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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 선생 주시경 선생
▲ 주시경 선생 주시경 선생
ⓒ 한글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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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이 쫓기다시피 미국으로 떠나면서 『독립신문』은 윤치호와 주시경이 맡아 운영하였다. 고종이 적대시하고, 열강의 이권탈취를 매섭게 비판해온 까닭에 러시아ㆍ청국ㆍ일본 등 외세가 사갈시하는 『독립신문』은 운영이 쉽지 않았다.

여기에 관변단체로 세력을 키워온 황국협회와 보부상 무리가 『독립신문』과 만민공동회 간부들에 대한 테러와 협박이 잦아졌다. 주시경에게는 영육이 함께 혹독한 시련기였다.

그뒤 『독립신문』을 윤치호와 주시경이 맡아 운영하였는데 정부에서 그들을 잡으려고 병정을 보내었으므로 영국 공사관에 둘이 숨어 피하였고, 10일 뒤에 공사와 협의하여 정치적으로 무마시켜 신문을 다시 계속하였다. 그뒤 또 정부 공격하여 직언으로 잡으려 하므로 주시경은 봉산 자형(이종호) 댁에 도피하여 석 달 동안 농촌 생활을 하다가 유일선ㆍ남형우로부터 무사히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주석 1)

주시경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에 남다른 애정과 열정을 보였다.

아직 20대 초반의 배제학당 학생 신분이었음에도 두 기관에서 개화파 지도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일하였다. 그래서 이들 기관이 해체되고 서재필이 떠난 후 누구보다 아픔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시경과 서재필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주시경은 서재필이 귀국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국문법을 연구하고 있던 당시 거의 유일한 국문 전용론자였다. 서재필이 새로 창간하는 신문을 일반 국민과 부녀층도 읽을 수 있도록 국문전용으로 발행할 의도를 갖고 있는 한 함께 일할 적격자로 발탁될 인물은 주시경이 되도록 되어 있었다. (주석 2)

서재필의 문서에는 "서재필이 『독립신문』의 주필이고 주시경은 '국문판 조필' 이라고 기록하였다. 주시경이 서재필 다음으로 『독립신문』의 제2인자였으며, 특히 『독립신문』 국문판 제작은 「논설」을 제외하고는 주시경의 담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석 3)

  
 tvN <미스터 션샤인>에도 나온 '독립신문'
 tvN <미스터 션샤인>에도 나온 "독립신문"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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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은 『독립신문』 재직 중에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창설하고 본격적으로 국문을 연구하였다. 신문발행과 더불어 설치한 국문연구는 그의 필생의 과제가 되었다. 이 기구는 정부가 1907년 학부 안에 마련한 '국문연구소'의 탯줄 역할을 하였다.

신문사와 독립협회가 강제로 해체된 뒤에도 주시경은 좌절하거나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나라의 운명이 점차 위태로워 지면서 그는 더욱 분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23살이던 1898년 9월에 신문사를 떠난 후 이듬해 10월부터 3개월 동안 서울 남대문 근처에 사옥을 둔 『제국신문』 기자로 들어갔다. 1898년 8월 10일 일간지로 창간된 이 신문의 원명은 『뎨국신문(帝國新聞)』으로, 뒷날 민족대표 33인 중의 일원인 이종일이 창간하였다.

『뎨국신문』 은 1903년 7월 7일 제호를 『제국신문』으로 변경했다. 이 때부터 관보는 한자로 보도했다. 『제국신문』은 중류 이하의 일반 대중과 부녀자를 주된 대상으로 삼아 읽기 쉽고 재미있는 신문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이유로 당시 사람들은 『황성신문』을  수신문이라 부르고, 『제국신문』을 암신문이라 하였다.

이 신문은 1907년에 지면을 대판으로 확장하면서 이인직(李人稙)의 소설〈혈(血)의 누(淚)〉 하편 1장을 연재하기도 하였다. 이 신문은 초기부터 줄곧 재정난으로 시달리다가 1910년 8월 2일 그 어려움을 이기지 못 하고 스스로 문을 닫았다. (주석 4)

 
 1900년 5월 6일자 뎨국신문(제국신문)
 1900년 5월 6일자 뎨국신문(제국신문)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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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신문』을 수신문이라 부르고 『제국신문』을 암신문이라 부를만큼 한글을 사용했던 이 신문이 당대의 한글전용론자인 주시경을 놓칠 리 없었을 것이다. 발행인 이종일이 쓴 것으로 알려진 창간사 격인 논설 「고백」의 후반부를 소개한다.

그동안에 극중에 신문이 여럿이 생겨 혹 날마다 발간도 하며 혹 간일하여 내기도 하며 혹 일주일 동안에 한두번씩 내기도 하는데 그 중에 영어신문이 하나요 일어로 섞어 내는 것도 있으되 그중에 국문으로 내는 것이 제일 긴요한 줄로 믿는 고로,

우리도 또한 순국문으로 박을 터인데 론설과 관보와 잡보와 외국통신과 전보와 광고 등 여러 가지를 내어 학문상에 유조할 만한 말이며 시국에 진적한 소문을 들어 등재하려는 바 본사 주의인 즉,

신문을 아모조록 널리 전파하여 국가 개명에 만분지 일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여 특별히 값을 간략히 마련하고 날마다 진실히 전하여 보시는 이들에게 극히 편리토록 주의하오니 사방 첨군자는 많이 사다들 보시기를 깊이 바라오. (주석 5)


주시경이 『제국신문』에 3개월간 근무하면서 무슨 글을 썼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당시의 '기자'는 논설과 취재를 겸하고 있어서, 그는 이 신문에 많은 논설을 썼을 것이다. 그런데 짧은 기간에 왜 그만 두었는지, 미제로 남는다.

주시경은 한말 격변기에 대표적인 한글전용의 두 신문사에서 일한 개명한 구국 언론인이었다. 이 부분은 주시경 연구나 한국개화기 언론사 연구에서 소홀히 취급되고 있다.


주석
1> 김윤경, 『인물 한국사』, 340쪽.
2> 신용하, 「주시경의 사상체계」, 『주시경학보』, 제8집, 231쪽, 탑출판사, 1993.
3> 앞의 책, 232쪽.
4> 김민환, 『한국언론사』, 125쪽, 사회비평사, 1996.
5> 김용호, 『옥파 이종일 연구』, 87쪽, 교학사, 1984.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한글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선생‘]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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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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