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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 선생 주시경 선생
▲ 주시경 선생 주시경 선생
ⓒ 김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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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은 한말ㆍ국난기에 나라사랑 정신이 각별했다.

한말 진보적 지식인들은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해서 전개된 개화적 내셔널리즘으로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를 통한 자주독립의 수호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지만, 이후 애국계몽운동과 신교육운동을 통해 근대적 자주독립국가를 이루고자 하였다. 주시경은 늘 그 전선의 앞장에 섰다.
 
면암 최익현이 1906년 6월 전라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싸우다 쓰시마에 유배되어 단식 끝에 절명하였다. "내 늙은 몸으로 어이 원수의 밥을 먹고 더 살겠느냐. 너희나 살아 돌아가 나라를 구하라"는 유언을 남긴 최익현의 영구가 부산에 도착했을 때 애도하는 인파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주시경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면암 최익현 초상(勉菴 崔益鉉, 1833~1906년) 비단에 채색, 청양 모덕사 소장.
 면암 최익현 초상(勉菴 崔益鉉, 1833~1906년) 비단에 채색, 청양 모덕사 소장.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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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 70여 명과 함께 종로 탑골 승방에서 추도식을 열고 면암의 정신계승을 다짐하는 한편 기념사업으로 기금을 모아 일본인을 비롯 외국인이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철도 부설권의 회수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영친왕(고종의 셋째아들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이 겨우 11살인데도 유학시킨다는 명목으로 일본으로 끌고갔다. 사실상 볼모로 잡아가는 것이었다. 이 때 수행원이란 이름으로 따라가게 된 사람도 많았다.
 
주시경의 동생 시강도 수행원이 되고자 지원하였다. 출세길이 열리는 기회였다. 주시경은 단호하게 반대하였다. "이는 침략의 수단이니 불의의 길에 편승하여 영달하더라도 배달의 피를 받은 국민으로서는 택할 길이 못된다"고 이를 막았다.

또 법관양성소라 하는 기관이 있어서 선생은 그 아우 시강과 민병위 두 사람을 응시하게 하였다. 그러나 실력으로 뽑는 것이 아니라 정실 관계나 이해타산으로 좌우됨을 알고 시강은 형님되는 선생더러 시험장에 얼굴만이라도 한 번 내어 놓아 주면 무난하겠다고 하였다. 선생은 너희도 그러한 부정직한 사상을 가지느냐고 책망하였다. 과연 부정 처리로 발표됨을 안 선생은 항의도 하고 탄식도 하였다. (주석 1)

주시경은 성품이 강직하고 올곧아서 불의와는 타협할 줄 모르고 부나 직위 따위에 연연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보니 생계가 어려웠다. 하는 일은 많았으나 수입이 별로 없는 일이었다. 1901년 12월에 장남 삼산(三山)이 태어나고, 2년 뒤 11월에 차남 백산(白山)이 출생하여 식구가 넷이 되었다.

그 생애는 아주 가난하고 고달픈 편이었으니,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은 거의 없고, 거느린 식솔은 적지 않았는데, 하는 일이라는 것이 또한 보수가 넉넉한 것이 아니므로, 한 집안 살림을 꾸려가는 것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나, 한 가정을 이루어 따로 살림을 낸 뒤로는 집안 일이든 집 바깥 일이든 보살펴 주는 사람이 거의 없는 살림을 혼자서 꾸려 가면서도 국어 연구의 노력을 일찍이 중도에서 그만두어 본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주석 2)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국어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나라사랑의 정신이 투철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이의 마음 고생과 애씀이 얼마나 지극하였을 것인가는 그 직접 당사자 외의 다른 사람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선생은 국어 연구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할 수 있으니, 자기 몸이나 자기 가정을 생각하는 마음도 없었으며, 명예와 이익을 생각하는 마음도 없었으며, 피곤함을 피곤함으로 느끼지도 않았으며, 어려움을 어려움으로 느끼지도 않았고, 불가능을 불가능으로 보지도 않았으며, 오르지 이를 위하여 받는 지극한 고통과 수고로움을 가장 큰 쾌락으로 알았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주석 3)
 

주석
1> 김윤경, 앞의 책, 223쪽.
2> 임홍빈, 「청춘본 '주시경선생 역사' 역주」, 『주시경 학보』 제1집, 252쪽.
3> 앞의 책, 252~253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한글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선생‘]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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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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