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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 선생 주시경 선생
▲ 주시경 선생 주시경 선생
ⓒ 한글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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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남산골 딸깍발이였다.

딸깍발이란 신이 없어서 마른 날에도 나막신을 신는다는 뜻으로 가난한 선비를 가르키는 말이다. 일본 사람을 야유하여 일컫기도 하는 '쪽발이'와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지만 원형은 조선의 가난한 선비를 가르키는 말이었다.

주시경의 제자로서 한글학회 사건으로 곤역을 치르기도 했던 한글학자 이희승의 글에 「딸깍발이」가 있다. 한 대목이다.

겨울이 오니 땔나무가 있을 리 만무하다. 동지설상 삼척냉동에 변변 ㅎ지도 못한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으니 사뭇 뼈가 지려 올라오고, 다리 팔 마디에서 오도독 소리가 나도록 온 몸이 곧아 오는 판에, 사지(四肢)를 웅크릴 대로 웅크리고 안간힘을 꽁꽁 쓰면서 이를 악물다 못해 박박 갈면서 하는 말이, "요놈, 요 괘씸한 추위란 놈 같으니, 네가 지금은 이렇게 기승을 부리지마는, 어디 내년 봄에 두고 보자."라고 벼르더란 이야기가 전하지마는,

이것이 옛날 남산골 '딸깍발이'의 성격을 단적으로 가장 잘 표현한 이야기다. 사실로 졌지마는 마음으로 안 졌다는 앙큼한 자부심, 꼬장꼬장한 고지식, 양반은 얼어죽어도 겻불은 안 쬔다는 지조, 이 몇 가지가 그들의 생활시조였다. (주석 3)

 
1945년 11월 조선어학회 재건때의 모습 (앞줄 왼쪽 첫 번째가 이윤재의 사위 김병제, 네 번째가 조선어학회 간사장인 이극로, 다섯번째가 이희승, 여섯번째가 정인승)
▲ 1945년 11월 조선어학회 재건때의 모습 (앞줄 왼쪽 첫 번째가 이윤재의 사위 김병제, 네 번째가 조선어학회 간사장인 이극로, 다섯번째가 이희승, 여섯번째가 정인승)
ⓒ 조선어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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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선비'는 바로 주시경과 같은 사람을 말한다. 조선왕조에서 출생하고 대한제국에서 살다가 본의와는 상관없이 일제식민지의 신민이 된 불우한 지식인, 그것도 한글운동에 모든 것을 건 외곬 선비의 생활은 궁핍하기 그지없었다. 여러 곳에서 강의를 하였으나 대부분 무료여서 수입이 거의 없었다.

원체 가난한 살림이라 언제나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셨다. 그것도 지금같이, 예쁘장하고 간편한 도시락이 아니라 노끈으로 꼬아서 엮은 노끈 망태기에다가 밥 담긴 놋주발을 주발 채 넣고 그 위에 반찬그릇, 그리고 그 옆에 숟갈과 놋젓갈을 꽂아서는 한 손에 들고 했으니 아무리 좋게 보아드리려 해도 멋진 모습이었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는 모양이시었다.

도시락이 든 노끈 망태기보다도 책을 싼 큰 책보퉁이가 커서, 그리고 언제나 꼭 들고 다니셨기에 언젠가 모르게 학생들 사이에 주보퉁이라는 별명이 생기고 말았다.
 그러나 선생은 전혀 탓하지 않으셨다. 검소하고 청빈한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시지 않으셨고, 그렇다고 자랑으로 생각하시지도 않으셨다. 한 말로 한글 연구에 몰두했었기 때문에 모든 일에 범연했던 것이다. (주석 4)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도 없고 그렇다고 재물을 모으는 수완도 없는 딸깍발이 선비의 살림살이는 말이 아니었다. 옛부터 궁함을 견디지 못해 지조를 판 선비가 많았고, 당시에도 그리하는 민족주의자도 적지 않았으며, 뒷날 학생운동ㆍ민주화운동 출신 중에서도 독재ㆍ부패정권으로 훼절한 자들도 많았다.

그 범연했던 태도를 증명해 주는 것이 선생이 사시던 상동의 집이었다. 말이 집이지, 글자 그대로의 오막살이 초가집 한 채인데, 그 집도 상동교회 뒤로 돌아가다 언덕 아래에 있는 집이라, 그리고 아주 앞뒤가 꽉 막힌 집이었기 때문에 낮에도 촛불을 켜야 책을 볼 수가 있었다.

그 좁고 어두운 방에서 촛불을 켜놓고 훈민정음이나 불경언해 같은 책을 일일이 붓으로 베껴서 쓰시는데, 그것도 백지로 맨 책이라 지금 만년필이나 볼펜으로 베끼는 것 같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가난하시어, 영양을 충분히 취하지도 못하는 데다가, 한 주일에 40여 시간이나 되는 강의를, 그것도 한 학교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저기 온 장안을 헤매다시피 찾아 다녀가며 하시는 일이라, 몹시 피곤하실 텐데, 그 위에 또 집에 돌아와서는 책을 새로 베끼고, 또 연구를 계속 하시고 했으니, 서른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가신 것도 까닭 없는 일은 아니라 해야 할 것이다. (주석 5)


주시경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숨을 거둔 것은 밝혀지지 않은 일제의 음모가 있었을 것 같지만, 빈한으로 인한 영양실조와 과도한 연구ㆍ강의로 겹친 과로도 원인이었을 것이다.


주석
3> 『일석 이희승 딸깍발이 선비』, 26~27쪽, 신구문화사, 1994.
4> 장지영, 앞의 책, 56쪽. 
5> 앞과 같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한글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선생‘]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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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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