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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산성은 신라가 한강 유역을 세력권 안에 두고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축조된 거점 성곽이다.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과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과의 경계를 이루는 호암산 정상에 북동-서남으로 길게 축조된, 둘레 1,547m, 면적 약 6만8689㎡의 석축산성으로 되어있다. 성 동쪽은 삼성산(460m)과 관악산(629m)의 높은 산으로 연결되어 있으나 서쪽으로는 북류하는 안양천을 따라 평지가 형성되어 있는 형태다.

한우물은 호암산 정상(해발 315m)에 위치해있으며 호암산성과 함께 국가사적 제343호 지정된 문화재다. 금천구청에서 제공한 호암산성 관련 자료에는 "호암산성의 남측에는 '고성터(古城基)', 북측에는 '한우물(漢井)'이 표기되어 있다. 고지도의 기록으로 보아 현재는 복개되어 지상에서 확인할 수 없는 수계가 호암산에서 발원하여 시흥계곡과 금천현 읍내를 거쳐 안양천으로 합류했던 것이 분명하게 확인된다"라고 적혀있다.

또한 이 지료에서는 "한우물로 표기된 우물은 (발굴)당시까지도 계속 존재했다는 것이 확인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성 내에 큰 연못(大池)이 있고, 날이 가물면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이 우물이 조선시대에는 금천현의 수원(水源)은 물론 민속신앙의 대상으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사료된다"고 덧붙이고 있다.
 
 한우물
 한우물
ⓒ 심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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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물터에서 발굴된 유물로 호암산성의 축조시기 등 많은 역사적 자료를 확보하였고, 한우물 축조시기가 7세기경이라는 점도 확인되었다. 1990년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제1우물(한우물)의 토층에서는 조선시대에 쌓은 석축이 남아 있었고, 그 아래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석축지(石築址)도 확인하였다. 또한 북송(北宋) 화폐인 희령원보(熙寧元寶)와 고려 청자편이 출토된 점으로 봐서 고려와 북송의 교역이 활발했던 것도 알 수가 있다.

한우물의 길이는 22m, 폭 12m의 작은 규모의 우물로 사방을 화강암으로 쌓았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선거이(宣居怡) 장군이 진을 치고서 행주산성 권율 장군과 함께 왜군을 상대로 싸우면서 이 우물을 군용수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문화재청 담당주무관인 김미성씨는 "산성 발굴과정에서 연못지 2곳과 ·건물지 4곳이 발견되었는데, 2개의 우물지 중 한 곳이 한우물이다. 한우물은 '하늘 못(天井)' 또는 '큰 우물' 이라는 뜻이며 호암산성 안에 있는 2기의 연못 가운데 하나다. 우물지반에서 많은 유물이 나왔는데 제2우물지에서는 청동숟가락이 나왔다"고 밝혔다.
 
 물이 맑고 푸르다(사진=CPN문화재TV심연홍기자)
 물이 맑고 푸르다(사진=CPN문화재TV심연홍기자)
ⓒ 심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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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숟가락에는 '잉벌내력지내미(仍伐內力只內未)'라는 글씨가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 현재의 금천구는 본래 고구려 잉벌노현(仍伐奴縣)이었다. 문헌 기록으로 보면, 금천구는 고구려의 잉벌노현이었는데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각각 명칭이 변경되었고 현재에 이르렀다. 금천구청 북쪽 독산동에서는 신라시대의 도로와 건물지 등을 포함한 다수의 유적이 광범위한 지역에서 나타났다는 기록도 볼 수 있다.

서울 호암산성은 나당전쟁시기에서 통일신라시기까지 주변의 양천고성, 행주산성, 오두산성으로 연결되는 육로상의 금천지역 거점 성곽이었다. 외침을 막기 위해 전략적으로 축성된 호암산성은 통일신라 후에 국내 정세가 안정되면서 고려와 조선에서는 군사적 거점으로서의 기능이 점차 사라지고 생활시설 및 의례시설로 변화해간 것으로 추정된다.

호암산성 정상의 한우물은 푸르고 맑았다. 수면에 비치는 나무그림자가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물위에 떠있는 붉은 낙엽들이 언뜻 보기에 비단잉어인 줄 알았다. 시대가 수없이 바뀌었음에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존재하는 한우물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 오아시스다. 사철 마르지 않는다는 한우물은 산 정상에서 만나기에 신비롭고 더 반갑다. 아직 발굴되지 못하고 있는 제2우물지 등에는 어떤 역사적 유물들이 잠들어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호암산 오르는길 바위들(사진=CPN문화재TV심연홍기자)
 호암산 오르는길 바위들(사진=CPN문화재TV심연홍기자)
ⓒ 심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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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나 금천구청 담당주무관은 "한우물과 떨어진 거리에 제2우물지가 있는데 현재 발굴되지 않은 상태여서 우물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1918년까지 복원과 정비작업을 했는데 그 이후로 중단된 상태다." 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현재는 예산지원이 없어 발굴이 중단된 상황이라는 것이다.

호암산성과 한우물 및 주변 사적지는 신라 삼국통일과정에서의 상징적 의미와 함께 학술적으로도 매우 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통일신라초기부터 고려, 조전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은 역사와 문화를 창조했던 살아있는 역사적 현장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제2우물지 등 미 발굴된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기 발굴된 문화재정비와 등산로 우회 같은 유적 보존대책이 절실히 필요한 것으로 판단된다.

*호암산 석구상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CPN문화재TV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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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N문화재TV 심연홍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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