는 교육이고, 한국은 극단적으로 경쟁시키는 교육이기 때문이다. 경쟁교육이란 측면에서 한국교육과 가장 대비되는 교육이 독일교육이다.

독일교육이 경쟁교육을 지양하는 이유는 특히 히틀러의 파시즘 경험 때문이다. 경쟁교육은 우열을 나누는 교육이며, 우등한 자가 열등한 자를 지배하는 것이 정의라는 논리는 기본적으로 파시즘의 논리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육을 지배하는 것이 그런 경쟁교육, 즉 우열을 나누는 교육, 교육의 내용보다 평가를 더 중시하고 본질로 보는 완전히 전도된 교육이다.

특히 경쟁교육은 거의 한계에 이르렀다고 본다. 아이들이 너무도 경쟁교육에 치이고 있다. 과연 이런 교육을 받고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을까, 이들이 성장하여 정상적인 인격을 가진 인간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것들이 염려스러운 수준까지 와 있다. 그런 것들을 개선하는데 가장 반대되는 모습으로 독일교육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 독일에선 너무 어린 나이에 직업학교를 택하는 등의 문제가 있다는데?

지금 한 말들에 답이 들어 있다. 독일교육은 상식적이라고 하지 않았나. 너무 이른 시기에 대학을 갈지 직업세계로 들어갈지를 결정하는 것이 문제라고 볼 수도 있지만, 독일의 가장 중요한 대원칙은 '그 구성원에게 최대로 많은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한국이 '원샷사회'라면 독일은 '텐샷사회'다. 어떤 결정을 하면 그걸로 무조건 가야 하는 게 아니다. 이쪽으로 가다가 저쪽으로 넘어가야지 싶으면 저쪽의 길이 열려 있다.

이른 시기에 직업학교에 간 뒤 그 길 외엔 길이 없다고 한다면 그건 잘못된 사회다. 하지만 독일에선 직업학교에 다니다가 김나지움(대학진학이 목표인 인문계학교) 가는 게 좋겠네 그러면 다시 이쪽으로 넘어올 수 있다. 그런 길들이 계속 열려 있다. 우리는 지금 다 닫혀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 길로만(대학 내지 명문대학 진학의 길로만)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잘못이다. 하지만 독일은 계속 문을 닫는 사회가 아니다. 이는 매우 상식적이다.

- 경쟁 없는 교육은 하향평준화를 야기할 것이란 우려도 있는데?

두 가지 측면으로 살펴봐야 한다. 첫째로, 하향평준화라고 할 때 '무엇이 하향되는가' 하는 내용 측면이다. 교육이란 것이 사유하는 인간, 성숙한 민주주의자를 기르는 것이라면 독일교육이야말로 이를 제대로 하고 있다. (우리교육처럼) 교육이 그저 언제 사용할지도 모를 많은 지식을 축적한 아이를 기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지만.

처음 독일에 (유학을) 갔을 때 놀랐다. 내가 굉장한 천재거나 독일 아이들이 굉장히 떨어진다고 조금은 오만하게 생각했다. 나는 수업시간에 '단테' 하면 바로 자동적으로 '신곡'이 떠올랐는데 독일 아이들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단테를 처음 들었단 아이들도 꽤 많았다. 나는 어떤 작가가 나오면 대표작 등의 정보를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내 생각이 잘못됐음을 깨닫게 됐다.

나는 '단테' 하면 아는 게 '신곡'이 전부였던 거다. 그것도 제목만 알았다.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독일 아이들이 '내가 저걸 안다'고 했을 땐 정말 아는 거였다. 그 작품을 다 읽어보고, 작가의 삶에 대해서도 다 살펴보고, 심지어 그 작품이 자신의 삶을 상당 부분 바꿔놓았거나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쳤을 때 비로소 '알았다'고 표현했다. 독일 아이들이 뭘 안다며 말할 때는 상당히 긴 시간동안 자기 나름의 호흡으로 해석된 얘기들을 하는 거였다. 과연 내가 단테를 안다고 했을 때 할 수 있는 얘기가 뭔가. 단테가 과연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나는 그런 것이 없었다.

독일 아이들의 교육은 기본적으로 책을 읽는 교육이다. 모든 지식을 섭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관심 있는 영역의 책들을 천천히 깊게 읽고 사유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독일의 교육이다. 특히 자기 관심 분야에 대해서는, 얘기를 나눠보면, 거의 전문가 수준이다. 이런 것이 한국에선 불가능하다. 우리는 경쟁체제 속에서 살아남아 우수하다고 평가받기 위해 온갖 지식들을 낮은 수준에서 다 알아야 한다. 한국에서는 깊이 사유하고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을 펼치는 학생들을 본 일이 거의 없다.

둘째, 독일의 학문 수준을 보자. 68혁명 이후, 그러니까 경쟁시키지 않고 비판적 사유를 강조하는 교육을 시작한 이후 독일의 소위 학력이 떨어졌을까? 노벨상으로 판단할 때 전혀 그렇지 않다. 20세기에 학문분야의 노벨상을 수상한 이들이 100~120명 정도였는데 그 수는 68혁명 전후로 차이가 없다. 이와 같이 그것(경쟁없는 교육)이 학문수준을 낮췄단 증거는 전혀 없다.

(김 교수는 방송 <차이나는 클라스>와 저서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에서 나라별 국제공인학력평가인 PISA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독일의 PISA 점수는 2018년 20위 정도였는데 이에 대해 독일은 '답 찾기'가 교육의 중심이 아니기에 그 점수가 다소 낮은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면서 그런 척도로 독일교육의 수준이 낮다고 보면 안 된다고 설명한다.)

- 교육에서 경쟁이 아예 없을 수는 없지 않은가? 경쟁은 불가피한 무엇이 아닐까?

경쟁은 불가피한 것이 아닌가. 인간 본성에 맞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어느 시기에나 있는 것이고 또 경쟁이 있어야 더 생산적이고 효율적으로 조직이 굴러가는 것 아닌가. 이런 문제에는 다소 철학적인 논쟁이 필요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경쟁이 중요한 사회적 원리로 작동하고 지배적인 원리로 확산된 것은 자본주의 이후다. 중세시대엔 경쟁이 아닌 협력이 더 중요한 사회적 가치였고 길드 조직 내에선 경쟁을 하면 사형에 처했다. 경쟁은 중범죄였다. 불가피하거나 인간본성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또 우리 사회에 보편적인 '경쟁은 필요하고 생산적이라는 관념'을 나는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라고 본다. 역사의 특정시기에 특정의 사회조직이 필요로 하는 특수한 관념, 즉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모든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라는 점이다. 이건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학자들에게 있어선 가장 기본적인 전제다. 그런데 한국사회엔 그런 인식이 거의 없다. 경쟁 이데올로기에 대해 상대화시키는 관점, 비판적 관점, 회의하는 관점이 거의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놀라운 일이다.

일정 정도 경쟁이 필요할 수는 있으나 한국사회에서의 경쟁 이데올로기는 너무 절대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모든 이들을 지배하며 착취사회, 심지어 자기착취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쓰이고 있다. 이제 그만해야 한다. 그리고 이 논리에 의해 아이들의 삶 자체가 교육 과정에서 너무나 피폐해지고 있기 때문에 경쟁교육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대도 적어도 경쟁교육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교육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

경쟁을 마치 정의의 유일한 관점인 것처럼 보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경쟁 외에도 다양한 사회적 가치들이 하나의 사회적 정의를 이루며 같이 작동해야 한다. 우리처럼 오로지 경쟁을 통해 승패를 나누는 것이 정의의 유일한 기준인 것처럼 여겨지는 사회는 '야만사회(아도르노)'다.
 
지난 6일 중앙대에서 있은 김누리 교수와의 인터뷰 모습. 김교수는 "우리교육은 반교육"이라고 강하게 비판하며 그에 대비되는 독일교육의 면면을 소개하였다.
 지난 6일 중앙대에서 있은 김누리 교수와의 인터뷰 모습. 김교수는 "우리교육은 반교육"이라고 강하게 비판하며 그에 대비되는 독일교육의 면면을 소개하였다.
ⓒ 박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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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사회가 '경쟁은 생산적'이란 이데올로기에 갇힌 데엔 방송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비판교육의 부재'와도 관련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 우리는 학교를 다닐 때부터 선생님의 말을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자기의 의견을 제시해야한다는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에 비해 독일의 비판교육은 정말 특이한 교육이다. 어느 나라에도 없다. 기본원리를 비판하라는 것은 본래 교육학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 교육학에선 한 개인을 사회 속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 즉 사회화를 교육이라고 본다. 그 사회의 가치, 도덕 등을 잘 익혀서 적응하도록 하는 게 교육의 목적이라고 보는 거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그것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그 사회 안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라고 본다. 전세계에서 적응교육이라는 사회화 교육보다 비판 교육을 더 중시하는 나라는 아마도 독일이 유일할 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독일 교육이 기본적으로 아우슈비츠라고 하는 독일이 저지른 너무나 끔찍한 역사적 비극과 관련이 있어서다. 인간성의 밑바닥이 어디인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라고 하기까지 했다. 그 정도의 경험을 했기에 독일 교육에선 '아이들이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인간이 되는 것'을 가장 중시하게 되었다.

나는 그 부분이 부럽다. 아이들을 '사유하는 인간',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인간'으로 키우는 것이 부럽다. 한나 아렌트의 '무사유는 범죄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도 유대인 사상가였고 그와 같은 지식인들에겐 아우슈비츠가 모든 사유의 원천이었다. 다시 말하면 아우슈비츠를 만든 것은 사실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유가 없어서다. '무지는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무사유는 용서할 수 없다. 그것은 의미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정신이 독일교육에 배어있다.

독일에서 많은 청년들을 만났는데 그들 안에 공통적으로 배어있는 무언가가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사유하는 인간'이었다. 또 그 사유는 상당부분 '비판적 사유'였다. 그게 현 독일의 힘이고 독일정치의 힘이며 내 식으로 말하면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이 난민이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던 상황에서) 2015년 독일이 100만 명의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이게 한 힘이다. 어느 나라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난민을 받아들인 앙겔라 메르켈을 시민들이 2년 후에 총리로 다시 뽑는 그런 과정은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그 배후에 비판교육이 있는 거다.

우리에겐 '비판적 사유의 교육'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아이들을 평가하는 방식부터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5지선다로 정답을 고르는 것 또는 단순한 단답형문제를 내서 'a=b'라는 식의 지식을 가르치는 것 이것이 우리교육의 평가 방식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퀴즈 프로다. 퀴즈 프로가 너무 많다. 우리도 모르게 단순 지식들을 외우는 방식을 기본적인 학습의 방식으로 습관적으로 내면화하고 있다. 정말 잘못된 것이다. 그런 방식이 파쇼 교육의 기본 원형이다. a가 어떻게 b만 될 수 있나. 또 그런 지식은 사실은 별로 가치가 없는 지식이다. 그런 것을 왜 외우고 있어야 하나. 컴퓨터가 다 축적하고 있는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a=b'라고 하는 그 주장 뒤에 작동하고 있는 권력의 움직임이다. 그 권력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통찰력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교육에선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그 배후에서 또다시 경쟁의 논리가 작동한다. 공정한 경쟁, 공정한 평가란 이름으로, 공정성을 가장 잘 담보하는 방법이라며 무미건조한 단순지식들을 얼마나 잘 암기했는지를 평가하려 한다. 이런 방법은, 교육의 내용 자체를 그야말로 공동화시키고 빈곤하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사유할 수 있는 일체의 공간을 빼앗기게 된다. 사유가 없는 단순한 지식쪼가리들을 머릿속에 많이 저장하고 있는 이들이 이상적인 학생으로 평가받는 것은 100% '반(反)교육'이다.

- 퀴즈 프로를 말했는데, 우리나라에선 퀴즈프로도 그렇지만 슈스케, 프로듀스101 같이 다수의 후보들 중 소수를 선발하는 과정을 그리는 프로들도 굉장히 인기다. 이런 프로들이 독일엔 없는지?

(독일에서) 상업방송에선 일부 있을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공영방송에서 본 적은 없다. 우리나라는 온 천지가 경쟁이다. 학교에서만 경쟁하는 게 아니다. 노래만 불러도 점수가 나온다. '슈스케'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경쟁시키는 방송 같은데, 이처럼 우리 사회에선 기본적으로 경쟁을 통해서 무언가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경쟁을 통해 정의가 구현될 뿐 아니라 경쟁을 통해야 인생이 긴장도 되고 재미있다고 여긴다. 경쟁이 한국사회를 작동시키는 기본원리인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런데 나는 누굴 뽑는 그런 프로를 거의 본 적이 없지만 한두 번 봤을 때 굉장히 불쾌했다. 심사위원의 절대적 우월감을 표현하는 오만한 태도. 심사를 받는 자가 보이는 너무도 굴종적인 모습. 그것은 한국사회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축약도였다.

'무릎 꿇는 사회'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일이 있다. 영화 카트에서, 드라마 송곳에서, 그리고 대한항공 회항 사건 당시 박창진이 조현아에게. 온 천지에서 무릎을 꿇었지 않나.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자신의 자아를 완전히 굴복시키는 것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우리 사회에 인간의 자존감‧존엄성에 대한 인식이 너무나 부족하다.

모든 경쟁은 그 결정자가 가지는 절대적 권력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경쟁을 절대적인 이데올로기로 삼'고 '그 경쟁을 활용하여 절대적인 권력이 작동'하는 그런 사회다. 여기서 중요한 건 '절대적'이라는 점이다. '상대적'이 아니다. 완벽하게 인간을 장악하고 지배하는 그런 권력이다. 그것은 민주주의라고 하는 합의된 우리 사회의 기본질서와 맞지 않는다. 나는 우리나라가 정치민주화는 조금 이뤘으나 사회민주화‧경제민주화‧문화민주화를 아직 이루지 못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그것과 연결된다.
 
영화 <더 리더(The reader)>에서 나치의 일원이었던 여주인공 한나가 전범재판에서 반성은커녕 “시키는 대로 한 것인데 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것이냐”고 소리치는 장면. 김누리 교수와의 대화를 참고하면, 그녀는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나치의 비인도적인 명령에 복종하는 삶을 살고 그것이 잘못인지조차 몰랐던 것이 아닐까? 무서운 것은 어쩌면 우리교육이 지금 이 순간에도 한나들을 양성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사진은 영화에서 한나가 전범재판을 받는 장면.
 영화 <더 리더(The reader)>에서 나치의 일원이었던 여주인공 한나가 전범재판에서 반성은커녕 “시키는 대로 한 것인데 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것이냐”고 소리치는 장면. 김누리 교수와의 대화를 참고하면, 그녀는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나치의 비인도적인 명령에 복종하는 삶을 살고 그것이 잘못인지조차 몰랐던 것이 아닐까? 무서운 것은 어쩌면 우리교육이 지금 이 순간에도 한나들을 양성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사진은 영화에서 한나가 전범재판을 받는 장면.
ⓒ 와인스타인 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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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리더(The reader)>에서 나치의 일원이었던 여주인공은 전범재판에서 반성은커녕 "시키는 대로 한 것인데 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것이냐"고 소리친다. 어린 시절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는 세월이 흘러 재판정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고서야 그녀가 '문맹'임을 알게 된다. 남자는 그녀에게 글을 깨칠 수 있는 책들을 보내준다. 그리고 이로써 글을 읽히고 교도소 도서관의 책들을 읽게된 후, 여주인공은 죽음 직전 피해자 가족들에게 참회의 글을 담은 유서를 남긴다.

유대인들에게, 인류에게 그녀는 악마였다. 하지만 그녀는 '몰라서' 그랬던 거다. 인간이 인간에게 하면 안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의가 무엇인지를 '문맹'인 그녀로서는 도저히 알지 못해서....

김 교수와의 인터뷰 중 오래 전 본 영화가 생각난 것은, 사유하는 인간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주입되는 많은 지식들을 무비판적으로 잘 저장하는 인간을 길러내는 우리 교육이 '비판적 사유의 문맹'을 방치해오고 있단 생각이 들어서다.

양승태, 우병우 등은 우리 사회의 손꼽히는 엘리트들이다. 그들은 누구보다 주입식 교육과 경쟁 교육에 최적화되었기에 최고의 명문대학을 거치고 최고의 시험이라는 사법시험도 높은 점수로 패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둘러싼 교육은 사유하는 능력, 비판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을 말살하는 교육이었는지 모른다.

그들의 시험 특화적 지적능력이 어떠하든 그들은 위 영화의 여주인공과 같이 '비판적 사유의 문맹'이었던 듯 하다. 그들은 인간이 인간에게, 법조인이 사건과 재판을 통해 하면 안 되는 일이 무엇인지를 비판적으로 사유한 일이 없었기에 민주사회에 정면으로 반하는 일들을 벌인 듯도 하다.

무서운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층층이 서열화된 대학과 서열화된 사회 체제 하에서, 그러니까 슈스케 사회이고 배틀로얄 학교인 치열한 경쟁 사회와 교육 속에서, 우리 아이들이 고통받는 동시에 비뚤어진 엘리트로, 또 그 비뚤어진 엘리트를 존경할 준비가 된 시민으로 자라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김교수의 말대로 전혀 교육적이지 않고 오히려 교육에 정면으로 반하는 지금 우리의 반(反)교육과 결별하고 진정한 인간, 진정한 민주시민을 기르는 교육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다음 기사에서 김교수와의 인터뷰를 계속 소개해 본다.

(다음 기사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 김누리 교수님 인터뷰 1
ⓒ 박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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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김누리 교수, #교육혁명, #4.15총선, #대학입시 폐지, #차이나는 클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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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사회과 교사였고, 로스쿨생이었으며, 현재 [법률사무소 이유] 변호사입니다. 무엇보다 초등학생 남매둥이의 '엄마'입니다. 모든 이들의 교육받을 권리, 행복할 권리를 위한 '교육혁명'을 꿈꿉니다. 그것을 위해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글을 씁니다. (제보는 쪽지나 yoolawfi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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