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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것이 온 것일까. 지구적으로 퍼지고 있는 코로나19로 세상이 흉흉하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흉흉한 세상이었거늘. 반 백살을 살아보니 종종 '예측'이 들어맞을 때가 있다. 지금의 재앙은 어쩌면 잠재되어 있었던 것. 지구를 아끼지 않은 것에 대한 벌을 받고 있다는 마음으로 답답한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  

전염병이 창궐하니 문화생활뿐만 아니라 모든 행사와 대면이 중단됐다. 하지 말라고 하니 더 하고 싶은 사람의 심리는 내게도 예외가 아니다. 영화관에 가서 영화도 보고 싶고 도서관에 가서 책도 보고 싶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내게는 이럴 때를 위해 쓰라는 '찬스'가 있었다. 문화누리카드(문화소외계층에게 정부가 주는 바우처)가 그것이다.

자주 가는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니 한 권의 책이 시선을 끌었다. 박희정, 유해정, 이호연이 쓴, <나는 숨지 않는다>, 한겨레출판. "세상에 가려지기보다 세상을 바꾸기로 선택한 11명의 이야기"라니.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질렀다'.
 
<나는 숨지 않는다> 표지
 <나는 숨지 않는다> 표지
ⓒ 문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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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일곱 가지의 이야기 속에 열한 사람의 목소리가 실렸다. 한부모 여성, 장애 여성, 탈북 여성, 홈리스 여성, 주거권을 말하는 청소년, 조현병을 가진 정신장애인, 다섯 명의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겪었던 낙인, 차별, 편견, 배제, 혐오를 말한다.

바람 피운 남편과 헤어지고 홀로 아이를 키우지만 기죽지 않고 오히려 "보물 두 개(두 자녀)를 다 날줬다"며 고마워하는 유진은 "힘든 사람에게는 어설픈 말 한 마디 보다 따뜻한 밥 한 끼 사주고, 손 잡아 주는 게 최고"라 말한다.   

탈북여성 제시 킴은 북한 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국제 비정부단체에서 일하면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제시의 이야기를 기록한 박희정은 "상상력은 우리가 상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를 때 작동하지 않는다. 그때 작동하는 것은 두려움과 혐오다. 우리가 어떤 것을 궁금히 여기고 배우려고 할 때, 그때야말로 상상력이 작동하는 시점이다"라고 했다. 

태어나서 8개월 되었을 무렵 열병을 앓고 장애를 갖게 된 임경미는 "모든 기준이 비장애인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회에서는 건강검진 하나 받기도 힘들다"며 "병원에 가면 '고기 덩어리'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꼬박꼬박 문제제기 한다. 후배 장애여성들에게는 불편함을 물려주기 싫어서다.

70세 홈리스 김복자는 52살부터 수레를 끌고 박스를 모아 서울역 뒤쪽 고물상에 팔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수레를 끌며 생계를 이어간다. "누가 나를 흉보거나 말거나 내가 다리를 찔룩거리거나 상관없이 댕기잖아. 지금부터 앞으로 내가 살아갈 일은 살아봐야 알지"라면서 때론 숨고 싶었을지도 모를 삶의 서사를 온전히 드러낸다. 

청소년 시기에 어머니와 크게 싸우고 집을 나온 예원은 탈학교를 했다. 단기 쉼터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청소년 주거권을 고민하는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진심으로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변했다. 
 
"저를 호의적으로 대해주고 지켜봐주고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제 곁에 있는 경험이 별로 없었어요. 그 사람들이 제 곁에 있으니까 제가 이빨을 드러낼 필요가 없어졌어요. (중략) 주거가 안정되고 같이 사는 사람들이 나를 해치지 않는다고 느꼈을 때 수면 아래에 깔려 있던 말랑말랑한 감정이 새살 돋듯 나오기 시작했어요."

조현병을 앓고 있는 묘현은 병의 원인을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병을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지낸 이야기를 여과없이 쏟아냈다. 묘현의 이야기를 정리한 박희정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정신과를 방문해 검진을 받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와 시스템이 갖추어져야만 조현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줄어든다. (중략) 미친 사람들을 거리에 활보하게 두어도 사회가 무너지지 않는다. 문제는 정신장애가 아니라, 정신장애를 두렵게만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협소한 인식이 진짜 문제다. (중략) 회복은 잘 나아서 사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사회 안에서 사람들과 연결될 때에야 회복이 시작된다. 뇌는 결코 고립속에서 성장하지 않는다."

청소년 페미니스트 활동가 라원, 유경, 윤, 이황유진, 헤는 스쿨미투 활동을 하는 청소년들이다. 이들은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청페모)의 활동가다. 청페모는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추모집회 자유발언에 참여한 여성 청소년들이 소모임하듯 모여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 중 두 명은 또래관계에서 발생한 성폭력을 고발했다. 

"경청은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며 열심히 들어주는 게 아니다. 서로의 사이에 집을 짓기 위한 경청은 '응답'이어야 한다. 우리는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응답하고 있는가?"라며 기록자 이호연은 말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그녀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숨어 살지 않았으나 숨어 사는 사람처럼 대한 우리 사회의 편협함이 보여서 불편했다. 그럼에도 읽을수록 빨려드는 마력은 구술자의 목소리를 그대로 옮겨적은 기록자의 '정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점을 높이 사고 싶다. 

<나는 숨지 않는다>는 단순히 구술로만 엮은 책이 아니다. 그 어떤 전문가가 이슈를 분석하고 해법을 내놓은 것보다 리얼하고 설득력 있는 내용으로 꽉 차 있다. 근래에 보기 드문 문제의식을 담은 아픈 책이다.

여성학자 정희진이 "이 책의 주인공들은 한 번도 숨어 살지 않았다. 사회가 보지 않았을 뿐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예기치 않은 질병 앞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할 이때, 읽기 좋은 책이다.

나는 숨지 않는다 - 세상에 가려지기보다 세상을 바꾸기로 선택한 11명의 이야기

박희정, 유해정, 이호연, 인권기록센터 사이 (지은이), 한겨레출판(2020)


태그:#나는 숨지 않는다, #서평, #코로나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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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받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다. 인터뷰집,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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